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방전 쓸 때 스며드는 할아버지의 영감 [내 인생의 오브제]

2024. 3. 18.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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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윤영석 춘원당한의원 원장의 만년필
조부의 손때가 묻은 밤색 파이롯트 만년필(아래)과 윤영석 춘원당한의원 원장(위).
서울시 종로구 돈화문로길에 춘원당이란 한의원이 있다. 탑골공원 맞은편 아주 좁은 골목으로 접어들어 다소 민망하게 보이는 모텔을 지나치면 나오는 곳.

대단한 역사를 지닌 한의원이다. 조선 24대 임금인 헌종 말기 윤상신 선생이 평안북도 박천에 한의원을 건립하면서 내건 상호가 춘원당이다. 과거에 급제해 무관으로 활동하던 그는 56세 나이에 관직에서 물러나 한의사가 된다. 그렇게 춘원당 가문을 열어 2대 윤빙열, 3대 윤기찬, 4대 윤단덕, 5대 윤종흠, 6대 윤용희, 7대 윤영석으로 대를 이어왔다. 5대인 윤종흠 선생이 평양에서 개업을 했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아들 용희를 데리고 피란 내려와 바로 지금의 종로에서 터를 잡았다.

6대 원장인 윤용희 선생 때 위기가 닥친다. 마흔이 안 된 나이에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진료를 마치고 오토바이를 타고 귀가하던 중이었다. 그의 아들 영석이 갓 10살을 넘었을 때였다. 어떻게 하든 가업을 이어야겠다는 일념에 윤종흠 선생이 손자를 부른다. 그리고 약조를 받아낸다. 그게 ‘춘원당 5계(戒)’다. ① 한의사가 될 것, ② 아들 한의사 시켜 가업 이어갈 것, ③ 한의원 옮기지 말 것, ④ 보증 서거나 남에게 돈 빌려주지 말 것, ⑤ 담배 피우지 말 것. 초등학교 때였다.

훈육이 시작됐다. 한의학에 말하는 급성병이 있다. 중풍, 졸도, 급체 같은 것. 사람 몸 안에 있는 경락의 기혈 순환이 안 되거나 막혀서 발생하는 것인데 이를 치료하려면 혈(穴)자리를 알아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윤종흠 선생은 12살 손자의 팔꿈치 아래 경혈 자리에 문신을 한다. 50년 지난 지금도 희미하게 먹물 자국이 남아 있다.

손자는 커서 한의대에 들어갔다. 그때부터 매주 토요일 오후면 구수한 이북 사투리로 손자를 부른다. “협도 개(가져) 오라우.” 협도란 약재를 써는 작두. 조부는 벽장에서 인삼 두어근을 꺼낸다. 인삼 써는 게 쉽지 않다. 책상다리로 오랫동안 앉아 있어야 하는 참을성, 손이 베이지 않도록 하는 조심성, 같은 동작을 한 시간 이상 반복해야 하는 성실성. 조부는 부친이 돌아간 후 20년 이상을 더 사셨다. 손자 나이 서른 셋. 그제서야 마음이 놓였는지 눈을 감았다.

윤영석 원장이 한의원 맞은편에 한의약박물관을 건립한 건 177년 동안 가업을 이어온 집안 내력과 무관치 않다. 박물관에 가면 상상을 뛰어넘는 유물에 놀란다. 모두 4500여점, 그중 애정이 가는 26개의 유물을 골라 책을 펴내기도 했다. 침통, 약작두, 찜질기, 약사발, 약장 등.

그런데 박물관이나 수장고가 아닌 그의 진찰실에 보관해놓는 물건이 있다. 그 모두가 조부 윤종흠 선생이 남기신 유물로 윤 원장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오브제다. 피란 때 봇짐에 넣고 온 3대 할아버지의 필사본인 보유신편(保幼新篇·소아과 전문의서), 1965년부터 조부 진찰실에 걸려 있던 경혈도.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30년간 조부의 손때가 묻은 밤색 파이롯트 만년필이다. 그는 환자를 진찰하고 약 처방을 내릴 때마다 이 조부의 만년필을 사용했었다. 윤 원장은 “지금은 전자차트로 바뀌어 더 이상 만년필을 쓸 일이 없어 장식용으로 보관해놓고 있지만 환자 병이 잘 낫지 않아 고민이 깊어지면 이 만년필로 처방전을 쓴다”며 “그러면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것보다 훨씬 집중도 잘되고 마음이 편안해져 좋은 처방전이 나온다”고 말한다. 종이 위에 스르륵 미끄러지는 아날로그적 느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윤 원장의 추억이고 춘원당의 헤리티지다.

손현덕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51호 (2024.03.20~2024.03.26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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