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쟁·라스푸틴…근친혼 나비 효과 [강영운의 ‘야! 한 생각, 아! 한 생각’]

2024. 3. 24.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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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근친상간의 역사

“이집트인은 더러운 야만족이다. 그들은 왕족부터 근친상간을 한다.”

고대 이집트인의 맞수였던 고대 히타이트 문명이 이집트를 비난할 때 썼던 말이다. 그 말대로 고대 이집트 왕족은 근친상간을 했다. 더러운 피가 왕족과 섞이는 것을 싫어해서였다. 그 유명한 투탕카멘도 마찬가지다. 2008년 이집트 카이로대 고고학 연구팀의 연구 결과 투탕카멘의 부모는 친남매 사이였다. 근친의 저주였을까. 그가 낳은 두 딸은 어린 나이에 죽었다. 투탕카멘 역시 자신의 이복 누나와 결혼했다. 누대를 걸쳐 이어진 근친혼으로 그의 후대는 결국 끊겼다.

(일러스트 : 강유나)
결혼으로 흥한 합스부르크, 근친 탓 망조

음식 못 삼킬 만큼 튀어나온 합스부르크의 턱

유럽도 근친혼 역사를 가졌다. 가장 유명한 근친혼 가문은 오스트리아·프랑스 부르고뉴·스페인을 통치한 합스부르크였다. 합스부르크는 ‘결혼’으로 부를 일군 집안이었다. “다른 이들이 전쟁을 할 때,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을 하라”가 그들의 모토였다. 결혼을 통해 그들은 서쪽으로 스페인부터 동쪽으로 오스트리아까지 대영토를 지배한 유력 가문이 됐다. 짙은 그림자가 드리운 건 그때부터였다. 영토가 커질수록 가까운 친척끼리 결혼이 횡행하게 되면서다. 사촌끼리 결혼을 하고, 거기에 또 후손인 사촌들이 계속 결혼을 하다 보니 근친계수는 높아져만 갔다.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조 펠리페 2세가 그 예다. 그는 여동생의 딸이었던 친조카 안 오스트리아와 결혼한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펠리페 3세는 사촌지간인 마르게리타와 결혼한다. 그 아들 펠리페 4세는 여동생의 딸인 자신의 조카와 또 결혼한다. 동물 생태계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근친혼이 계속됐다.

대가 지속될수록 흉측한 결과물이 얼굴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이름도 유명한 ‘합스부르크의 턱’이다.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로 튀어나온 턱이 이어지게 됐다. 카를로스 2세의 경우 주걱턱이 너무 심해 음식을 삼키지도 못했을 수준이었다. 심각한 유전병은 그를 임신조차 할 수 없는 몸으로 만들었다. 대를 잇지 못한다는 건 개인에게도 충격이지만, 왕조에는 재앙이었다.

어수선한 스페인 왕조를 먹으려는 주변 국가들의 전쟁이 시작됐는데 이것이 바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다. 여기서 승리한 사람이 그 유명한 태양왕 루이 14세. 그는 자기 손자를 스페인 왕위에 앉히는 데 성공한다. 현 스페인 왕가를 ‘부르봉 왕조’라고 부르는 이유다. 정작 프랑스에서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부르봉 왕조가 스페인에서 명맥을 잇고 있는 셈이다.

근친혼으로 권력을 유지했던 합스부르크 가문. 그들의 얼굴에서 근친혼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주걱턱이 튀어나오는 이른바 ‘합스부르크의 턱’이다. 사진은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스페인을 지배했던 카를로스 2세 초상화.
100년 전쟁의 시작과 끝에도 근친혼이

후대 끊겨 시작된 전쟁, 정신병 왕 때 끝나

프랑스 왕조라고 근친혼 비극의 반사 이익만을 본 건 아니었다. 잦은 근친혼이 프랑스 역사를 여러 번 뒤흔들었다. 중세 프랑스의 기틀을 다진 ‘카페 왕조’부터가 그랬다. 이들 역시 스페인 왕조처럼, 계속해서 가까운 친인척끼리 결혼을 했었다. 결국 사달이 터졌다. ‘미남왕’ 필리프 4세는 나바라 왕국의 공주 후아나와 결혼한다. 두 사람 모두 프랑스 루이 8세의 증손이었다. 카페 왕조에서도 근친계수가 점점 올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필리프 4세는 아들을 셋이나 봤다. 루이 10세, 필리프 5세, 샤를 4세다. 당장 왕이 승하해도 왕조를 계승할 후계자가 셋이나 됐지만 결국 몰락하고 만다. 세 아들 모두 10년의 통치 기간을 넘기지 못한 탓이다. 물론 후사도 없었다.

