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면서 동시에 살인자였던 ‘카라바조’ [유경희의 ‘연금술의 미술관’]

2024. 3. 30. 21:0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미술을 안 했으면 범죄자 됐을 것”

지난해 리움미술관에서 성황리에 개인전을 마친 현대미술계의 영원한 악동 마우리치오 카텔란은 “미술을 안 했으면 범죄자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술 학교에는 근처도 못 가본 그는 마치 범죄를 저지르듯 도발적인 작품으로 미술계를 뒤흔들어놓고는 했다. 카텔란의 말처럼 분명 예술가는 범죄자와 유사한 속성이 있다. 그렇게 보면 히틀러도 그림을 꽤 잘 그렸고, 연쇄살인범 유영철도 그림 솜씨가 제법 뛰어났던 범죄자로 손꼽힌다.

미술사에 유명 예술가인 동시에 범죄자가 있다. 카라바조와 첼리니가 살인범으로 기록된 이들이다. 17세기 바로크 미술의 거장 카라바조(본명: 미켈란젤로 메리시, 1571~1610년)는 ‘악마적 천재’로 알려져 있다. 카라바조 없이는 서양 회화를 논할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존재감은 가히 미켈란젤로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39년의 파란만장한 인생 중 화가로서의 경력은 16년 정도에 불과했던 카라바조의 생애는 도박과 술주정, 폭행과 투옥, 성추행과 명예훼손, 살인과 도피로 점철돼 있다.

한창때 카라바조의 1년 연봉은 8백에퀴였는데, 오늘날 대학교수 연봉의 약 4배에 해당한다. 그런 그는 보름 동안은 주문받은 그림을 그리고 한 달 동안은 떠돌아다녔다. 작업실의 낡은 캔버스 천을 식탁보로 사용했고, 화려한 의상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입고 다녔다. 외출할 때는 허리에 칼을 차고 시종 한 명을 거느렸으며, 항상 논쟁과 시비와 투쟁을 벌이고 다녔다. 6년 동안 15차례나 수사기록부에 올랐고, 감옥에도 6번이나 갔다. 그러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탁월한 그림 실력 덕분에 매번 명망 있는 후원자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그런 카라바조에게 1606년, 인생을 바꿀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귀족 가문 근위대장의 아들인 토마소니 형제들과 돈내기 테니스 경기를 했는데, 돈을 잃게 된 카라바조는 몹시 화가 났고 급기야 싸움이 결투로 이어져, 상대방이 과다 출혈로 사망한 것. 재판이 길어지자 미처 판결을 기다리지 못하고 도망쳐버렸다. 로마를 탈출한 그는 나폴리, 몰타, 시칠리아, 다시 나폴리로 이어지는 도피 생활을 하게 된다. 도망자 신분에도 자주 물의를 빚으면서도 지속적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역시 든든한 후원자들의 배려 덕분이었다. 그리고 사면을 받아 5년여의 도피 생활 끝에 로마로의 복귀를 기다리던 중, 열병을 앓고 39세에 사망한다.

사실 카라바조의 살인은 우연이 아닌 예고된 일이었다. 매번 치명적인 거사를 치를 준비를 하고 거리로 나섰으니 언젠가는 벌어졌을 일! 이런 폭력성과 공격성은 유년 시절 내내 직면했던 가족의 죽음으로부터 생성된 트라마우와 관련이 있을 테다. 때로는 여리디여린 심성의 소유자였던 카라바조의 공격성은 어쩌면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어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의 폭력성과 공격성은 어쩌면 그림의 외화면(혹은 무의식)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재현에 입각한 고전적인 그림은 매우 아폴론적인 것, 즉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정신 상태를 요구하는 장르다. 구도, 색채의 배합, 원근법, 명암법 등 거의 과학적이고 기하학적인 분석에 의해 치밀하게 계산된 마음으로 그려야 하기 때문이다. 카라바조 회화는 생생한 현장감으로 유명한데, 이는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라는 명암법 덕분이며, 이는 모두 치밀하게 계산된 구도와 ‘빛의 효과’에서 비롯됐다. 이런 절제와 극복의 과제를 실현해야 했던 것과 반대로 카라바조는 드로잉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것은 사물을 한눈에 보고 단박에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재빠른 눈과 손을 갖고 있었다는 뜻이며, 또 그만큼 충동적이라는 의미다. 한 점 남아 있는 초상화를 보면 카라바조의 다혈질에 호전적인 품새를 엿볼 수 있다.

