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의 세계 교회사] 타오르는 가슴으로 복음전파에 헌신하다

신상목 2024. 3. 19.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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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3월 18일 중국 선교사가 되기로 하고 고국에서 유명 인사가 된 젊은 귀족 ‘케임브리지 7인’이 상하이에 도착했다. 이들은 대학을 졸업한 직후 허드슨 테일러가 설립한 중국내지선교회(CIM·현 OMF선교회)에 지원했다. 7명 중 6명이 케임브리지대 출신이었다. 7인의 젊은이들은 1882년 미국의 부흥사 D L 무디가 영국을 여행하는 동안 케임브리지에 왔을 때 일주일간 집회를 했는데 그때 무디의 설교를 듣고 복음 전파를 위해 타오르는 가슴으로 헌신한 청년들이었다.

1813년 3월 19일 스코틀랜드 블랜타이어에서 선교사 겸 탐험가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태어났다. 그는 단 한 명의 아프리카 개종자를 만들었지만 당대 영국의 선교 영웅이 되었으며 항상 자신을 탐험가보다는 선교사라고 생각했다. ‘선교사 열전’의 저자 루스 터커는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선교 영역에 독보적 영향을 끼쳤지만 그 자신의 선교 활동은 미미했다. 그는 유약하고 신경질적인 사람으로, 평생 그의 사역에 장애물이 된 심각한 인격적 결함을 지니고 있었다”며 “그러나 그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이 아프리카 선교의 필요성에 관심을 끌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업적을 남겼다”고 평가했다.

리빙스턴은 1873년 5월 1일 마치 기도하는 듯한 자세로 침대 옆에 몸을 앞으로 쭉 펴고 머리는 베개 위의 두 손에 파묻은 채 무릎 꿇고 앉은 채 별세했다. 아프리카 현지인들은 그의 시신에서 심장을 꺼내 므푼두나무 아래 묻고 시신을 뜨거운 태양 아래 건조해 미라로 만든 뒤 2400㎞ 떨어진 해안까지 육로로 운반했다. 그의 장례식은 영국 웨스트민스터사원에서 국장으로 치러졌다.

1852년 3월 20일 목사의 딸이자 노예제 폐지론자 해리엇 비처 스토가 노예제 폐지를 위해 신문에 연재했던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출간했다. 이 책은 노예제 반대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1863년 에이브러햄 링컨은 스토를 만난 자리에서 “이 위대한 전쟁을 일으킨 책을 쓴 작은 여성이 바로 당신이군요”라고 말했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은 1850년 도망노예법(도망 노예의 재판을 금지하고 그를 도와준 이까지 처벌받게 한 법률)이 의회에서 통과되자 깊은 분노를 느낀 스토가 쓴 소설이다.

547년 3월 21일 베네딕토회 규칙(중세 유럽 수도원 생활의 본보기가 된)의 창시자인 이탈리아 수도사 베네딕토가 몬테 카시노에서 별세했다. 서기 480년경 이탈리아 촌락에서 태어난 베네딕토는 ‘규율집(Rule)’으로 유명하다. 이 문서는 단순했지만 서방교회 수도원 운동의 기초를 형성했다. 규율집은 극단적 금욕주의 대신 엄격하지만 극단적이지는 않은 질서와 규범을 통한 지혜로운 수도생활을 추구했다.

1556년 3월 21일 영국 종교개혁의 중요한 인물이자 공동 기도문의 저자인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크랜머가 이전의 강제 개종을 거부한 후 메리 여왕에 의해 화형에 처해졌다. 토머스 크랜머는 영국 헨리 8세가 수장령을 통해 로마가톨릭과의 관계를 끊은 이후 종교개혁 프로그램을 단행했다.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도록 명령하고 왕의 이름 아래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각 교회에 커다란 영어 성경책을 비치하도록 했다. 또 수도원을 폐쇄했다. 평신도들에게 성찬의 포도주를 허락했으며 성직자들의 결혼이 허용됐다. 교회의 성상들도 철거됐다. 가장 중요한 업적은 ‘공동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의 출판이었다.

크랜머는 ‘피의 메리’ 여왕 시절 로마교황청으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를 받았고 자신의 이전 행동을 철회한다는 서약서에 서명했으나 결국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는 화형 직전 자신의 철회 서명을 다시 취소하면서 “내가 진심으로 믿는 것과 반대되는 사실들을 종이에 써야 했던 내 손이 먼저 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불길 속으로 들어갈 때 이 손들을 먼저 태워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1685년 3월 21일 독일의 오르간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아이제나흐에서 태어났다. 바흐에게 음악은 단순한 음악이 아니었다. 그가 작곡한 1000여곡 중 4분의 3이 예배를 위해 작곡되었다. 그의 음악적 천재성과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 그리고 음악의 효과로 인해 그는 많은 분야에서 ‘제5의 전도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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