[이번 주 세계 교회 역사] ‘하나님, 그 영광스러운 빛’

신상목 2024. 4. 1. 05:57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어제 부활절은 잘 보내셨는지요. 날씨도 완연한 봄날이었습니다. 거리의 나무마다 새싹이 성큼 돋았고 벚꽃 목련꽃 개나리꽃도 많이 피었습니다. 겨우내 죽은 것처럼 보였던 나무들에서 싱그러운 꽃과 이파리가 돋아나는 게 신비로웠습니다. 나무들의 집단 부활처럼 보였습니다. 우리도 언젠가 주님처럼 부활해서 주님과 함께 영생 복락을 누리겠지요. 그 날을 사모하면서 오늘도 승리하는 하루 되시길 바래봅니다.

이번 주 세계 교회 역사 속에는 18세기 미국 대각성운동의 영향 속에서 아메리카 원주민 선교에 힘쓴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와 영국 시인 조지 허버트, 르네상스 목판화가 알브레히트 뒤러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관심 가지고 읽어주십시오.

가장 유명한 아메리카 원주민 선교사
1745년 4월 1일 매사추세츠와 펜실베이니아에서 일했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가 뉴저지의 아메리카 원주민을 대상으로 선교 활동을 시작합니다. 뉴저지 원주민들은 누구보다 많은 관심을 보였지만 브레이너드는 그곳에서 일한 지 2년 만에 결핵으로 사망합니다. 조너선 에드워즈가 출판한 그의 일기는 윌리엄 캐리, 헨리 마틴, 토머스 코크와 같은 후대 선교사들에게 영감을 주며 선교 사역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브레이너드는 아메리카 인디언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한 가장 유명한 선교사입니다. 그는 뉴잉글랜드 청교도 신앙의 계승자이자 대각성운동이 낳은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는 1718년 4월 20일 미국 코네티컷주 해담에서 의회의원이던 아버지의 아홉 자녀 중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브레이너드가 아홉 살 때, 열네 살 되던 해에는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납니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극도의 실의와 우울증에 빠져 이후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21세에 온전한 회심을 경험한 그는 영혼의 깊은 절망과 두려움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을 만납니다. 그는 “그 하나님을, 그토록 영광스러운 빛”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경험했고 영혼은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해졌습니다.

그는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예일대에 입학했습니다. 이때 조지 휫필드가 예일대를 포함해 코네티컷의 뉴헤이븐 지역을 6주간 순회 전도하면서 영적 각성이 일어납니다. 브레이너드는 1740년부터 본격적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일대에서 제적당하는 사건을 겪습니다. 휘틀시라는 교수에 대한 친구들과의 대화 속에서 그 교수에 대해 “의자만큼의 자비심도 없다”고 했고 위선자라고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의 발언은 과장돼 학교 당국에 전달됐고 그는 학교 당국의 공개 사과 요구를 거절해 퇴학당합니다. 그는 복학도, 졸업도 허락이 되지 않았습니다. 퇴학 이후 재학 시절 에버니저 펨버턴에게 인디언 선교에 대해 가슴을 울리는 메시지를 들은 기억이 나서 인디언 선교를 생각합니다.

이후 1742년 11월 스코틀랜드 기독교지식보급회(SSPCK)로부터 인디언 선교사 임명을 받고 그 부르심을 받아들였습니다. 그의 첫 사역지인 매사추세츠 스톡브리지 외곽 지역에서 인디언들을 위해 원주민어를 배우고 기도문과 시편을 번역하는 일이었습니다. 1743년 4월 카우나우믹 인디언들을 위한 사역을 시작합니다. 독립심이 강했던 그는 하루라도 빨리 회심자를 얻기 위해 몸을 던져 사역했습니다.

1743년 9월 조너선 에드워즈를 처음 만나 교제를 시작합니다. 당시 에드워즈는 ‘제적사건’에 대해 함께 대화를 나누면서 브레이너드의 신앙적 태도와 그 성품에 깊은 인상을 받습니다.

