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조 백일장 - 3월 수상작] 팍팍한 삶에도, 진달래 분홍 물들었다

2024. 3. 28.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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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


2월
이주식

열두 장 족보에 청약 일찍 들었지만
추첨하는 손 곱았나, 항렬보다 작은 달
입춘첩 높게 걸어도 입주할 봄은 멀다

긴 삼동 비낀 자리 하릴없이 머뭇대다
1월에게 떠밀리고 3월에게 쫓기며
남루한 잔설의 시름 퍼즐처럼 푸는 하루

꽃눈도 하늘문도 도둑처럼 열고 싶어
창 먼지 닦는 결에 몰래 들친 구름자락
조바심 들킨 볕살을 직박구리 물고 난다

■ ◆이주식

이주식

경남 거창 출생. 중앙시조 차상 2회. 샘터 시조 연말 장원.


차상


통화권 이탈
이영미

해마다 네댓 번은 오지로 빠져든다
그곳에 머무를 땐 밀려드는 질긴 적막
불시에 단절된 소통
고스란히 받는다

살아생전 다반사로 이탈 꿈꾼 어머니
치맛단 잡아끌던 철부지 나 그러안고
큰 권역 살아보자고
무단 애를 썼는데

잊고 지낸 기일마저 낙화에 파묻힌 날
속죄하듯 찾은 묏등 천국 문자 여전히 뜬
통화권 이탈했습니다,
언젠가는 다가올


차하


궁금해요, 모란씨
김은희

붉은 멍
썼다 지우면 모란이 여물까요
거칠은 외투 벗어
헐거운 칸 채울까요
길 잃은 모난 별들은 뭇 행성을 떠돌겠죠

계절 행
나침반이 굴절된 씨를 심고
해 걸친 담벼락에
기대 선 바람의 길
어디쯤 모란 꽃잎은 간절하게 필까요


이달의 심사평


3월, 시조백일장에도 진달래 분홍이 물든 응모작들을 읽으며 온통 설렘으로 맞이하는 봄날이다.

3월 장원에 이주식의 ‘2월’을 올린다. “입춘첩 높게 걸어도 입주할 봄은 멀다”의 첫째 수 종장은 세상살이 녹록지 않은 팍팍한 현실을 ‘2월’에 빗대 담고 있다. “떠밀리고” “쫓기”듯 “시름”이 있지만 “창 먼지 닦는 결에 몰래 들친 구름자락” “직박구리” “볕살을 물고 난다”고 하는 셋째 수에서 살짝 희망을 엿볼 수 있다. ‘2월’이 있어야 ‘3월’이 오는 “작은 달” ‘2월’의 맑은 서정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다만 “퍼즐처럼” “도둑처럼”에 붙인 ‘처럼’은 강조할 부분이 아니면 중복으로 쓰는 것을 지양하는 것이 좋다.

차상은 이영미의 ‘통화권 이탈’을 앉힌다. 살아생전 “이탈 꿈꾼”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은, “오지로 빠져들고” 말할 수 없는 “질긴 적막”이며, “천국 문자”를 받는 그곳에선 안타까운 ‘통화권 이탈’이다. “속죄”하는 마음과 그리운 심정을 곡진하게 표현한 한 편의 사모곡이다.

차하는 김은희의 ‘궁금해요, 모란씨’를 앉힌다. 아직 “헐거운 빈 칸”에 “모란” 곧 ‘시’를 앉히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는 것으로 짐작이 간다. 발상이 재치 있고 활달하며 온전한 문장의 꽃이 언제 만개할 지 궁금함을 묻고 있다.

김보선·서노을·오가을 작품들도 오래 들고 있었음을 밝힌다.

심사위원 이태순(대표집필)·정혜숙


초대시조


자전거, 아버지
강애심

자주 가던 길 따라
아들의 자전거를 탄다

흙먼지 툴툴거린 아버지의 뒤에는
허리를 꽉 움켜잡은 어린 내가 앉았다

보리밭 길 따라 가면
코끝에 와 닿던 그 냄새

가슴에 콕 박히듯 흔적만 남기고

내게로 페달 밟고 오시네
열두 살 나를 태워 오시네

■ ◆강애심

강애심

2004년 ‘시조시학’ 등단. 시조집 『다시뜨는 수평선』 『그 진한 봄꽃 향기로』

누구에게나 지나온 삶의 기억 저편에 자리하고 있는 어떤 한 장의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여기 아지랑이 자욱한 봄이 오는 길 저 너머로 아들의 자전거를 타고 가는 길이 있다. 예전에 젊은 아버지가 자전거로 다니던 길이다. “흙먼지 툴툴거린” 그 길은 지금 더 넓어지고 멀리까지 아스팔트가 깔렸겠다. 길은 달라졌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자전거를 탄 아버지의 “허리를 꽉 움켜잡은 어린” 나의 길이기에 그러하다.

제목에 쉼표 하나를 찍음으로써 자전거는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는 자전거가 된다. 작은 문장부호 하나가 시의 의미를 확장하는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 이 시조는 표면적으로는 아버지의 자전거에 대한 추억이겠으나 빛바랜 그 추억을 관통하고 있는 관념적 대상은 시의 처음과 끝을 잇고 있는 ‘길’이라는 알레고리다. 바퀴가 구르는 곳은 곧 길이며, 이 시에 등장하는 아들과 시적화자와 아버지라는 삼대의 서사가 길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태어나고 자라고 늙어가고 소멸하는 그 모든 것은 인생이라는 도저한 길을 따라 왔고 길을 따라 갔다.

“보리밭 길 따라 가면/ 코끝에 와 닿던” “그 냄새”가 어찌 보리 냄새뿐일까. 그 냄새는 아버지라는 냄새이자 가슴속에 영원히 존재하는 아버지 그 자체가 아닐까. 시의 마지막 두 행에서 독자의 마음은 오래 머문다.

기억은 뇌에 저장된다고 하지만, 이 시조의 “자전거, 아버지”의 기억은 뇌가 아닌 가슴에 저장되었으리라. 먼 아픔일 수도 있고 회한일 수도 있는 아련하고 선명한 그 기억의 원형은 다름 아닌 그리움이다. 아버지라는 그리움이, 그리움이라는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오고 있다. “내게로 페달 밟고”, “열두 살 나를 태워”서.

서숙희 시조시인

■ ◆응모안내

「 다음달 응모작은 4월 20일까지 중앙 시조 e메일(j.sijo@joongang.co.kr) 또는 우편(서울시 마포구 상암산로 48-6 중앙일보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으로 접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등단하지 않은 분이어야 하며 3편 이상, 5편 이하로 응모할 수 있습니다. 02-751-5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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