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세계 교회 역사] 아프리카에 심장이 묻히다

신상목 2024. 3. 18. 0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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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더미션 독자 여러분,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됐습니다. 이번 주에도 우리 하나님의 은총과 그분의 평안함이 가정과 일터 위에 가득하시길 바라봅니다.

이번 주 세계교회 역사에는 중요 인물이 대거 등장합니다. 케임브리지 7인, 데이비드 리빙스턴, 엉클 톰, 베네딕토, 토머스 크랜머,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그리고 조너선 에드워즈입니다. 다른 분들은 알겠는데 엉클 톰이 누구냐고 물으시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스토 부인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에 등장하는 주인공이지요. 이번 주에 바로 그 주인공이 나오는 책이 출판됐습니다. 이번 주 인물들의 키워드는 ‘심장’ ‘노예’ ‘규칙’ 그리고 ‘바른 신앙’이라고 해야 할까요.

케임브리지 7인 중 한 명인 CT 스터드는 중국 선교에 이어 말년에 아프리카선교에 나서는데요. 그때 만든 선교회 이름이 ‘아프리카 심장(마음) 선교회’였습니다. 데이비드 리빙스턴은 그 마음을 갖고 아프리카 선교에 초석을 놨지요. 비록 복음을 맹렬히 전하는 선교사보다는 탐험가로 사역했지만 그는 선교사로서 자신의 역할을 조금도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그가 죽었을 때 현지인들은 그의 심장을 꺼내 나무 밑에 묻었다고 합니다. 그는 탐험하면서 노예사냥의 실태를 고발하기도 했습니다. 스토 부인의 엉클 톰은 노예로 살다가 결국 죽지만 그의 삶은 노예제를 폐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탈종교, 탈기독교 시대에 서기 5세기 사람이 남긴 수도원 정신과 그 규칙은 오늘날 크리스천들이 적용해봄 직합니다. 불확실성의 시대, 정글 같은 시류 속에서 마치 수도원에 들어가 강력한 공동체를 이루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노동과 영적 생활을 착실하게 수행하는 것처럼 산다면 시대의 유혹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종교개혁 정신을 가지고 살아갔던 음악의 아버지 바흐도 이번 주에 태어났지요. 임윤찬의 피아노곡을 링크해 두었습니다. 고난주간을 앞두고 들어보셔도 좋겠습니다.

케임브리지 7인, 중국 선교를 위해 가문과 명예를 버리다
1885년 3월 18일 중국 선교사가 되기로 하고 고국에서 유명 인사가 된 젊은 귀족인 ‘케임브리지 7인’이 상하이에 도착합니다. 이들은 대학을 졸업한 직후 허드슨 테일러가 개척한 중국내지선교회(CIM·현 OMF선교회)에 지원했습니다. 7명 중 6명이 케임브리지대 출신이었습니다.

이들은 1882년 미국의 부흥사 D L 무디가 영국을 여행하는 동안 케임브리지에 왔을 때 일주일간 집회를 했는데 그때 무디의 메시지를 듣고 ‘복음전파를 위해 타오르는 가슴으로 헌신한’ 청년들이었습니다.

1885년 케임브리지대 길드 홀에는 7인의 간증 집회가 있었습니다. 7인 중 한 명인 스탠리 스미스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여 땅끝으로 나가라고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 빛을 세상에 퍼뜨리지 않으면 영국에 있는 우리도 어둠의 세력을 견디지 못하고 우리 자신의 빛마저 보존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부유한 가문의 자녀들로 전도양양한 청년들이 선교사로 간다는 소식은 신문에 대서특필 되었습니다. 파장은 영국 사회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켜 빅토리아 여왕까지 이들이 쓴 간증집을 읽고 기뻐했다고 합니다.