1744년 5월에는 펜실베이니아 델라웨어강 주변에 거주하는 많은 원주민들을 섬깁니다. 1745년 6월 뉴저지주 크로스윅성 인디언들을 위한 사역을 시작합니다. 1746년 5월 델라웨어 원주민 가운데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한 가운데 원주민 전체가 뉴저지의 크랜베리로 이주합니다. 브레이너드도 그들과 함께 갑니다. 당시 회심자가 100명이 넘었고 교회도 설립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핵으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1747년, 병이 깊어져 더 이상 사역을 할 수 없을 때까지 그곳에서 원주민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는 1년에 4000마일의 거리를 말과 함께 그야말로 풍찬노숙(風餐露宿·바람을 먹고 이슬에 잠잔다)을 하면서 주로 인디언 원주민들을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아 사역했습니다.

1747년 5월 마지막 5개월을 조너선 에드워즈의 집에서 그의 가족의 보살핌 속에 보냅니다. 특히 에드워즈의 17세 된 딸 제루샤가 브레이너드를 헌신적으로 돌봤습니다. 그녀 역시 감염돼 이듬해 겨울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 성도가 어떻게 마지막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지, 이 짧은 기간 동안 브레이너드를 통해 많은 이들이 깊은 영적 감화를 받습니다. 1747년 10월 9일 오랜 지병인 폐결핵으로 숨을 거두고 그토록 가기를 소망하던 주님의 품으로 영원히 떠났습니다.

브레이너드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후 조너선 에드워즈는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생애와 일기’를 출간했습니다. 이 책은 모든 세대의 영적 자서전 가운데 우뚝 선 책으로 꼽힐 뿐 아니라 출간된 지 250년이 지난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절판된 적이 없다고 합니다.

빌리 그레이엄을 믿게 한 설교자
1877년 4월 2일 미국 켄터키주 앨런 카운티에서 근본주의 침례교 전도자 모르드카이 햄이 태어납니다. 1934년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에서 열린 햄 집회에서 신앙 선언을 한 빌리 그레이엄을 포함하여 사역 말기에는 100만명이 개종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미국 하나님의성회 창립
1914년 4월 2일 미국 아칸소주 핫스프링스의 그랜드오페라하우스에서 오순절주의자 300명이 모여 10일간 회의를 가졌습니다. 원래는 연례 회의를 조직하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회의가 끝날 무렵 오순절주의의 가장 큰 교단인 하나님의성회(Assembly of God·AG)가 창립됐습니다.

미국 AG 홈페이지에 따르면 AG 산하에 1만3000여개의 교회가 있으며 300만명이 넘는 회원과 성도가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6900만명 이상의 하나님의성회 회원이 있으며 하나님의성회는 세계 최대의 오순절 교단입니다. 하나님의성회는 구원, 성령세례, 치유, 그리스도의 재림을 강조합니다.

조지 허버트, 영국 최고의 기독교 시인
1593년 4월 3일 영국 최고의 기독교 시인 중 한 명인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 1593∼1633)가 웨일스의 몽고메리 성에서 태어납니다. 10명의 자녀를 둔 리처드 허버트와 맥덜린의 다섯째 아들이었고 펨브로크 백작 후손이었습니다. 슈롭셔의 아이턴과 옥스퍼드를 거쳐 1601년 허버트 가족은 런던의 채링크로스 구에 정착했습니다. 이 시기 허버트의 어머니는 존 던을 비롯한 문인들과 예술가들의 후원자 역할을 하면서 종종 만찬에 그들을 초대했고 허버트는 일찍부터 문학과 음악과 무용 등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허버트는 유서 깊은 런던의 교육 기관인 웨스트민스터에서 그리스어·라틴어·음악 등을 공부했고 류트와 비올라 연주에 특히 재능을 보였습니다. 이 시기 후반 그의 어머니는 자신보다 훨씬 연하인 존 댄버스 경과 재혼했는데 허버트는 계부의 사랑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6세 때인 1609년 5월 케임브리지대 트리니티칼리지로 진학한 그는 이듬해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시적 능력은 비너스 여신에게 바쳐지는 숱한 연애시가 아니라 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봉헌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 서약을 입증할 소네트 2편을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대학 시절 학업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1612년에 학사, 1616년에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트리니티칼리지의 펠로로 선임된 그는 튜터로 임명되어 여러 학생들을 지도했고 1618년에는 수사학 강사로 임명돼 고전 시대 저자들에 대해 강의했습니다. 1619년 부대표 연사로 임명된 그는 이듬해 대표 연사(Public Orator)가 되었습니다. 대표 연사로서 그는 대학의 공식 서한들을 작성했고, 대학이 왕족을 비롯한 중요한 방문객들과 후원자들에게 적절한 기회에 행하는 공식 연설의 책임을 맡았습니다. 이 케임브리지 시절에 허버트는 라틴어 시편들을 꽤 많이 썼고, 사후 발간될 ‘성전(The Temple)’(1633)에 수록된 여러 영어 시편들의 초고들을 썼습니다.

