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한 ‘클로델’과 ‘세라핀’ [유경희의 ‘연금술의 미술관’]

2024. 3. 16.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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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예술가로 산다는 것

여성이 예술가로 산다는 것 자체가 녹록지 않던 시절, 1864년 같은 해에 태어나 예술가로서 짧은 세월을 보낸 두 여성 예술가가 있다. 그리고 마침내 이 동갑내기 두 여자는 비슷한 시기에 정신병원에서 삶을 마감했다. 서로의 존재를 전혀 몰랐던 이 예술가는 카미유 클로델(1864~1943년)과 세라핀 루이(1864~1942년)다. 두 여성 작가는 정신병원에서 단 한 점의 작품도 남기지 않았다. 현대미술의 인기 작가 쿠사마 야요이(1929년생)가 정신병원에서 작업실로 출퇴근하는 루틴한 삶을 살면서, 현재까지 건장하게 다작을 하는 것에 비하면 두 여성 작가의 삶은 시대가 만든 비극이다.

세라핀 루이는 ‘세라핀(2009년 마르탱 프로보스트 감독)’이라는 영화가 상영되기 전까지는 대중에게 낯선, 그저 아웃사이더에 불과한 작가였다. ‘상리스의 세라핀(Seraphine de Senlis·파리 북동쪽의 작은 마을)’으로 알려진 그녀의 작품은 통상 소박파(naive art) 혹은 아르브뤼(Art Brut·원생미술)라고도 부른다. 이들 유파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어린아이에게서 볼 수 있는 다듬어지지 않은 유치한 그림을 그린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수녀원에서 자란 세라핀은 양치기를 하다 상리스 마을 중산층 가정의 가사도우미로 일하게 된다. 이 집 저 집을 돌아다니며 빨래와 청소 등 온갖 궂은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지만,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건 콧노래를 부르며 자연과 노는 일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 방세를 못 낼 정도로 몹시 가난했던 세라핀은 돈이 생기면 방세와 땔감 구입을 뒤로 미루고 동네 화방으로 향했다. 물론 화방에도 빚이 있다. 늘 궁핍했기에 자신만의 물감 채취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푸줏간의 돼지 피, 교회의 촛농, 숲속 연못의 진흙, 야생화, 빵 부스러기 등을 정성스레 채집하는 그녀의 모습은 성스러울 정도다.

세라핀은 성공에 대한 야망도, 돈이나 명예에 대한 소망도 없이 오로지 본능과 계시에 따라서만 그림을 그렸다. 그런 그녀에게 운명 같은 만남이 찾아온다. 1914년경, 가정부로 일하던 집 아래층에 잠시 휴식을 취하고 글을 쓰기 위해서 이사 온 빌헬름 우데(1874~1947년)와의 만남. 그는 피카소 그림을 처음으로 구입하고 앙리 루소를 발굴해 첫 개인전을 열어줄 만큼 심미안을 가진 독일의 미술 평론가이자 화상이었다. 그는 주인집 한편에 방치돼 있는 세라핀의 사과 그림을 보고는 단박에 천부적인 재능을 알아챈다.

빌헬름은 그때까지 무시당했던 세라핀의 작품에 찬사를 보내고 작품을 구입하는 등 예술의 의지를 북돋웠다. 두 사람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전쟁을 일으킨 독일은 프랑스를 침공했고, 독일인이었던 우데는 더 이상 프랑스에 머물 수 없었다. 이제 막 비상하려고 하는 찰나, 후원자가 곁을 떠나버리게 된 것.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건 십여 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1927년이다. 우데가 상리스미술가협회전에서 세라핀의 그림을 보고 그녀를 다시 찾아냈다. 우데는 재정적 지원을 약속하고 그녀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전시회를 준비하지만, 대공황 시절 우데는 거의 파산 직전으로 세라핀을 비롯한 화가들을 도울 여건이 되지 않았다.