찰스 토마스 스터드(Charles Thomas Studd)는 백만장자의 막내아들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영국 최고 크리켓 선수로 인정을 받았지만 방황도 했습니다. 형 조지가 병으로 위독해지자 세상의 명예와 찬사에 의구심을 갖게 되었고 무디의 설교를 들으며 자신의 진로를 고민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다른 청년 6명과 함께 중국 선교사로 자원했으며 이후 인도로 건너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53세 때는 병으로 쇠약해진 몸으로 중앙아프리카로 갔습니다. 찰스는 그곳에서 18년간 선교 활동을 하다 1931년 7월 71세로 별세했습니다. 이때 7000여명의 아프리카인이 그의 장례에 참여했습니다. 그가 세운 ‘아프리카마음선교회(The Heart of Africa Mission)’는 WEC국제선교회의 전신이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며 나를 위해 죽으셨다면 그분을 위한 나의 어떤 희생도 결코 크다고 할 수 없다”는 말로 유명합니다.

몬태규 헤리 보챔은 남작의 아들이었습니다. 보챔은 스미스와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였으며 같은 조정팀이었습니다. 그는 친구 스미스와 기독학생연합회 회장이던 키나 스턴 스터드의 중보기도로 1881년 그리스도께 헌신했습니다. 보챔은 중국에서 1911년까지 사역했으며 영국으로 돌아와 육군 군목으로 봉직했습니다. 보챔의 아들은 아버지를 이어 중국 선교사로 나갔으며 1935년 중국에서 사역하는 아들의 선교지로 가 4년 뒤 별세했습니다.

스탠리 페리긴 스미스(Stanley Peregine Smith)는 런던의 외과의사 아들로 무디를 통해 그리스도를 개인적 구주로 만났습니다. 그는 케임브리지에서 조정팀 주장을 맡았는데 조정은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스미스는 키나 스턴 스터드의 영향으로 1880년 그의 삶을 헌신하기로 결심, 중국 북부에서 사역했습니다. 1931년 중국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평소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오, 하나님! 영혼들을 구원하옵시고 최소한 2만5000 이상의 영혼의 짐을 내게 지우소서.”

윌리엄 워튼 카슬(William Wharton Cassels)은 포르투갈에서 사업을 하는 사업가의 아들로 케임브리지대를 졸업하고 남부 탐베드라는 시교구 목사 대리로 임명을 받고 부목사로 일했습니다. 조용한 성격이었던 그는 CIM에 지원했으나 어머니가 막았습니다. 하지만 이후 그의 어머니는 마음을 바꾸어 허드슨 테일러에게 편지를 보내며 아들의 선교사역에 힘을 보탰습니다. 그는 중국 산시성을 출발 서부 지역으로 갔습니다. 그는 1895년 중국 서부의 새 교구 감독이 되었고 1923년 별세할 때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세실 폴힐 터너(Cecil Henry Polhill-Turner)는 같은 7인에 속한 아서 폴힐 터너의 형으로 근위대 기병 중위였습니다. 그는 동생 아서의 설득으로 무디 집회에 참석, 1884년 그리스도께 생을 바치기로 결단했습니다. 이후 중국 선교사로 활동 중 1892년 건강 문제로 영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일곱 번이나 선교지를 방문했습니다. 1908년 영국에서 오순절 운동을 주도했고 오순절 교회 선교의 리더 역할을 했으며 1938년 영국에서 별세했습니다.

아서 폴힐 터너(Arthur T. Polhill-Turner)는 케임브리지대에 있을 때 무디 집회에 참석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동생 세실 터너와 함께 케임브리지 7인 중 유일한 형제였습니다. 아서는 목사로 임직을 받고 중국에서 계속 사역했으며 1900년 의화단사건 때에도 중국에 머물렀습니다. 그는 1928년 은퇴하고 영국으로 돌아왔으며 1935년 별세했습니다.

딕슨 에드워드 호스트(Dixon Edward Hoste)는 근위 포병대 장교였으나 이후 허드슨 테일러의 후계자로서 CIM 대표가 됐습니다. 그는 영국 육군 장성의 아들로 영국왕실사관학교 출신이었습니다. 케임브리지 7인 중 유일하게 케임브리지대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딕슨은 무디 집회를 통해 선교사로서 헌신했습니다. 그는 1935년 은퇴했으나 1945년까지 중국에 머물렀으며 일본 수용소에 억류되기도 했습니다.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1946년 런던에서 별세했습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의 삶은 변했다. 이방에는 복음을 전혀 들어본 일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주님은 그들이 복음을 듣기를 원하신다. 이제 나는 이 일에 나의 생명을 바치리라.”