허버트가 세속적 야망을 추구하지 않았던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고난(Affliction)’에서 기술하듯 그가 영적 헌신과 세속적 야망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허버트는 사제가 되겠다는 타고난 소명 의식을 가졌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1625년 봄에 제임스 1세가 사망했고 여름에 런던에서 역병이 발생했습니다. 허버트는 1626년에야 사제직에 이르는 첫 단계인 부제가 되었고 그렇게 영국 국교회의 성직자 길에 투신했습니다. 그는 그 후 4년이 지난 1630년에 비로소 사제가 되었는데 그때에도 솔즈베리 근처의 베머튼 성직록을 얻은 지 5∼6개월 후에야 서임되었습니다. 이 무렵 허버트는 자신이 성직에 적합한지에 확신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망설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1629년 결혼 그는 윌트셔의 베인튼코트에 있는 처가에서 살았고 이듬해 그가 서임된 후 베머튼의 성직록 사제관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는 여생을 그곳에서 보냈고 고아가 된 조카딸들에게 집을 제공하고 펨브로크 백작의 소속 사제 역을 맡았습니다. 그는 사제로서의 삶에 만족하면서 성직을 수행했고 시집 ‘성전’과 산문 저작인 ‘성전의 사제’를 완성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무렵 그동안 썩 좋지는 않았던 그의 건강은 악화하고 있었습니다. 폐결핵을 앓는 동안 그는 다른 사람을 통해 리틀기딩의 작은 수도원 공동체 수장이던 벗 니콜라스 페라에게 시집 ‘성전’의 원고를 건네면서 “이 시편들에서 내가 나 자신의 뜻을 나의 주인이신 예수님 뜻에 복종시킬 수 있기 전에 하나님과 내 영혼 사이에 일어났던 숱한 영적 갈등들의 그림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제 나는 그분을 섬기면서 완전한 자유를 찾았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러고는 그 원고가 “낙담한 가엾은 영혼들에게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면 발간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태워 버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서임된 지 3년 후인 1633년 3월 3일, 40세가 채 안 된 그는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고 베머튼의 세인트앤드루 성당의 제단 아래 묻혔습니다.

그의 작품 중 ‘부활절 날개(Easter wings)’를 감상해 보시지요.

Lord, who createdst man in wealth and store,
Though foolishly he lost the same,
Decaying more and more,
Till he became
Most poore:
With thee
Oh let me rise
As larks, harmomiously,
And sing this day thy victories:
Then shall the fall further the flight in me.

My tender age in sorrow did beginne:
And still with sickness and shame
Thou didst so punish sinne,
That I became
Most thinne.
With thee
Let me combine
And feel this day thy victorie:
For, if I imp my wing on thine
Affliction shall advance the flight in me.

주님, 당신은 인간을 부유하고 풍족하게 창조하셨습니다.
비록 어리석게도, 인간이 그것을 잊어버리고
점점 더 쇠락해져서
마침내 그가
가장 가난하게 되었을지라도 말입니다.
당신과 함께
오, 제가 상승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종달새처럼, 조화롭게,
그리고 오늘 당신의 승리를 노래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추락이 내 안에서 더한 비상을 할 것입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슬픔 속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병과 수치로
당신의 죄를 그처럼 벌하여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가장 가냘프게 되었습니다.
내가 결합하게 해주십시오.
왜냐하면 내가 만약 나의 날개를 당신의 날개와 결합할 수 있다면
고통이 내 안에서 나의 비상을 촉진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16세기 목판화의 대가, 알브레히트 뒤러
1528년 4월 6일 독일의 화가이자 판화가, 목판화 디자이너인 알브레히트 뒤러가 사망합니다. 종교적인 장면으로 유명한 그는 마르틴 루터의 영향을 받아 개신교로 개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루터를 ‘나를 큰 고민에서 벗어나게 해준 위대한 기독교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기도하는 손(praying hand)’입니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기도하는 손'.

