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따리'로 이어온 40년 작업, 파리 피노 컬렉션 미술관서 빛난다

이은주 2024. 3. 20.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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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스 드 코메르스-피노 컬렉션
'카르트 블랑슈' 김수자 작가
'호읍-별자리' 전시로 조명
부르스 드 코메르스-피노컬렉션에서 열린 '호흡-별자리' 전시 전경.작가는 유리 돔 천장 아래 원형 전시장 바닥을 418개 유리로 뒤엎었다. [사진 드 코메르스-피노컬렉션]
파리 부르드 드 코메르스-피노 컬렉션 한가운데 설치된 김수자 '호습'의 전시 전경. 전시장 바닥에 비춰진 유리 돔 천장이 보인다. [사진 부르스 드 코메르스]

그는 '보따리 작가'라 불린다. 어머니와 마주 앉아 이불보를 꿰매다가 문득 두 개의 천을 하나로 엮는 바느질에서 영감을 얻은 게 평생 삶과 작업의 '화두'가 됐다.
1997년 색동 보따리를 가득 실은 트럭에 앉아 11일 동안 이동하는 퍼포먼스를 벌이며 작가로서 이름을 알렸다. 그에게 보따리는 나와 우리의 몸이자 기억이고, 삶의 애환을 가리키는 표상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보따리의 의미는 계속 확장돼왔다. 서울과 파리를 기반으로 작업해온 미술가 김수자(67) 얘기다.

'바느질'과 '보따리' 개념을 가지고 현 시대의 정체성과 경계, 피난과 이주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질문을 던져온 그가 이번엔 파리 한가운데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요즘 파리에서 가장 '핫한' 미술관으로 꼽히는 부르스 드 코메르스-피노 컬렉션(이하 BdC·일명 '피노 컬렉션 미술관')이 여는 기획 전시에서 메인 전시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BdC에서 20일(현지 시간) 개막한 기획 전시 '흐르는 대로의 세상'(9월 2일까지)은 제프 쿤스, 신디 셔먼, 마우리치오 카텔란, 피터 도이그 등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작가 29팀의 현대미술 작품 50여 점을 선보이는 자리다. BdC는 여기에 김 작가를 '카르트 블랑슈'(전권 위임) 작가로 초대하며 미술관의 대표 공간을 그에게 아낌없이 내줬다.

'백지 위임장'이라는 뜻의 카르트 블랑슈는 작가에게 전시의 기획부터 실현까지 전권을 부여하는 것. 김 작가가 미술관의 상징적인 공간인 1층의 원형 로툰다 전시관은 물론 24개의 쇼케이스, 지하 공간(푸아이에&스튜디오)에서 총 44점의 작품을 '호흡-별자리'라는 제목으로 선보이게 된 이유다.


418개 거울로 덮은 원형 전시장


김수자 작가(사진)가 파리 부르드 드 코메르스-피노 컬렉션의 로툰다(원형 공간)에서 선보인 적퓸'호흡'. 바닥을 418개의 거울로 덮었다.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그중에서도 기획전 개막에 앞서 13일 먼저 공개되며 주목 받은 게 바로 로툰다(둥근 지붕의 원형 건물)의 대규모 설치 작품 '호흡'이다. 김 작가는 인류 무역의 역사를 묘사한 19세기 프레스코화로 장식된 천장 아래 지름 29m의 원형 전시장 바닥을 418개의 거울로 뒤덮었다.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이곳은 아름답고 장엄한 공간이어서 작가라면 누구나 이곳에서 전시하고 싶을 것"이라며 "저는 이곳을 보자마자 바로 거울로 채워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거대한 면적의 거울 바닥은 유리 돔의 철제 구조와 하늘, 그리고 화려한 천장의 그림과 조각 장식을 비추며 그곳을 현실과 비현실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바꿔놓았다.

김 작가는 "원형의 이 건축 구조를 하나의 보따리로 봤다"고 했다. "제가 해온 '보따리' 개념의 작업이 텅 빈 공간을 흙으로 싸는 것과 같다는 점에서 달항아리 작업으로 이어졌다"고 말한 그는 "이 공간 역시 달항아리와 같이 위의 유리 돔과 거울 바닥, 두 공간이 만나 하나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그 맥락 위에 있다"고 말했다.