아프리카에 심장이 묻히다
1813년 3월 19일 스코틀랜드 블랜타이어에서 선교사 겸 탐험가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태어납니다. 그는 단 한 명의 아프리카 개종자를 만들었지만, 당대 영국의 선교 영웅이 되었으며 항상 자신을 탐험가보다는 선교사라고 생각했습니다. ‘선교사 열전’의 저자 루스 터커는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선교 영역에 독보적 영향을 끼쳤지만 그 자신의 선교 활동은 미미했다. 그는 유약하고 신경질적인 사람으로, 평생 그의 사역에 장애물이 된 심각한 인격적 결함을 지니고 있었다”며 “그러나 그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이 아프리카 선교의 필요성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업적을 남겼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는 글래스고 인근 방적 공장에서 하루 14시간씩 직공으로 일하면서도 고학으로 글래스고대에서 그리스어와 신학, 의학을 배웠습니다. 1839년 런던선교회에 선교사로 자원해 허가를 받았지만 당초 중국으로 가려던 계획은 아편전쟁으로 무산됐습니다. 그런 그에게 베테랑 아프리카 선교사이자 남아프리카 선교의 개척자인 로버트 모펫에게 소개됐고 모펫은 이 젊은이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모펫은 이후 리빙스턴의 장인이 됩니다.

리빙스턴은 1840년 27세의 나이로 남아프리카에 파송을 받아 1841년 3월 케이프타운에 도착, 쿠루만으로 향했습니다. 케이프타운에는 수많은 선교사로 북적였고 선교사 사이의 불화도 많아 북쪽의 아프리카 내지로 들어가고픈 열망이 있었습니다. 이후 북쪽으로 321㎞ 떨어진 마보스타라는 지역에 도착해 제2의 쿠루만을 건설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살면서 아프리카 정글의 위험을 만났습니다. 사자의 공격을 받아 왼쪽 팔을 크게 다쳐 평생 불구로 지냅니다. 그의 책에서 이때 사건을 기록했는데 “녀석은(사자는) 내 뼈를 아작아작 씹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팔뚝에 열한 개의 이빨 자국을 남겼다”고 적었습니다.

그는 1845년 모펫 선교사의 딸 메리와 결혼,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더 북쪽인 촌화네로 갔습니다. 하지만 극심한 가뭄을 피해 이주했는데 7년간 반유목민 생활을 했습니다. 아내와 다섯 아이는 지쳐갔고 1852년 아프리카 탐험이 아이 딸린 여인과 어린 아이들에겐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는 아내와 아이들을 영국으로 보냈습니다. 가족들은 그렇게 영국으로 돌아갔지만 그들은 집도 없고 친구도 없었고 싸구려 셋방을 전전하면서 극한의 빈곤 상태로 살 때가 많았다고 합니다.

반면 리빙스턴은 본격적인 아프리카 내지 탐험을 시작했습니다. 아프리카 도착 11년이 지났지만 그는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회심자도, 선교기지도 세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프리카 내지를 탐사한다는 계획 아래 잠베지강을 따라 아프리카 대륙을 횡단했습니다. 남중부였던 린안티를 출발, 적대적 부족들의 위협과 치명적 열병의 공포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탐험가였지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경에 등장하는 장면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마법의 랜턴’(초기 형태 슬라이드 필름 영사기)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6개월 후 서부 해안이자 현재 앙골라의 수도인 루안다에 도착했습니다.

