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우라도 혼자서는 못 이긴다…'초한지'가 말하는 '승리' 공식

유성운 2024. 3. 3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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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극 '패왕별희' 중 초나라 패왕 항우가 한나라 병사들과 싸우고 있다. 사진 국립극장

“한(漢)나라 군대는 무너져 내려 항우(項羽)는 이 싸움에서 10여만을 죽였다. 남쪽으로 달아난 한나라 패잔병의 뒤를 초(楚)가 추격하여 영벽(靈壁)의 동쪽 수수(睢水) 강기슭에 이르렀다. 수많은 군사는 여기서 떼죽음을 당했고, 10여만은 수수로 뛰어들었다. 수수는 죽은 한나라 군사들의 시체로 가득 찼고, 물조차 흐르지 못하였다." 『사기(史記)』
「 항우본기(項羽本紀)」

초한대전(기원전 206~202년)의 분기점은 팽성대전입니다. 무려 60만명의 대군을 일으킨 유방은 항우의 정예 3만5000명에게 궤멸적인 대패를 당했습니다. 어느 쪽에 붙을지 고민하다가 유방 편에 붙었던 제후들 상당수가 이때 다시 항우 편으로 돌아섰습니다. 이제 유방은 재기가 어려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죠. 하지만 역사는 결과가 정반대였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유방이 이 패배로부터 최후의 승리를 거머쥘 중요한 깨달음을 얻은 덕분입니다.

북벌을 성공한 유방의 자신감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라고 불린 항우가 얼마나 강했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조나라를 포위한 15만의 진나라 군대를 전멸시킨 거록대전부터 진시황이 일군 통일 제국 진(秦)을 무너뜨리기까지 항우는 패배를 모르는 무장이었습니다. 그가 거병 후 천하를 제패하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2년, 중국 역사상 최단기간입니다.

그랬기에 진나라 멸망 후 항우가 천하를 자기 맘대로 나눴을 때, 라이벌 유방은 가장 변두리였던 파촉을 배정받고도 찍소리 못한 채 떠나야 했습니다. 유방을 험지로 보내고도 불안했던 항우는 옛 진나라 땅을 분할해 옹·적·새라는 세 나라를 세움으로써 대(對) 유방 방어망을 구축했습니다. 유방이 파촉 밖으로 군사를 이끌고 나올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항우는 유방의 한(漢)을 막기 위해 옛 진(秦)나라 땅에 옹(雍)-적(翟)-새(塞) 3국을 신설해 방어벽으로 삼았다. 자료 바이두

『삼국지』에도 등장하지만, 촉에서 군대를 이끌고 나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제갈량조차도 이곳에서 네 차례 북벌을 시도했지만, 모두 무위에 그쳤으니까요. 심지어 항우는 삼겹의 방어벽까지 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유방은 그 어려운 북벌을 단 한 번 만에 성공합니다. 항우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3진(옹·적·새) 방어벽을 모두 뚫어내고 당시 가장 기름지고 요충지인 관중을 차지한 것이죠.
이것은 유방의 능력이라기보다 총사령관이었던 한신의 신묘한 전략 덕분이었는데, 결국 이것이 독이 됐습니다. 이후 좀 만만해 보였을까요. 유방은 한신을 관중 땅에 남겨둔 뒤 홀로 60만 대군을 이끌고 항우와 맞붙으러 갔습니다. 자신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항우를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코에이사의 게임 '삼국지 14' 중 북벌 진로. 제갈량은 네 차례 북벌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당시 항우는 제나라에서 일어난 반(反) 항우 움직임을 견제하기 위해 출정한 터였습니다. 초나라 전력이 분산된 데다 본진이 비어있으니 더욱 만만히 봤을 것입니다. 유방은 일시적으로 항우의 근거지인 팽성을 점령하는 순간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지만, 결국 제나라에서 빠르게 귀환한 항우에게 대패를 당했습니다.

나눔의 용병술을 깨달은 유방
팽성대전에서 60만명이나 되는 압도적 병력을 가졌음에도 패배한 이유는 통솔이 제대로 안 됐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반(反) 항우’의 기치를 내걸고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연합군이었습니다. 즉, 훈련된 하나의 팀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항우가 빠르게 기습을 가하자 당황한 60만 대군은 순식간에 오합지졸이 돼 전멸당했습니다.

