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도 분업이 되나요? 이 영화가 본 윤리의 망실
[김성호 기자]
자동차 업계 제일가는 전문가도 홀로는 차를 만들지 못한다. 수많은 부품 가운데 제가 만들 수 있는 건 거의 없다시피 해도 좋다. 타이어 하나 만들어내지 못하는 이가 전문가로 앉아 수많은 기술의 집합체인 자동차 생산을 지휘한다.
때로 어떤 개념은 그 탄생만으로 사회를 진보케 한다. 분업 또한 그와 같았다. 장인 한 명이 재료 수급부터 가공, 디자인, 생산의 전 과정을 총괄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유기그릇도 자개장도 나전칠기며 청자와 백자 모두가 그렇게 생산됐다. 분업이란 개념이 탄생하기 전까지 말이다.
분업은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누구는 타이어를, 누구는 문짝을, 누구는 의자를, 누구는 시트를, 누구는 디자인을 하고, 누구는 철강을 생산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개별 재료를 누구는 조립하고 누구는 유통하며 누구는 판매한다. 서로 다른 이들의 노력이 한 데 모여들어 혼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효율을 발휘한다. 각 공정이 전문화되고 효율화되는 과정,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 분업화의 등장이었다.
▲ 영화 <분노의 윤리학>의 포스터. |
ⓒ 롯데엔터테인먼트 |
범죄와 분업이 만났을 때
그러나 이를 경계한 이도 없지 않았다. 자본주의의 아버지라 해도 좋을 애덤 스미스는 "노동자들의 정신적, 문화적 쇠퇴를 부를 수 있다"고 우려했고, 카를 마르크스는 "분업이 인간의 소외를 초래한다"고 혹평했다. 저 유명한 알렉시스 드 토크빌 또한 "기술은 진보하지만 기술자는 퇴보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는 산업화의 한 가운데 분업이 자연스레 스며든 상황을 풍자하여 비판한다. 컨베이어 벨트 한 자리에 앉은 그는 온종일 나사를 조이다 마침내 모든 것을 조이려 든다. 전체 생산과정 가운데 한 부분을 담당한 인간이 구조와는 상관 없이 기계처럼 부분에만 주목하게 되는 모습을 이 영화가 절묘하게 잡아낸다.
오늘에 이르러 분업은 생산이 아닌 윤리적 주제로 건너왔다 해도 좋다. 세상의 수많은 부조리를 오로지 홀로 행하는 이는 얼마 되지 않다. 어느덧 분업이 생산을 넘어 사회 전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샥스핀을 소비하는 중국 부자는 카리브해의 어부가 상어의 지느러미만 잘라내고 바다에 몸통을 버리는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믿는다. 물건을 싣고 대륙을 오가는 거대한 배와 비행기가 내뿜는 오염물질 또한 저의 소비와는 상관없다 여긴다. 분업은 인간을 죄책감으로부터도 해방시켜버린 것이다.
▲ <분노의 윤리학> 스틸컷 |
ⓒ 롯데엔터테인먼트 |
매력적인 여대생의 죽음 뒤 드러난 참상
주인공은 매력적인 여성 진아(고성희 분)다. 평범한 여대생처럼 보이지만 실은 룸살롱에서 밤일을 하고 있는 그녀는 돈이 궁한지 모델이며 여러 아르바이트까지 마다하지 않고 일한다. 알고 보니 5000만원의 사채까지 끌어다 썼다는데, 그 이자가 갈수록 불어나 이자만 갚는 데도 종일이 부족할 지경이다.
그녀에겐 한 남자가 있다. 나이가 저보다 한참은 위인 어느 법대 교수(곽도원 분)가 바로 그다. 그러나 교수에겐 가정이 있고, 늘 제 아내를 속이며 잠깐 진아와 시간을 보낸 뒤 집으로 돌아간다. 사건이 벌어진 날도 그렇고 그런 날 가운데 하루였다. 교수와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그가 돌아간 뒤 진아는 살해를 당한 것이다. 범인은 집에 숨어들어 있던 전 남친 현수(김태훈 분), 진아와 교수의 성교를 지켜보곤 참지 못해 진아를 살해한다.
▲ 영화 <분노의 윤리학>의 스틸컷 |
ⓒ 롯데엔터테인먼트 |
모두가 제 책임을 부인할 때
이야기는 어느 날 밤 우발적으로 발생한 살인과 그를 목격한 증인, 또 그 증인을 붙잡아 영상이며 사진을 확보한 사채업자(조진웅 분) 사이에 물고 물리는 소동극으로 이어진다. 사건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진아와 내연관계에 있던 교수(곽도원 분)와 그 아내(문소리 분)의 복잡한 사연과 얽히는데, 이 모든 과정이 우발적이면서도 응분의 재미를 준다.
흥미로운 건 진아의 죽음에 그 모든 이들이 일정부분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다. 도미노가 무너지듯, 혹은 나비의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 태풍을 일으키듯, 그 사이 어딘가의 강도로 모두가 진아의 죽음에 나름의 영향을 미치게 된다.
▲ 영화 <분노의 윤리학>의 스틸컷 |
ⓒ 롯데엔터테인먼트 |
한 편 소동극이 보여주는 이 세계의 단면
<분노의 윤리학>이 보여주는 것은 분업이 일으키는 도덕적 해이의 단면이다. 저마다 이기적 욕망을 품고 서로를 겨냥하는 이들이 정작 저를 돌아보지 못하는 광경은 관객에게 은근히 저의 모습을 돌아보도록 이끈다. 저마다 무죄를 주장하는 이들 사이에서, 저마다 저의 상처만 크다고 울부 짓는 이들 가운데서 우리는 과연 얼마나 다른가 하고 묻는다. 분업이 인간성의 해이와 문화적, 윤리적 쇠퇴를 불러오리라는 경고는 그저 자본주의와 생산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죄를 나누어 범한다는 건 어떠한 죄책도 지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걸, 한 편의 소동극으로써 이 영화는 내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돌아볼지어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자유로운가. 이 세상에 횡행하는 악의 연결고리 가운데 우리가 감당하고 있는 부분은 얼마만큼 일까. 환경오염을 경계하며 비행기를 타지 않고 자동차도 소유하지 않는다 하는 이를 공공연히 조롱하는 이 세상에서, 공생과 공존을 위해 공장식 축산을 거부하고 육식을 최소화하는 이들을 비아냥대는 이 사회에서, 과연 나는 어떠한 악도 분담하지 않고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언제나 그러하듯, 윤리학의 시작은 나 자신의 진면목을 인정하는 것부터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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