다시 동쪽으로 이동하던 중 거대한 폭포를 발견하고 영국 여왕의 이름을 따 빅토리아 폭포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그는 이때부터 유일한 목표는 잠베지강을 따라 아프리카 동쪽에서 출발하는 통상로가 될 만한 길을 탐사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영국은 노예제도를 폐지한 이후였으나 포르투갈과 아랍국가는 노예무역을 계속했습니다. 그는 이를 목격할 때마다 통상과 기독교가 결합하는 것만이 아프리카를 구할 수 있다는 확신을 더 굳혀갔습니다. 그는 노예제도는 아프리카인들의 협조가 있기 때문에 유지되는 것이라 믿었고 이에 대한 해결책은 배로 이동하는 통상로를 통해 아프리카에 합법적 교역의 길이 열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1865년 12월 영국으로 돌아간 리빙스턴은 1년 일정으로 순회강연을 다녔으며 이때 그의 책 ‘남아프리카 선교여행과 탐험’을 집필했습니다. 그가 엄청난 주목을 받자 영국 내에서는 새로운 선교회들이 속속 생겨났습니다. 리빙스턴은 자신을 파송한 런던선교회와는 관계를 끊고 영국 정부가 부여하는 공식 임무를 부여받고 그 대가로 많은 자금과 장비를 지원받았습니다.

리빙스턴은 그 후 15년을 더 살았지만 1857년의 영광은 다시 누리지 못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가 탐험한 통로로 노예상인들이 들어왔고 그의 탐험 경로는 선교보다는 노예무역에 더 넓은 길을 한동안 열어주기도 했습니다. 1865년 세 번째 탐험을 떠났는데 나일강의 수원지를 찾는 게 탐사 목적이었습니다. 그때는 유럽인을 한 명도 데려가지 않았고 이후 7년간은 유럽사람을 만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의 몸도 영양실조와 열병 등으로 시달렸고 잊힌 그를 향해 죽었다는 소문도 퍼졌습니다. 그때 ‘뉴욕 헤럴드’의 특파원 헨리 스탠리가 파견돼 리빙스턴의 생사를 취재했습니다. 스탠리 기자는 999일 동안 리빙스턴이 지나간 길을 추적해 마침내 1871년 아프리카 중앙의 탕가니카 호수 근처 우지지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첫 인사말은 “리빙스턴 박사로 짐작됩니다만”이었다고 합니다.

스탠리 기자는 리빙스턴과 함께했던 몇 달의 시간을 이처럼 기록했습니다.
“그와 만나고 몇 달 동안 나도 모르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실행하고 있는 그 노인에게 탄복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의 경건, 그의 온유함, 그의 열정, 그의 부지런함, 그리고 그가 얼마나 묵묵히 자기 일을 해나가는지를 보면서 나는 조금씩 조금씩 그에 의해 변화되어 갔다.”

리빙스턴은 스탠리가 돌아간 뒤 1년 정도 더 살았습니다. 1873년 5월 1일 아프리카 하인이 (마치 기도를 하는 듯) 침대 옆에 몸을 앞으로 쭉 펴고 머리는 베개 위의 두 손에 파묻은 채 무릎 꿇고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현지인들은 그의 시신에서 심장을 꺼내 므푼두나무 아래 묻고 시신을 뜨거운 태양 아래 건조시켜 미라로 만든 뒤 2400㎞ 떨어진 해안까지 육로로 운반했습니다. 영국에서 리빙스턴의 장례는 웨스트민스터사원에서 국장으로 치러졌습니다. 아프리카 선교의 전설, 리빙스턴은 그렇게 자신의 심장이 아프리카 땅에 묻혔습니다.

엉클 톰, 그리스도처럼
1852년 3월 20일 목사의 딸이자 노예제 폐지론자 해리엇 비처 스토가 노예제 반대를 위해 신문에 연재되었던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출간합니다. 이 책은 100만부나 팔렸고 1863년 에이브러햄 링컨이 스토를 만난 자리에서 “이 위대한 전쟁을 일으킨 책을 쓴 작은 여성이 바로 당신이군요!”라고 말한 것으로 유명할 정도로 노예제 반대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은 문학사상 큰 영향력을 가진 작품입니다. 스토는 1850년 도망노예법(도망 노예의 재판을 금지하고 그를 도와준 이까지 처벌받게 한 법률)이 의회에서 통과되자 깊은 분노를 느껴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시인 랭스턴 휴즈는 이 소설을 두고 ‘미국 최초의 저항 소설’이라고 불렀습니다.

