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하게 저무는 노년 ‘老’… 그 자체로 빛나는 노년

손영옥 2024. 3. 26.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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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뮤지엄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 展
제주 서귀포시 포도뮤지엄이 개관 이후 세 번째 기획전인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을 최근 개막했다. 노화와 인지저하증에 대한 인식 개선을 모색하는 전시로 국내외 작가 10명을 초청했다. 위 사진은 미국 사진작가 쉐릴 세인트 온지가 인지저하증을 앓는 어머니를 카메라에 담은 것인데, 인지저하증이 와도 일상의 행복은 이어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노년의 여성이 부끄러운 듯 가슴을 움켜쥔 채 눈을 꼭 감고 누드로 서 있다. 목에 건 진주목걸이가 영롱해 검버섯이 핀 쭈글쭈글한 피부를 더 도드라져 보이게 한다. 그런데도 추하게 보여야 할 늙은 여자의 삶은 그 자체로 빛나 보인다. 얼굴 위로 쏟아지는 햇빛, 그 햇빛을 후광처럼 사각 프레임으로 받는 얼굴의 표정이 안온해 보여서 일 것이다. ‘그 자체로 환할 수 있는 노년’의 메시지를 던지는 거 같은 이 사진 속 여성이 인지저하증(치매)를 앓는 중이라니.

SK그룹 산하 제주 포도뮤지엄이 개관 이후 세 번째 기획전으로 돌아왔다. 지난 20일 개막해 앞으로 1년 간 관객을 만날 새 기획전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의 주제는 노년이다. 노년의 삶, 그리고 노년에 불청객처럼 찾아오는 치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개선하고 공감을 모색하기 위해 마련됐다. 미국 여성 사진작가 쉐릴 세인트 온지(63)가 찍은 이 사진 주인공처럼 말이다. 기획전에는 루이스 부르주아(1911∼2010), 시오타 치하루(52), 정연두(55), 천경우(53), 민예은(38) 등 국내외 작가 10명이 초대됐다.

개막 전날 찾은 전시장에서 이 사진이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 것은 작가의 경험과 시선이 주는 위로 때문일 것이다. 부모의 치매 진단은 엄청난 충격과 고통이겠지만 온지의 사진 작품은 ‘그럼에도 일상은 계속된다’고 속삭이는 것 같다. 작가는 조류학자였던 어머니가 2015년 혈관성 치매를 진단받은 이후 모친과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엄마의 근육이 모든 걸 기억하듯 적극적으로 포즈를 취했어요.” 그렇게 새를 관찰하고, 눈 위에 팔 벌려 눕고, 강가에서 일광욕하고, 들꽃을 꺾는 어머니의 일상이 카메라에 담겼다. “어머니의 투병은 비극적인 경험이라 제 작품에 슬픔이 가득 차 있을 거라 사람들은 생각하곤 하지요. 그런데 오히려 이렇게 순수한 행복과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한국 언론과 만난 자리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페미니즘 미술의 거장 루이스 부르주아가 80세에 제작한 설치 작품 '밀실 1'. 유년시절 장기간 병상에 누워있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에서 영감을 얻었다.


‘거미 조각’으로 널리 알려진 현대 미술 거장 루이스 부르주아에게 어머니의 투병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재현된다. 낡은 문짝들이 벽처럼 둘러서 있는 방에 앙상한 철제 침대와 낡은 시트가 있다. 주변에는 의료 도구처럼 보이는 유리병이 있어 세상과 격리된 채 투병하며 기억을 잃어가던 누군가의 시간을 상상하게 한다. 부르주아가 80세에 제작한 이 설치 작품 ‘밀실 1’(1991)은 유년 시절 장기간 병상에 누워있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에서 가져왔다. “I need my memories, they are my documents(나에겐 기억이 필요해, 그것은 나의 기록들이다).” 시트에 적힌 문장은 우리로 하여금 상실의 고통을 정직하게 대면하게 하는 힘이 있다.

실을 거미줄처럼 엮은 작품이 트레이드마크인 베니스비엔날레 일본관 출신 작가 시오타 치하루는 책상 위로 검은 실과 알파벳이 기억과 추억의 비처럼 내리는 설치 작품 ‘끝없는 선’을 내놓았다.