뒤러는 뛰어난 재능을 지닌 화가였을 뿐만 아니라 도안가 판화가 작가로서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그가 평생에 걸쳐 수없이 그렸던 자화상에서 엿볼 수 있듯이 뒤러는 스스로를 장인이기보다는 지식인이기를 원했던 최초의 미술가 중 한 명으로 ‘르네상스인’이라는 수식어를 얻었습니다.

헝가리 출신의 아버지는 금세공사였지만 뒤러는 가업을 잇지 않고 화가로 일을 합니다. 화가 겸 삽화가인 미카엘 볼게무트의 도제로 들어간 뒤 장인으로서 1490년부터 1494년에 걸쳐 여행을 떠났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뒤러는 결혼을 했고 아내의 지참금으로 공방을 차려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지식과 자극에 대한 갈망으로 여행을 떠났고 이탈리아로 향했습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을 경험한 이후 대표적인 회화 작품들을 그려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특히 훌륭한 판화 작품들은 그의 명성을 드높이는 데 일조했습니다. 그는 판화에서 섬세한 평행선과 교차선을 사용해 대상의 양감이나 명암을 표현하는 기법을 선보였고 질감 표현에도 뛰어났습니다.

뒤러의 자의식은 그의 현존하는 가장 초기작인 세심하게 그린 은필화 <13세의 자화상>(1484)에서 이미 나타났지만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작품은 <모피 코트를 입은 자화상>(1500)(아래 사진)입니다. 그의 중기 작품인 이 자화상에서 뒤러는 얼굴을 완벽하게 좌우 대칭으로 그리는 그리스도의 초상화법을 이용했고, ‘나, 뉘른베르크의 알브레히트 뒤러는 28세에 지울 수 없는 색으로 나를 그렸다’라고 새겼습니다.

뒤러의 자화상(1500)


1509년부터 뒤러는 뉘른베르크 시위원회가 임명한 미술가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도시의 예술 계획을 입안하는데 뒤러가 상당 부분 관여했다고 추측합니다. 뒤러는 이 시기 동안 작은 크기의 동판화와 목판화 이외에 중요한 목판화 연작을 간행했습니다.

당시 뒤러는 드라이포인트 기법을 이용해 판화를 제작했습니다. <성녀 베로니카〉<고통을 겪는 구세주〉〈참회하는 성 히에로니무스〉등을 제작했습니다. 이 시기부터 뒤러 작품에서는 목판화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뒤러가 회화 작품은 점차 줄었습니다. 뒤러는 막시밀리안 황제로부터 자신의 목판화와 동판화를 복제하는 것을 금지할 수 있는 특별한 권리를 얻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그의 유명한 동판화 <기사, 죽음과 악마〉〈서재의 성 히에로니무스〉〈멜랑콜리아I〉등을 제작했습니다.

1520년 6월부터 뒤러는 다시 여행을 떠납니다. 네덜란드로의 여행은 개선 행진과 같았습니다. 도처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된 카를 5세도 이전 특권들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고향 도시로 돌아온 이후에 뒤러는 다시금 작품 제작에 몰두했습니다. 1520~1521년 그는 뉘른베르크 시청사의 장식을 책임졌습니다. 뮌헨의 알테 피나코텍 미술관에 소장된 뒤러의 가장 중요한 작품에 속하는 두 점의 거대한 목판화는 1526년 제작되었습니다. 이 목판화는 바울과 베드로, 마가복음 저자, 요한복음 저자의 실물 크기 인물상이었으며 동시에 4가지 체액을 믿는 이론을 형상화한 작품이었습니다. 네덜란드 여행 이후 말라리아로 고통을 받고 있던 뒤러는 1528년 4월 6일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