선한 노예 엉클 톰은 친절한 주인 밑에서 평생을 살았으나 주인의 경제적 사정 때문에 팔려가게 됩니다. 엉클 톰은 도망을 거부하고 참혹한 죽음을 맞을 때까지 기독교의 자비와 용서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습니다. ‘엉클 톰’은 백인의 압제에 순응하는 흑인을 뜻하는 속어가 되었지만 스토에게 있어서 톰은 기독교적 덕목을 상징합니다.

마치 그리스도처럼 죽어간 그의 최후를 통해 작가는 그를 이 소설의 가장 위대한 도덕적 모범으로 삼았습니다. 이 책은 노예들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생생하게 묘사한 것 외에도 노예제도가 백인 노예주들의 인간성과 도덕성을 얼마나 망가뜨리는지 강조했습니다. 인종을 막론하고 강인한 여성상을 보여준 것은 여성들 역시 노예제 폐지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을 각인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소설이 기록한 경이적인 성공 덕분에 스토는 그녀의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소설은 노예제에 대한 깊은 반감과 반노예제 행동주의를 불러일으킴으로써 뒤이어 일어난 남북전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스토는 1811년 6월 14일 미국 코네티컷주 리치필드에서 청교도 목사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유년 시절을 신실한 집안 분위기 속에서 보냈으며 언니 캐서린의 권유로 여성들을 위한 하트퍼드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학교를 마친 뒤 학생들을 가르치다 1832년 신학교를 설립하려는 아버지를 따라 오하이오주 신시내티로 이주, 그곳에서 캘빈 스토와 만나 결혼했습니다. 남편 캘빈 스토는 목사이며 신학교 교수로 노예 해방론자였습니다.

스토는 남편과 함께 도망친 노예들이 캐나다로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왔으며 노예제도를 유지한 남부와 인접한 곳에 18년간 살면서 노예들의 실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1850년 메인주 브런즈윅으로 이주한 스토는 도망노예법이 제정되자 이에 깊은 분노를 느끼며 그다음 해 ‘내셔널 이러’지에 흑인 노예의 비참한 생활과 잔혹한 운명을 묘사한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연재했습니다. 스토는 이 밖에 ‘목사의 구애’ ‘오르 섬의 진주’ ‘올드 타운의 사랑’ ‘행복한 기억’ ‘바이런 경의 참모습’ 등의 작품이 있습니다. 1896년 7월 1일 85세의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수도원의 기초를 세운 베네딕토
547년 3월 21일 베네딕토회 규칙(중세 유럽 수도원 생활의 본보기가 된)의 창시자인 이탈리아 수도사 베네딕토가 몬테 카시노에서 사망합니다.

서기 480년경 이탈리아의 촌락에서 태어난 베네딕토는 20세에 은둔자가 되기 위해 동굴로 들어갔습니다. 육체의 유혹을 극복하기 위해 극단적 금욕생활을 시작했고 얼마 후 명성이 높아져 제자들이 생겼습니다. 이후 몬테 카시노로 이전해 작은 공동체를 이뤘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수도원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그의 명성은 높아져 동고트족 왕이 방문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베네딕토의 위대함은 그의 ‘규율집(Rule)’에 있습니다. 이 문서는 단순했지만 이후 서방교회 수도원 운동의 기초를 결정합니다. 규율집은 극단적 금욕주의 대신 엄격하지만 극단적이지는 않은 질서와 규범을 통한 지혜로운 수도 생활을 추구하는 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베네딕토는 자신의 수도사들은 하루 두 끼씩 올바른 식사를 하도록 했으며 식단에는 두 가지 이상의 조리된 음식을 공급했습니다. 시절에 따라 싱싱한 과일과 채소도 제공했습니다. 수도사들은 매일 적당량의 포도주를 공급받았고 침대와 요, 베개를 소유했습니다. 베네딕토는 수도 생활에서 두 가지 요소를 중시했습니다. 영속성과 순종이었습니다. 수도사는 이전 명령을 받지 않는 한 종신 수도를 해야 했고 규율 자체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규율집은 모든 수도사에게 육체노동을 요구합니다. 순번제로 노동에 참여해야 합니다. 취사나 노동을 모두 돌아가며 맡았습니다. 귀족이든 평민이든 자신의 출신과 상관없이 수도사들은 모두 가난을 통해 공동체에 더 집착했으며 평등하게 가난했습니다. 수도 생활의 핵심은 기도였습니다. 시편 119편 62절과 164절을 따라 수도사들은 낮에 7번, 밤중에 1번, 모두 8차례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대부분 시간은 시편 낭송과 기타 성경 강독으로 이뤄졌습니다. 시편은 매주 전체를 한 번씩 낭송할 수 있도록 배당되었습니다. 그 결과 수도사 대부분이 시편 전체와 성경의 여러 부분을 암기할 수 있었습니다. 여가가 있던 평신도들도 이 같은 경건의 시간을 따라 했다고 합니다. 8차례 기도시간은 이후 성무일과로 불렸습니다.