정연두의 ‘수공기억’(2008)은 서울 종묘와 파고다 공원에서 만난 남녀 노인 6명이 쏟아내는 인생사의 인터뷰 영상과 각자의 기억의 한순간을 ‘수공’으로 재현한 영상의 두 채널 비디오로 구성됐다. 그렇게 그는 예술을 통해 소중한 기억을 되살려낸다. 정연두는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이 현대차 후원을 받아 서울관에서 선보이는 중견 작가 전시로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신진 민예은은 방과 거실의 모서리를 썰어낸 듯한 공간을 거꾸로 배치함으로써 기억의 불완전성과 변형 가능성을 표현했다.

뮤지션 더 케어테이커와 화가 이반 실(51)의 공동작업 ‘텅빈 환희의 끝 어디에나’는 기억과 인지가 서서히 상실되어 가는 과정을 음악과 회화로 추상화했다.

티앤씨재단 김희영 이사장이 총괄디렉터를 맡고 있는 포도뮤지엄은 세 번째 기획전을 통해 제 색깔을 더욱 분명히 다지는 느낌이다. 우선 주제에 있어 우리 사회의 중심이 아닌 주변적인 것에 대한 관심과 공감을 내세운다는 점이 그렇다. 2021년 개관기념전 ‘너와 내가 만든 세상’이 혐오의 시대와 이에 대한 극복을, 2022년 기획전 ‘디아스포라와 세상의 모든 마이너리티’가 다문화를 수용하는 태도를 촉구했다. 그리고 이번 세 번째 기획전을 통해 젊음 지상주의 한국에서 점점 바깥으로 밀려나는 노년을 주제로 끌어온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이 된다.

김 디렉터는 “노화나 치매에 대해 갖는 두려움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라며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의 연약함에 공감하고 연민을 느끼게 하는 예술의 역할에 주목해 이번 전시를 기획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처럼 다소 불편할 수 있지만, 누구나 정색하고 돌아봐야 할 보편적인 주제를 취함으로써 예술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포도뮤지엄 전시의 미덕이다.

작가 구성에서는 모두가 아는 거장과 한국 미술 현장에서 전문가들만이 아는 작가를 동시에 포진시킨다. 첫 전시의 케테 콜비츠(1867∼1945), 두 번째 전시의 존 레넌의 배우자이자 일본 작가인 오노 요코(91), 그리고 세 번째인 이번 전시의 루이스 부르주아는 유명 작가라 이들의 유명세를 소비하는 기쁨을 준다. 그러면서도 주제가 주는 공감도 덕분에 정연두, 천경우 등 순수 미술계의 핵심 작가들의 작품을 감상하며 현대미술에 어렵지 않게 접근하도록 돕는다.

관객체험형 프로젝트는 대중성을 지향한 전략처럼 보인다. 두 번째 전시에서 난민 보트를 띄워줄 바다 물결을 관객이 직접 바닥과 벽에 그리게 하는 오노 요코의 설치 작품을 선보인 게 그런 예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사진작가 천경우의 퍼포먼스 ‘가장 아름다운’이 나왔다. 파리 근교 청소부들로 하여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눈을 감은 채 그리게 하고, 그들의 드로잉과 일할 때 쓰는 장갑 사진을 찍은 동명의 연작에서 착안했다. 관람객은 자신만의 공간에 들어가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잠시 떠올리며 눈을 감은 채 그리는 소중한 시간을 갖는다.

죽은 배롱나무를 ‘몰입형 설치미술’로 살려낸 테마공간은 포토존으로 인기를 끌 것으로 보인다. 백년을 살다 죽은 배롱나무 위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상징하는 영상이 흘러가고 추억 어린 사진들이 주렁주렁 매달리는 장면은 미술 언어로서는 지나치게 설명적인 측면도 있다. 이런 대중지향성은 포도뮤지엄이 관광도시 제주, 그것도 주변에 재일교포 건축가 이타미 준이 설계한 포도호텔과 방주교회를 볼 수 있는 문화 벨트 안에 위치해 관광객이 주 관람층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한 때문으로 보인다. 예술성과 대중성 사이의 긴장감 있는 줄타기가 포도뮤지엄의 지속적인 과제 같다.

제주=글·사진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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