(1) 벤베누토 첼리니, 페르세우스, 1545~1554년, 로지아 데이 란치, 피렌체. 왼쪽이 첼리니, 오른쪽이 메디치 가문의 후견인 코지모 1세로 이 조각을 제작하도록 후원.
(2)카라바조, 의심하는 도마, 캔버스에 유채, 107×146㎝, 1602년, 상스시미술관, 포츠담, 독일. 치밀하게 계산된 명암법으로 생생한 현장감을 준다. (3)카라바조,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 캔버스에 유채, 125×101㎝, 1610년경, 보르게제 미술관, 로마. 살인으로 도피 생활 중에 제작된 작품으로 골리앗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집어넣음으로써 참회하고 있다.
예술은 살인 충동의 사회적 ‘승화’

카라바조가 태어난 해 사망한 피렌체 출신의 조각가 벤베누토 첼리니(1500~1571년) 역시 살인자로 알려져 있다.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에 메두사 머리를 치켜든 페르세우스 조각상이 그의 대표작이다. 그는 미켈란젤로의 제자로, 로마 교황 클레멘스 7세와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 그리고 메디치가의 코지모 1세를 후원자로 둔 불세출의 작가였다. 자존심 강하고 비타협적인 성격을 가졌는데, 툭하면 독설로 주변 사람들과 시비가 붙었고, 경찰서를 들락거렸다. 4차례 정도 재판받은 기록이 있는데, 폭행, 강도, 성범죄, 살인이었다.

1529년에 형제를 죽인 복수로 한 병사를 죽인 후 나폴리로 도망쳤고, 1534년에는 자신의 라이벌 세공사인 폼페오를 살해하고 또 도망자 신세가 됐지만, 모두 교황의 각별한 배려로 면책된다. 그런 첼리니가 교황이 용서 못할 범죄를 저지른다. 금을 질 나쁜 금속으로 바꿔치기해 불량 주화를 만든 것. 살인 행각까지 봐주던 교황은 노발대발해 교수형을 명했지만, 그는 이미 줄행랑쳐 프랑스로 갔다. 이 소식을 들은 프랑수아 1세가 그를 영입하려 했으나 주변 화가들의 탄원으로 결렬됐다. 그러나 왕은 성을 내주며 환대했다. 다시 피렌체로 돌아와 코지모 1세의 후원으로 제작한 ‘메두사의 목을 쳐든 페르세우스(1645~1654년)’를 보면 살인 행위가 얼마나 세밀하고 절절하게 묘사됐는지 알 수 있다. 여러 번 폭력과 살인을 저지른 사람의 경험적 감각을 여실히 드러낸다고 할까.

첼리니가 더욱 유명해진 것은 미술가로서는 최초로 자서전을 썼기 때문이다. 사생활 문란이 정점에 달하던 시기에 그는 “사회에 아무런 공이 없는 인간이 사회를 위해 조금이라도 봉사하는 길은 자기가 살아온 생애를 솔직하게 글로 써서 남기는 것”이라고 설파했다. 1805년 괴테가 그 자서전을 독일어로 번역했는데, 같은 예술가로서 왜 살인을 저질렀는지 몹시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는 첼리니가 당시 이탈리아 전역에 알려진 무뢰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각을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스스로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자기 자신 이외에는 믿을 곳이 없었던 시대의 일”이라고 항변했다.

마치 이란성 쌍둥이처럼 많이 닮은 카라바조와 첼리니! 통상 탁월한 창조적 감각을 지닌 예술가의 마음속에 폭력성과 공격성으로 촉발된 범죄성이 공존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실제로 이 양극은 예술가뿐 아니라 한 개인에게도 자연스럽게 공존하고는 한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예술 작품이란 예술가가 가진 동성애, 근친상간 혹은 살인 충동 등을 사회적으로 용납되는 방식으로 ‘승화’시킨 것이라고 한다.

불현듯 유명한 원로 화가의 말이 떠오른다. 자신은 그림을 그릴 때 마치 살인을 저지르는 것 같다고, 한판 싸움이 벌어지면 승부를 겨루듯 맞짱을 뜰 수밖에 없다고!

유경희 유경희예술처방연구소 대표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52호 (2024.03.27~2024.04.02일자) 기사입니다]

Copyright © 매경이코노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