수도사들은 또 성경이나 기타 서적을 필사하기도 했는데 이는 수도원이 학문의 중심지가 되는 역할을 했습니다. 수도원은 경제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많은 수도원이 수도사들의 노동에 의해 경작된 토지 위에 설립됐기 때문입니다.

베넥딕토수도회는 로마가톨릭의 전통이며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은 그 단면을 보여줍니다. 개신교에서도 베네딕토가 만든 규칙의 정신을 적용하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특히 탈기독교 시대를 사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작가 로드 드레허는 그의 책 ‘베네딕트 옵션(IVP)’에서 이를 잘 보여줍니다. “베네딕토의 길은 현실 세계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실제 현실을 그대로 보고 그 안에서 살기 위한 방법”이라며 “베네딕토회의 영성은 이 세계를 사랑으로 참고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시듯 세계를 변화시키라고 가르친다. 베네딕트 옵션은 ‘규칙’의 덕목에 의지해 그리스도인들이 정치 교회 가정 공동체 교육 직업 섹슈얼리티 기술에 접근하는 방식을 변화시킨다”고 강조했습니다. 세상이 원하는 방식으로 세상에 대응하는 일을 멈추고 세상과 구별되는 공동체에서 (그리스도를 위한) 충성을 쌓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불 속으로 들어갈 때 이 손부터 태워야”
1556년 3월 21일 영국 종교개혁의 중요한 인물이자 공동 기도문의 저자인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크랜머가 이전의 강제 개종을 거부한 후 메리 여왕에 의해 화형에 처해집니다. 그는 철회서에 서명한 손이 가장 먼저 타야 한다며 자신의 팔을 불길 속으로 밀어 넣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영국 헨리 8세는 형수 캐서린과의 결혼 이후 아들을 낳지 못하고 왕위 계승이 어렵게 되자 자기와 캐서린의 결혼을 무효화 해달라고 로마 교황청에 청원했습니다. 그 후 다른 여성과 결혼해 왕위 계승자를 얻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습니다. 또 당시 왕의 종교 문제 최고 고문이었던 토머스 크랜머에게 주요 가톨릭 대학과 상의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주요 대학들인 파리 오를레앙 투르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이탈리아 일부 대학도 헨리와 (형수) 캐서린의 결혼이 애초부터 불법이라는 해답을 보내왔습니다.

이때부터 헨리 8세는 로마와의 결별로 이어질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그는 로마에 항소를 제한하는 옛 법령들을 부활시킴으로써 성직자들을 직접적인 국왕의 권위 아래 두었습니다. 그는 로마로 흘러 들어가는 각종 자금을 봉쇄할 것도 고려했습니다. 그는 이를 구실 삼아 로마를 위협, 교황으로 하여금 크랜머를 캔터베리 대주교에 임명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마침 토머스 크랜머도 왕실 주도 아래 교회 개혁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로마와의 최종 결렬은 1534년 발생했으며 의회는 국왕의 명령에 따라 교황청으로 흘러 들어가는 각종 헌금을 봉쇄시켰으며 헨리와 캐서린의 결혼을 무효로 판결했습니다. 의회는 국왕을 ‘영국교회의 수장’(수장령)으로 지명했습니다.