카페 왕조의 몰락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한 남자가 있었다. 잉글랜드 에드워드 3세였다. 그의 어머니는 이자벨 드 프랑스. 프랑스 왕가의 일원이었다.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면서 전쟁에 나선 배경이다. 후대 역사가들은 이를 ‘100년 전쟁의 서막’이라고 평가했다.

프랑스는 가까스로 잉글랜드의 침략을 막아내고 카페 왕조의 방계인 필리프 6세를 옹립한다. 발루아 왕조다. 하지만 발루아 역시 카페 왕조의 실패에서 한 치도 나아가지 못했다. 이들도 근친 결혼을 계속 이어갔다. 후대 샤를 6세의 근친계수는 사촌끼리 결혼해 낳은 아이와 같은 수준이었다. 샤를 6세가 정신병에 걸리게 된 것도 여기서 이유를 찾는다. 하필 잉글랜드와 100년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리더가 ‘광인’이었던 셈이다. 광인을 리더로 삼은 나라가 순탄할 리 없다. 잉글랜드 헨리 5세에게 대패하고 결국 트루아 조약에 서명한다. 샤를 6세 사후 왕위를 헨리 5세에게 넘긴다는 굴욕이었다. 샤를 6세는 딸을 헨리 5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시집보냈다.

역설적으로, 이 굴욕적인 결혼이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해낸다.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헨리 6세가 정신병을 앓은 것. 외할아버지 샤를 6세의 정신병이 잉글랜드 외손에게 넘어간 것이다. 프랑스 근친혼의 대가를 잉글랜드가 치르게 된 셈이다. 100년 전쟁의 승리자가 다시 프랑스가 된 배경이다. 거대한 전쟁의 시작과 끝을 근친혼이 좌우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근대사에서도 계속된 근친혼 비극

라스푸틴 비극의 씨앗은 英 빅토리아 여왕 혈우병

근친혼의 비극은 근대사에서도 계속됐다. 대영제국을 이끈 빅토리아 여왕에 의해서다. 그는 모계를 통해 혈우병 인자를 보유하고 있었다. 피가 나면 잘 굳지 않는 치명적인 질병이었다. 빅토리아는 자기 자식을 유럽 왕족들과 결혼시켰다. 그리고 그 자식들끼리 다시 혼사가 이뤄지도록 근친혼을 주도했다. 20세기 초 유럽 왕실의 왕손 대부분은 빅토리아의 손자·손녀였을 정도다. 빅토리아를 ‘유럽의 할머니’라고 칭하는 이유다. 고결한 피를 보존하고, 영국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작업이었다.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근친혼이 비극의 씨앗이 되리라는 것을.

유럽 왕실에 혈우병이 시나브로 퍼져 나가기 시작한다. 영국 왕실뿐 아니라 프로이센·스페인·러시아 왕국이 혈우병으로 인해 귀한 손을 잃게 됐다. 그중 가장 큰 비극이 있었던 집안이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였다. 러시아 니콜라이 2세의 부인은 빅토리아의 외손녀인 알렉산드라였고 불행하게도 혈우병 인자를 보유하고 있었다. 둘은 1894년 결혼해 딸만 내리 넷을 낳았다. 대를 이을 아들이 절실했고 마침내 아들 알렉세이를 낳았다.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대를 이을 인물이었다.

하지만 신은 로마노프 왕조를 외면한다. 혈우병 인자가 유일한 아들인 알렉세이에게 전해졌다. 혈우병은 남성에게만 발현한다. 여성은 혈우병 인자를 갖고 있어도 증상을 앓지 않는다. 니콜라이 2세는 아들의 치료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러나 당시 의료 수준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했고, 결국 미신에 매달렸다. 나약해진 그들을 찾아온 이가 수도승 ‘라스푸틴’이었다. 그가 치료를 명분 삼아 러시아 정치를 뒤흔든 건 유명한 이야기다.

결국 대중의 분노가 터져 나왔고 로마노프 왕조는 멸망한다.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그리고 그들 다섯 자식 모두 총살을 당한다. 1917년의 일이다. 그해 러시아는 2번의 혁명을 거치면서 세계 최초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한다.

지금도 지구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절반으로 나뉘어 반목한다. 어쩌면 대한민국 분단의 비극 역시 유럽 근친혼에서 출발한 나비 효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사랑은 부디 먼 곳에서 찾으시길. 반대가 끌리는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51호 (2024.03.20~2024.03.26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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