엠마 라빈 피노 컬렉션 미술관장은 부임할 때부터 카르트 블랑슈 프로젝트의 작가로 김수자 작가를 염두에 뒀다고 했다. "2016년부터 김수자 작가와 함께 여러 프로젝트를 해왔다"는 그는 "그의 '보따리' 개념에서 확장된 달항아리 작업을 알고 있었기에 이 공간을 보면서 김수자 작가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보따리' 개념에서 이어진 김수자의 달항아리' 작품. [사진 부르스 드 코메르스]
파리 부르스 드 코메르스 원형 전시장 둘레에 설치된 24개의 쇼케이스 중 일부.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그의 전시는 원형 전시관을 둘러싼 24개의 쇼케이스에서도 이어진다. 진열장 안에 달항아리부터 작가의 팔을 캐스팅한 조각, 그의 낡은 요가 매트 등이 놓였다.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구분하지 않고, "굳이 만들지 않아도 예술이 되는 것들"에 주목한 그의 시선을 드러내는 것들이다. 그와 친분이 있었던 독일 유명 컬렉터가 세상을 떠난 후 그가 생전에 사용한 물건들을 그의 아내와 함께 쌌다는 하얀 보따리도 덩그마니 놓여 있다. 한 사람의 삶과 기억을 싸맨 애도의 보따리다.

지하 전시장에선 20여 년 전 피노 컬렉션에 소장된 그의 대표 퍼포먼스 영상 작품 '바늘 여인'과 16mm 필름 영상 연작 '실의 궤적' 여섯 편 전편이 상영된다.

김수자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오랜 기간 예술과 삶의 화두를 두고 맴돌며 질문해온 나의 궤적을 장소 특정적 시각으로 해석하고 총체적으로 보일 수 있어 기쁘다"고 말했다. [사진 부르스 드 코메르스]
피노 컬렉션 소장품 중 하나인 김수자의 퍼포먼스 영상 '바늘 여인'(1999~2000). [사진 김수자 스튜디오]
파리 부르스 드 코메르스 지하 공간으로 이어진 김수자 전시 전경. [사진 부르스 드 코메르스]


그의 '보따리'는 지금도 쉴 새 없이 새 여정을 떠나고 있다. 지난 2일 네덜란드 라이덴의 라켄할 시립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시작한 그는 곧이어 벨기에, 뉴욕, 로마 막시 미술관에서도 전시를 이어간다. 또 다음 달 개막하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한국관 건립 30주년 전시에도 작품을 선보인다.

그에게 "왜 보따리냐"고 다시 물었다. 그는 "보따리는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소유물이자 과거의 한 묶음이다. 항상 뭔가 미래를 향해서 떠날 채비가 돼 있음을 뜻한다는 점에서 미래의 상징이기도 하다"며 "지금도 저는 보따리라는 개념에서 시공간의 다층적 의미를 채굴하고 있다"고 답했다.

■ 부르스 드 코메르스-피노 컬렉션

과거 곡물창고와 상업 거래소, 증권 거래소였던 건물에 조성된 부르스 드 코메르스-피노 컬렉션. 리모델링은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맡았다. [사진 부르스 드 코메르스]

일명 '피노 컬렉션 미술관'. 2021년 5월 개관하자마자 프랑스 파리의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사립 미술관이다. 발렌시아가, 구찌, 생로랑, 보테가 베네타 등 명품 브랜드를 소유한 케링 그룹의 설립자이자 세계적인 컬렉터인 프랑수아 피노(87)가 건립했다. 1763년 지어져 곡물 창고, 상공회의소와 증권거래소 등으로 사용됐던 건물로, 본래 파리 시 소유이지만 피노 컬렉션이 50년간 장기 임차해 미술관으로 개관했다. 리모델링 작업은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맡았다. 1960년대부터 미술품을 수집해온 피노의 컬렉션 규모가 1만여 점에 달해 컬렉션 만으로 다양한 전시가 가능하다.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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