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모금]장강명 작가, 밥먹다 채플린을 생각하다

박병희 2024. 3. 17.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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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집 출간…일간지·잡지 기고 90여편 담아

오는 27일 개봉하는 손석구, 김성철 주연의 영화 '댓글부대'는 2015년 발표된 장강명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연극으로 먼저 제작됐다. 극단 바바서커스가 2017년 초연했고 2018년과 2019년에도 잇달아 공연했다. 서울연극제 공식 초청작으로 공연한 2019년에 연극 '댓글부대'를 봤다. 그해 서울연극제 공식 초청장 10개 작품 중 9개 작품을 봤는데 가장 흥미로웠다.

장강명 작가는 2011년 장편소설 '표백'으로 한겨레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일간지 기자 출신답게 우리 사회의 병폐를 소재로 삼은 작품을 많이 썼다. 댓글부대는 국가정보원 여론조작 사건을 소재로 한다.

장강명 작가는 왕성하게 소설을 발표하면서도 신문 등 여러 매체에 꾸준히 칼럼을 썼다. 산문집 '미세 좌절의 시대'는 2016년부터 2024년까지 여러 일간지와 잡지에 발표된 글 중 90여 편을 추렸다. 사회를 바라보는 비판적 시선은 여전하고 현상을 궤뚫는 통찰도 여러 곳에서 보여준다.

미국에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금문교도 아니었고 샌프란시스코의 명물인 케이블카도 아니었다. 무지막지하게 버려지는 그네들의 쓰레기였다. (중략)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지난해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2014년 기준으로 한국의 생활 쓰레기 재활용률은 59퍼센트인데, 미국은 35퍼센트에 그친다. (중략) 나는 한국의 재활용 쓰레기 정책이 자랑스럽다. 세계의 모범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같은 효과를 내면서도 시민들이 덜 피곤하도록 정책을 세심히 다듬을 여지도 있다고 생각한다. (중략) 전국 도시 곳곳에서 재활용 쓰레기 분리배출을 맡아 하는 사회적기업을 만들고 지원하면 아파트 주민과 경비원들이 한숨 돌리지 않을까. 아침에 아이들을 어린이집이나 학교에 데려다주고 오후에 집으로 데려오는 사회적기업이 많아지면 젊은 부부의 삶이 얼마나 더 여유로워질까. 일자리도 창출되고 말이다.(25~27쪽, 도시 노동자의 무료 노동)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에서 빠르게 복제되어 퍼져나가는 자극적인 정보를 최근에는 '밈'이라는 명칭으로 부른다. (중략) 밈과 가장 가까운 현실의 물건은 아마 감자칩 아닐까? (중략) 감자칩을 자극적으로 만들려면 기름에 코팅된 면적을 넓혀야 하고, 소금을 비롯한 양념을 최대한 많이 뿌려야 한다. 즉, 얇아야 한다. 감자칩이 정말 맛있는 음식이라면 씹고 있는 동안에도 맛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입에서 우물거리고 있다 보면 금세 즐거운 감흥이 사라진다. 감자칩의 맛은 깊은 풍미가 아니라 입에 넣어서 부술 때 얻는 기름과 양념의 타격감이기 때문이다. 밈이 주는 즐거움도 얄팍한 타격감에서 온다. 그걸 볼 때 뇌에서 잠시 도파민이 분비되었다가 사라진다. (중략) 지금 한국의 언론은 인터넷 밈을 흉내 내며, 뉴스 플랫폼은 밈-뉴스로 채워지고 있다. 2021년 한 해 동안 사람이 네이버에서 어떤 기사를 가장 많이 봤는지 기자협회보에서 조사했다. 1위는 213만여 명이 클릭한 '이혼 후 자연인 된 송종국, 해발 1000m 산속서 약초 캔다"였다. 기자가 그 내용을 취재한 것도 아니었다. 방송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기사였다. (중략) 이런 글 많이 읽으면 지식과 지혜가 쌓이나? 이런 '콘텐츠'들이 결혼이나 명예에 대해 반성적 사고와 통찰을 얻을 기회를 제공하나?(51~53쪽, 감자칩과 인터넷 밈)

