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윤의 딴생각] 가질 수 없는 너

2024. 3. 30. 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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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다던 남자가 있었다. 당시, 나에게 관심을 주는 남자는 그 사람 하나뿐이었으므로 ‘아이고, 이렇게 감사할 수가!’ 하며 그이와의 연락을 이어나갔다. 우리는 서로가 좋아하는 음식을 묻고, 여가에는 무얼 하며 보내는지 묻다가, 좋아하는 영화를 묻기에 이르렀다. 그는 나에게 ‘칠드런 오브 맨’이라는 영화를 추천했다. 평소, 삼류 코미디를 즐겨보는 나이기에 어쩐지 진지해 보이는 그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으나, 그를 향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기 위해 재생 버튼을 눌렀다. 아기가 태어나지 않는 재난을 맞이한 시대, 기적적으로 임신한 여자를 지키기 위해 여러 사람이 싸우고 다치고 죽는 난리 블루스를 춘 끝에 결국 출산에 이르는 내용이었다. 영화를 본 소감을 묻는 남자에게 나는 말했다. “역시 애 낳으면 고생이라니까요?” 그 후, 그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이제 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임신과 출산에 대한 의향을 물으려는 일종의 신붓감 테스트가 아니었나 싶다. 자신의 궁금증을 우회적으로 해소할 줄 아는 세련된 남자를 놓친 점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그 테스트에 통과하지 못한 건 천만다행일지도 모른다. 어찌어찌 일이 잘 풀려 그 남자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하더라도 아이를 낳느니 마느니 하는 문제로 지지고 볶다가 진작에 갈라섰을 테니 말이다. 엄마가 나를 키우며 한숨짓는 모습을 자주 보았기 때문일까? 아님, 나의 동의도 없이 이 풍진세상에 나를 태어나게 한 아빠를 자주 원망했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내 부모의 말마따나 내가 지독히도 유별난 여자이기 때문일까? 이유야 어쨌든지 간에 그때나 지금이나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마음에는 일말의 변화가 없다.

그런데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어느 중년 여성의 글을 읽고 난 후, 고목처럼 굳게 자리 잡고 있던 나의 마음이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양육에 대한 의지가 없어 여태껏 혼자 살아왔으나 오십이 넘고 나니 이제야 아이가 눈에 들어온단다. 하지만 이미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며 서글픈 고백을 해 왔다. 본인의 의지로 아이를 갖지 않는 것과 갖고 싶어도 도저히 가질 수 없게 되어버린 것. 아이가 없다는 사실은 마찬가지지만 그 느낌은 사뭇 다를 터이다. 사십 줄에 들어선 나에게도 그러한 일이 조만간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끈적하게 들러붙었다. 오죽하면 ‘뱅크’의 ‘가질 수 없는 너’라는 노래를 듣다가 ‘사랑한다는 마음으로도/ 가질 수 없는 사람이 있어/ 나를 봐 이렇게 곁에 있어도/ 널 갖진 못하잖아’ 하는 가사에 마음이 쿵 내려앉기까지 했을까.

엄마의 손을 잡고 길을 걷는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내 모습과 끝도 없이 반복되는 적적한 나날을 보내며 혼자서 눈물을 삼키는 내 모습.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부정적인 상상 사이로 줄리아 로버츠가 파스타를 먹고 있는 모습이 끼어들었다. 그건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스치듯이 본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내용도 모르는 영화가 어째서 불현듯 떠올랐을까. 나는 그것을 그 영화의 원작 도서를 읽으라는 계시로 받아들였다. 밑줄 긋고 싶은 부분이 많았지만 독서의 흐름을 끊는 것 같아 여러 번 참았다. 하지만 주인공의 친구가 그녀에게 조언하는 대목에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랍 속에 든 펜을 꺼내 올 수밖에 없었다. “아이를 갖는다는 건 네 얼굴에 문신하는 것과 같아. 일을 벌이기 전에 네가 정말 원하고 있다는 확신이 필요해.”

따스한 봄 햇살을 쬐며 일터로 향하다가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한 공원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동그란 안경을 쓰고 축구하는 아이, 양 갈래로 머리를 묶고 철봉에 거꾸로 매달린 아이, 겁도 없이 폴짝폴짝 재주를 넘는 아이를 넋 놓고 바라보았다. 저마다의 매력이 넘쳐흐르는 아이들이 귀여워 미칠 것만 같았다.

아니야, 감정에 휩쓸려 아이를 가져서는 안 돼. 그건 새로 태어날 생명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내가 정말 아이를 원하는지 스스로에게 냉혹한 질문을 던져 본다. 내가 못 먹고 못 입더라도 아이에게는 무엇이든 해 줄 마음이 있나? 없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이와 공을 차는 저 아빠처럼 주말을 기꺼이 반납할 수 있나? 없다. 그런데 가만, 나에게 아이를 함께 만들어 보자는 남자가 있기는 있나? 아, 참. 없구나.

이주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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