이때까지의 일련의 사건은 교회 개혁의 시도가 아니라 분열을 정당화하는 데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잉글랜드에는 철저한 교회 개혁이 필요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이들은 당시의 상황이 이를 성취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태도를 보여준 전형적인 인물이 바로 왕의 정책을 지원한 크랜머 대주교였습니다. 크랜머는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도록 명령하고 왕의 이름 아래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각 교회에 커다란 영어 성경책을 비치하도록 했습니다. 이는 종교개혁 지지자들에게는 더할 수 없이 유리한 조치였습니다. 성경 구절을 근거로 하여 자기들의 교리와 뜻하는 목표를 보다 강하게 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수도원을 폐쇄함으로 가톨릭의 중추부가 힘을 잃었습니다.

헨리 8세 이후 왕위 계승 순서는 에드워드 6세 왕자, 그리고 메리, 엘리자베스였습니다. 에드워드 6세는 헨리 8세 사망 이후 6년을 더 살았습니다. 이 짧은 기간에 교회 개혁은 더욱 진보했습니다. 평신도들에게 성찬의 포도주가 주어졌으며 성직자들의 결혼이 허용됐습니다. 교회의 성상들이 철거됐습니다. 이 시기 가장 중요한 업적은 ‘공동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의 출판입니다. 주로 크랜머가 작성한 기도서를 통해 잉글랜드인들은 처음으로 영어로 된 예배의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에드워드 6세가 죽자 뒤이어 메리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녀는 충실한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그녀의 사촌 카를 5세와 보수적 가톨릭 주교들이 그녀를 강력하게 지원했습니다. 그녀의 왕위가 견고해지자 메리는 개신교도를 억압하기 시작했습니다. 1554년 말 잉글랜드는 다시 공식적으로 교황에 대한 충성을 서약했으며 헨리 8세와 에드워드 6세 재위 기간에 이루어진 대부분의 조처가 철회됐습니다. 결혼한 성직자들에게는 아내를 내보내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개신교 지도자에 대한 박해가 자행됐습니다. 이 시기 거의 300명이 처형됐으며 투옥되거나, 유배, 망명의 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이런 까닭에 메리 여왕은 ‘블러디 메리(Bloody Mary·피의 메리)’라는 칭호가 붙여지고 있습니다.

1563년 존 폭스의 '순교사'에 등장하는 토머스 크랜머 캔터베리 대주교의 화형 모습. 그는 자신이 '피의 메리' 여왕의 통치 아래 개신교적 행동을 취했던 것을 철회하는 서명을 했다가 다시 취소하면서 철회 서명을 했던 두 손가락부터 불에 넣고 있다.

크랜머는 메리 여왕 시대 가장 유명한 순교자였습니다. 그의 사건은 로마교황청으로 이첩됐고 로마는 그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허수아비를 불태웠습니다. 크랜머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지지자요 동지였던 두 감독 라티머와 리들리가 화형당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고 결국 크랜머는 자신의 이전 행동을 철회한다는 서약서에 서명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형 판결을 받았습니다. 후에 나타날지도 모르는 추종자를 위한 본보기였습니다. 그는 화형 직전 자신의 철회 서명을 다시 취소함으로써 지켜보는 이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내 마음으로 생각했던 진리와는 다른 것으로써 죽음의 공포 때문에 생명을 구하기 위해 쓴 것입니다.…내가 진심으로 믿는 것과 반대되는 사실들을 종이에 써야 했던 내 손이 먼저 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불길 속으로 들어갈 때 이 손들을 먼저 태워야 할 것입니다. 나는 또한 그리스도의 적이자 적그리스도인 교황을 그의 모든 거짓된 가르침들과 함께 거부합니다.”