유방은 이제서야 거품을 뺀 자신의 실력을 직시하게 됐습니다. 북벌을 성공한 것은 어디까지나 실력 있는 부하(한신)를 믿고 군사를 맡긴 덕분이지, 자신의 천재적 능력이 아니라는 것이죠. 알렉스 퍼거슨 감독 이후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잘 보여주듯 유명한 선수들을 사 모은다고 강팀이 되는 것은 아니는 것처럼 말이죠.
유방은 다시 한신에게 군 통수권을 맡겼습니다. 이후 유방은 항우를 완전히 패배시킬 때까지 대군의 지휘를 맡지 않았습니다.

유방으로부터 병력을 넘겨받은 한신은 항우 편에 섰던 황하 이북의 제후국을 모조리 격파했습니다. 유방은 또 한때 항우에 협력했던 영포와 팽월을 회유해 항우의 후방을 공격하도록 했습니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항우를 상대할 ‘팀’을 만든 것이죠.

유방으로부터 병력을 넘겨받은 한신은 항우가 유방과 대치하는 동안 황하 북방의 연, 조, 제 등의 제후국들을 평정해 판세를 가져왔다. 자료 유튜브 Fish and Maps에서 인용


'원톱' 엘리트 항우의 한계
초나라의 명문 가문 출신인 항우는 자부심이 강했습니다. 거기에 천부적인 군사적 재능으로 2년 만에 천하를 제패하는 업적을 이뤘습니다. 그러니 누군가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그는 농민 출신인 유방을 무시했고, 부하들의 능력이나 공을 인정하는 데도 박했습니다. 모든 것이 ‘내 능력 덕분’인 것이죠. ‘팀’으로서 일한다는 개념은 희박했습니다.
항우 밑에 좋은 인재가 없던 것도 아닙니다. 종리매, 계포, 용저는 유방을 도왔던 번쾌, 주발 등에 비견할만한 장수였고, 범증도 장량이나 진평 못지않은 책사였습니다.

하지만 항우는 누군가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모든 것을 지휘해야 직성이 풀렸습니다. 실제로 항우가 지휘한 전투의 승률이 높았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모든 전투에 항우가 나타나야만 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단판 승부라면 모를까, 장기전에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신, 팽월, 영포 등에게 적절히 나눌 수 있었던 유방에게 천하를 넘겨준 원인입니다. 결국 ‘사면초가’가 들리는 포위망에 걸려든 최후의 순간 항우 곁에 남은 건 그가 평생 유이하게 아꼈던 부인(우미인)과 명마(오추) 뿐이었습니다.
항우 밑에 있다가 유방으로 진영을 갈아탄 한신이 내린 평가는 이렇습니다.

“항왕(항우)이 화를 내며 큰소리를 지르면 1000명이 모두 엎드리지만, 어진 장수를 믿고 일을 맡기지 못하니 그저 보통 남자의 용맹에 지나지 않습니다. 항왕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공손하고 자애로우며 말씨가 부드럽습니다. 누군가 병에 걸리면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나누어 줍니다. 그러나 부하가 공을 세워 벼슬을 주어야 할 경우가 되면 인장이 닳아 깨질 때까지 만지작거리며 선뜻 내주지 못하니, 아녀자의 인자함일 뿐입니다.”

진시황이 죽은 뒤 천하 패권을 두고 유방과 싸움을 벌이던 항우가 그를 유인해 죽이려고 했던 식사 자리 홍문연의 상상도. 중앙포토


역사가들은 항우가 유방보다 전투도 능했고, 교양도 높았으며, 인정도 많았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는 부하들과 팀을 만드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책사인 범증도 의심하다가 죽게 만들었습니다. 훗날 유방은 자신의 승리에 대해 “항우는 그나마 있던 범증 한 사람도 제대로 쓰지 못해서 나에게 패한 것”이라고 회고했습니다.