자본주의의 가장 큰 단점은 효율성이라는 단 하나의 가치만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삶에서 효율성 외에도 인권, 윤리, 사랑, 우정, 진실, 아름다움, 교양, 공동체 의식 등 다양한 가치를 추구한다. (중략) 내 입장은 자본주의가 대단히 훌륭한 도구이나, 완벽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삶의 다른 가치들을 위해 때때로 비효율을 받아들여야 한다. 비효율을 선택할 때에는 그 결정이 다른 가치를 어떻게 키우거나 지킬 수 있는지 분명히 확인하고 방향을 제대로 잡아야 한다. 효율성이 그저 비인간적이라고 반대한다면 그 얼마나 어리석은가.(78쪽, 독립 서점, 전통시장, 그리고 자본주의)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신경제 5개년 계획을 발표했을 때 한 경제신문의 해설기사에는 이런 문장이 실렸다. "여건 변화에 따라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계획'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계획이라는 얘기다. 그리고 다들 알다시피 그 5개년 계획이 끝난 뒤 외환위기가 찾아왔다. 이후 한국 정부는 한동안 장기 경제계획을 내지 않았다. 2014년에 박근혜 정부가 '경제 혁신 3개년 계획'을 발표했는데, 십칠 년 만의 경제계획이라고 했다. 3개년 계획이 끝날 때 박근혜 정부는 탄핵을 맞았다. (중략) 신경제 5개년 계획과 경제 혁신 3개년 계획 사이의 어느 시점에,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장기 계획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렸다. 도무지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데 몇 년 뒤를 어떻게 계획할 것이며, 이렇게 빨리 변하는 세상에서 계획이 무슨 도움이 되나? 모든 게 극도로 불확실해진다는 점만이 점점 더 확실해진다. (중략) 그렇게 "인생 참 계획대로 안 되네'라는 말을 더 자주 하게 된다. 나는 여기에 '미세 좌절'이라는 이름을 붙여본다.(94~96쪽, '미세 좌절'의 시대)

한국어 사용자는 사람을 만날 때 대화에 앞서 상대를 높여야 하는지 낮춰도 되는지 먼저 고민해야 한다. 언어가 그걸 요구한다. 늘 천박한 탐색전을 벌여야 한다. 이 언어를 쓰다 보면 세상에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너무 익숙해진다. 교실에서 민주주의 정신을 아무리 배워도 소용없다. 일상의 언어가 '실은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아래 사람 있다'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일깨워준다. (중략) 너는 나에게 반말과 존댓말을 마음대로 쓸 수 있지만 나는 너에게 존댓말밖에 쓰지 못할 때 나는 금방 무력해진다. 순종적인 자세가 되고 만다. 그런 때 존댓말은 어떤 내용도 제대로 실어 나르지 못한다. 세상을 바꿀 수도 있을 도전적인 아이디어들이 그렇게 한 사람의 머리 안에 갇혀 사라진다. (중략) 나의 자존을 지키지 못하는 언어, 틀렸다고 꾸중 듣기 좋은 말을 자주 쓰고 싶을 리 없다. 단기적인 대책은 상사, 선생님, 위 세대와 대화하지 않는 것이다. 장기적인 대책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다. 한국의 세대 구분이 그렇게 촘촘하고 계층 간 단절이 심한 것, 이 사회가 그토록 출세 지향적인 것은 언어 탓이 꽤 크다고 생각한다. '존댓말 쓰고 반말 듣는 상황'을 다들 피하고 싶지 않나. 오래도록 그런 처지에 내몰려 억울함이 쌓이고 묵으면 한이라는 한국인 특유의 정서가 만들어지는 것 아닌가. (중략) 내가 제안하는 해결책은, 가족이나 친구가 아닌 모든 성인에게 존댓말을 쓰자는 것이다. (281~288쪽, 한국어에 불만 있다)

며칠 전에는 점심으로 토스트를 먹고, 돌아오는 길에 저녁에 먹을 도시락을 포장해왔다. 토스트 가게와 도시락 가게의 점심시간 풍경이 복사라도 한 것처럼 똑같았다. 고물가 시대에 비교적 저렴한 메뉴이다 보니 손님으로 북적였다. 배달 앱의 주문 알림 소리도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중략) 그날 포장한 도시락을 들고 집에 돌아가며 나는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스'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채플린이 연기한 이름 없는 주인공은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에 맞춰 쉼 없이 나사를 죈다. 그러다 재채기를 한 번 했을 뿐인데 그 속도를 놓치고 만다. 주인공은 결국 나사를 죄며 기계장치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모던 타임스'가 나온 지 팔십 년이 넘었는데 어떤 일터의 풍경이 그대로라는 사실이 섬뜩했다. 도시락을 든 채 생각했다. 이게 한계라고, 사람이 이보다 더 바빠질 수는 없다고. 이대로 가다간 쓰러지거나 사고가 난다고. 사람이 너무 바빠지면 현재를 살피지도 미대를 대비하지도 못하게 되는데, 우리 사회 전체가 그 단계에 이른 것 같다고. (414~416쪽, 2022년 식당 풍경과 '모던 타임스')

미세 좌절의 시대 |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432쪽 | 1만8000원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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