이 노인의 용감한 모습은 그의 이전 실수들을 잊게 만들게 충분했습니다. 그는 실제로 불 속에 두 손을 집어넣었고 개신교도들은 그를 영웅으로 여겼습니다. 그의 본보기에 용기를 얻은 이들은 프로테스탄트의 가르침을 계속 전파했습니다.

음악의 아버지는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다
1685년 3월 21일 독일의 오르간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독일 아이제나흐에서 태어났습니다. 당대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사후 수년 동안 잊혀졌지만 이후 역사상 독보적인 음악 거장 중 한 명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바흐에게 음악은 단순한 음악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작곡한 1000여 곡 중 거의 4분의 3이 예배를 위해 작곡되었습니다. 그의 음악적 천재성과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 그리고 음악의 효과로 인해 그는 많은 분야에서 ‘제5의 전도자’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바흐는 1717년 쾨텐에서 대공 레오폴트의 전속 궁정 음악 감독으로 봉직했으며 이후 1723년 작센 선제후 영토 내 도시인 라이프치히에 정착했습니다. 거기서 바흐는 교회 합창단 및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부임해 전용 파이프오르간을 가지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바흐는 별세할 때까지 27년간 라이프치히 성토마스교회 성가대 지휘 및 음악 감독으로 근무했습니다.

바흐의 전기를 썼던 네덜란드 출신 역사가 반 룬은 바흐의 인간됨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세바스티안 바흐는 시기심 따위를 품기에는 도량이 큰 인물이었고 문자 그대로의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다. 바흐의 경우 그의 인간됨과 예술은 완전히 일치했다.”

그는 천부적 재능에 더해 체계적인 음악 교육을 받았고 성장해서는 충실한 가장이자 유능한 교육자, 신실한 기독교 신자였으며 평생을 오로지 신앙생활과 음악에 헌신했습니다. ‘음악과 루터교의 제단에 몸 바친 성자’로 알려집니다. 그는 두 명의 부인 사이에서 20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주요 곡으로는 ‘인벤션과 신포니아’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2단 하프시코드를 위한 아리아와 여러 가지 변주곡’ 일명 ‘골드베르그 변주곡’ ‘6개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전곡집’ ‘무반주 첼로 조곡’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음악의 헌정’ 등이 있습니다. 라이프치히시의 위촉을 받아 작곡한 총 40곡으로 구성된 ‘요한 수난곡’이 있으며 이는 ‘마태 수난곡’과 더불어 바흐 종교 음악의 불후 명작으로 꼽힙니다. 성토마스교회와 성니콜라이 교회에서는 매주 교회 칸타타가 연주되었고 성 금요일에는 대규모 수난곡이 연주되었습니다. 바흐는 1723~1729년 사이에 140곡 이상의 교회 칸타타를 작곡했습니다.

미국 최고 칼뱅주의 신학자이자 목회자
1758년 3월 22일 미국 최고의 신학자 조너선 에드워즈가 지금의 프린스턴 대학교 총장직을 수락하기 위해 뉴저지에 도착한 후 천연두 예방 접종 후유증으로 별세합니다. 에드워즈는 미국 최고의 칼뱅주의 신학자이며 철학자요 탁월한 설교자(1703~1758년)였습니다. 미국 코네티컷주 이스트윈저에서 출생, 예일대를 졸업하고 매사추세츠주 노댐턴의 회중교회 목사가 되었습니다. 1734~1735년에는 조지 휫필드와 함께 엄격한 칼뱅주의에 입각, 제1차 영적 대각성운동을 주도했습니다. 무엇보다 시간을 아끼며 의식주에까지 철저하게 절제된 그의 삶은 오늘날까지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큰 귀감이 됩니다.

1741년 코네티컷주 앤필드에서 행한 ‘하나님의 진노의 손 아래 있는 죄인’이란 설교는 유명합니다. 1750년 매사추세츠 스톡브릿지로 가서 인디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미국 3대 부통령 에런 버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저서로는 ‘참 신앙의 본질’ ‘의지의 자유’ ‘원죄’ 등이 있습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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