첨언하자면 유방은 천하를 손에 쥔 뒤 군국제(郡國制)를 도입했습니다.
천자가 제후들에게 천하의 땅을 나눠준 주나라의 봉건제와 중앙 정부가 전국에 관료를 파견한 진나라의 군현제(郡縣制)를 섞은 실험적 제도였습니다. 봉건제나 군현제, 또는 군국제 중 어느 체제가 더 낫다고 할 수 없습니다. 시대적 환경과 지도자의 스타일 등을 복합적으로 따져봤을 때 더 효율적인 모델이 있을 뿐이죠.
예를 들어 모든 권력이 황제 1인에게 집중되는 군현제는 혁신적 독재자였던 진시황에 의해 톱니바퀴 맞추듯 굴러갔지만, 시황제가 죽고 난 뒤엔 시스템이 마비됐습니다. 모두 황제만 바라보게 했던 결과였습니다.

군현제와 군국제
연두색이 군현제로 다스린 지역, 녹색은 봉건제로 나눠준 지역. 한나라는 군현제와 봉건제를 혼합한 군국제를 도입했다. 자료 바이두

유방은 수도 장안을 중심으로 한 일부 영토에만 군현제를 적용했고, 나머지는 제후들에게 땅을 나눠줬습니다. 마음 같아서야 황제 권력이 절대적인 군현제를 사용하고 싶었겠지요. 하지만 군현제를 실시하려면 도로망 같은 인프라도 완비되어야 하고, 전국에 관료를 보낼만큼 충분한 인재풀도 확보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진나라의 폭정과 수년 간의 초한전쟁을 거친 뒤라 한나라 초기엔 그럴만한 여유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유방은 부하를 쓰고 전투하는 법은 알았지만, 정치는 잘 몰랐습니다. 황제에게 모든 일이 집중되는 군현제는 제왕학으로 훈련된 자가 다스릴 때 가능한 시스템입니다. 즉, 유방이 군국제를 수용한 것은 자신이 누대에 걸쳐 제왕학을 익힌 진나라 왕실(진시황)과는 다르다는 차이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장단점을 알았기에 역사에서 승리한 것이겠죠.

27일 충북 청주를 방문해 시민과 인사를 나누는 이재명 민주당 대표(왼쪽 사진)와 인천에서 대학생과 만난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겸 총괄선대위원장. 전민규 기자

4·10 총선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한 달 전만 해도 여권의 승리가 예상됐지만 이제 야권의 180석 획득 전망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판세가 바뀐 요인에는 이종섭 전 호주대사 논란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선거'라는 틀에서만 볼 때, 여당의 '원톱' 전략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습니다.
단적인 예가 지난 일요일(24일) 양당 지도부의 행보입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재명 대표가 한강 벨트를, 김부겸 공동선대위원장이 낙동강 벨트를, 이해찬 공동선대위원장이 충청권을 각각 공략했습니다. 이번 선거의 핵심 접전지로 꼽힙니다.
반면 국민의힘은 나경원·안철수 공동선대위원장이 각각 자신의 지역구인 서울 동작을과 경기 분당갑 유세 활동을 하느라 다른 지역에 갈 여유가 없었습니다. 대중 호소력이 좋은 이들의 발이 묶이면서 국민의힘은 사실상 한동훈 비대위원장만 바라보는 구도가 됐습니다. 여권에 이렇게 인물난을 겪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기는 정치학』을 쓴 최병천 신성장경제연구소장의 분석은 이렇습니다. “윤석열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반문 연대’를 구축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선 승리 후 유승민 전 의원, 이준석 전 대표 등을 하나하나 쳐내면서 연대에 가담했던 중도층, 20·30 남성, 지식인 등이 이탈했다.”
‘뺄셈의 정치학’으로 연대가 와해된 국민의힘은 대선 때보다 전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항우가 팽성전투에서 크게 이기고도 천하를 잡을 수 없었던 것은 혼자의 힘으로 이기고 자신만 빛나려 했기 때문입니다. 유방은 자신의 군사적 재능을 낮춰본 한신과도 병력을 나눈 덕분에 천하를 거머쥐었습니다. 또, 처음부터 권력을 독점하는 대신 공신들에게 적절히 배분하는 군국제를 도입해 천하를 빠르게 안정시키고, 한나라 왕실도 제왕학을 익힐 시간을 벌 수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역사가 기억하는 승자는 항우도, 한신도 아닌 유방인 것이죠.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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