한껏 기대에 부풀었던 세라핀은 초조와 불안에 빠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랑을 가장하고 다가온 남성에게 그림과 돈을 모두 잃기도 한다. 게다가 자폐적인 성향의 그녀는 평상시에도 수호천사의 계시를 받아 그림을 그린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는데, 이제 그 신념이 망상으로 변해 세상이 멸망해간다고 중얼거리며 상리스 거리를 방황하기에 이른다. 1932년 급기야 정신적인 공황에 빠져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안부 겸 그림이 팔렸다는 소식을 전하러 우데가 찾아갔지만 안타깝게도 만남은 이뤄지지 못한다. 세라핀은 1942년 클레르몽 정신병원에서 숨졌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흐른 뒤에야 우데의 노력으로 세라핀의 첫 전시회가 열렸고, 2009년 영화 흥행에 힘입어 다시 회고전이 열리며 대중에게 알려지게 됐다.

세라핀, 오렌지와 세 조각의 오렌지, 1915년경, 상리스뮤지엄.
로댕과 파국 이후 칩거한 클로델

세라핀보다 20여년 먼저 정신병원에 수감됐던 여성 작가는 카미유 클로델이다. 지성과 재능으로 따지자면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총명하고 천재적이었던 그녀는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40대 후반에 정신병원에 들어가 78세, 그러니까 30여년을 감금된 채 보내게 된다. 가족과 로댕과 세상을 원망하면서.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한 까닭인지 클로델은 아버지 같은 로댕과 사랑에 빠진다. 당시 로댕은 결혼을 하진 않았지만 오랫동안 함께 살았던 조강지처와도 같은 로즈 뵈레라는 여자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로델은 로댕의 제자이자, 연인이며, 예술의 동지이자 영감의 원천으로써 로댕의 가장 막강한 뮤즈가 됐다. 로댕으로부터 천재성을 인정받은 덕분인지, 여성 예술가를 무시하는 시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조각계에서 큰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십여 년 만에 끝장이 났다. 로댕은 자신만을 바라봐주고 결혼할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는 클로델이 부담스러웠고, 더군다나 상승하는 그녀의 인지도가 자신을 위협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세상에 알려진 바와 달리 카미유가 사회에서 배척당한 조각가가 아니었다는 사실. 그녀는 거의 매년 살롱전에 출품했고, 언론에서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는 이미 상당한 명성을 지닌 로댕에게는 부담으로 다가왔고, 게다가 클로델의 작품을 표절했다는 논란과 스캔들은 엄청난 중압감을 줬다. 급기야 로댕은 의혹을 산 클로델의 작품들을 전시회에 출품하지 못하게 압력을 가함으로써 결국 클로델과 로댕은 완전한 파국을 맞이한다. 그녀는 예술계에서 멀어져갔고 작업실에서 수많은 고양이들과 함께 칩거하기에 이른다. 급기야는 로댕과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감시하고 미행하며 해를 입힌다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힌다. 가족들은 클로델의 든든한 지원자였던 아버지가 죽자 그녀를 정신병원에 보낸다. 당시 클로델에 대한 의료진의 진단명은 ‘편집증적 망상’이었다. 수감되고 얼마 후 병세가 호전돼 퇴원 조치가 내려졌으나 가족들, 특히 엄마가 극구 반대했다. 그녀의 외출도, 면회도 금지시켰다. 클로델은 정신병원에 아주 잠시만 머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30여년 동안 한 점의 조각 작품은커녕 스케치 한 장도 남기지 않았다.

두 천재적 여성 예술가가 그저 불운한 시대를 만나 제대로 예술 인생을 펼치지 못한 것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딱히 그렇지만도 않다. 그들의 비극적 예술 인생은 어느 정도 혹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성격과 기질 탓이기도 하다. 사실 세라핀과 클로델은 똑같은 망상적 분열증의 소유자였는데, 그들은 높은 수준의 의지와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들은 스스로의 의지와 확신의 희생양이 된 것만 같다. 그런들 어쩌겠나. 그런 의지와 확신 없이 무슨 예술을 한단 말인가!

1935년 71세의 카미유 클로델의 마지막 사진, 정신병원.
유경희 유경희예술처방연구소 대표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50호 (2024.03.13~2024.03.19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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