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계 놀라게 한 감독의 이민, 그의 딸이 그린 연애

김상목 2024. 3. 15.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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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패스트 라이브즈>

[김상목 기자]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스틸 이미지
ⓒ CJ ENM
 
<패스트 라이브즈>의 초반부를 보다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주인공 나영의 가족은 캐나다 이민을 준비하는 중이다. 나영의 아빠는 영화감독이고 엄마는 화가다. 이들의 시간은 1990년대 후반, '밀레니엄'을 앞둔 시절이다. 이때를 떠올리면 영화를 만든 셀린 송 감독의 부친인 송능한 감독이 한때 한국영화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이민 소식을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송능한 감독은 서울대학교 영화동아리 '얄라셩' 출신으로 <태백산맥> 등의 각본가로 영화계에 입성한 후, 1997년 감독 데뷔 작품 <넘버3>로 그야말로 대박을 친다.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한 축으로 기대를 한몸에 받은 것은 물론, 한석규, 최민식, 송강호 등 현재까지 한국영화계를 떠받치고 있는 명배우들을 대거 발굴해 어느덧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꾸준히 호출되는 명작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세련된 풍자를 가미한 블랙코미디로 고색창연한 기존 충무로 영화와 대비되는 '뉴웨이브' 한국영화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만큼 당시 <넘버3>의 위상과 파급력은 엄청났다.

그렇게 첫 작업으로 한국영화계의 기대주로 등극했던 감독은 2년 후 차기작 <세기말>을 내놓는다. 하지만 당대 한국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해부와 비판 정신이 가득했던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전작의 성공요소였던 코믹함을 소거한 채 냉소적 기운이 가득했던 <세기말>은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얻었다. 그리고 곧이어 충격적인 소식이 들렸다. 감독이 이민을 떠났다는 것이다. 간간이 소식은 들려왔지만, 그 이후로 송능한 감독의 신작은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고 아쉬워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어느새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을 즈음, 셀린 송이라는 한국계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근래 북미권에서 아시아계 이민자 출신 영화인들의 활약이 적지 않게 들려오는 가운데 관심을 끌 법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셀린 송 감독이 바로 송능한 감독의 딸이라는 소식은 놀라움과 함께 아쉽게 한국을 떠난 부친에 대한 기억을 환기하기에 충분한 건이었다.

게다가 영화 속 주인공 나영의 사연은 감독 본인의 자전적 경험이 깊숙하게 개입한 것이기에 그의 경계인으로서의 이민 생활과 겹쳐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영화를 관람하기 전 묘한 감정과 기억을 통과하며 생각에 잠겼다.

24년간의 기다림은 Long Goodbye, 그리고 진정한 새 출발

소년과 소녀가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면 이성에 풋풋하게 눈뜰법한 나이. 나영과 해성은 1등을 놓고 각축을 벌이는 경쟁자이자, 둘만이 공유하는 소우주를 가졌다. 서로에 대한 밀고 당기기는 대놓고 고백만 하지 않을 뿐 호감을 상호 공유하고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그들이 품은 감정은 첫사랑의 추억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나영에겐 해성에게 알리지 않은 비밀이 있다. 소녀의 가족은 곧 태평양 건너 북미 대륙으로 이민을 떠날 예정이다. 출국이 임박해 마침내 나영은 해성에게 곧 떠난다는 것을 알리고 해성은 충격에 빠진다. 애틋한 마음은 같지만, 나영은 자신은 노벨상을 타야 하니 떠날 수밖에 없다며 상실감을 얼버무린다. 둘은 늘 함께 다니던 통학 길 골목에서 처음으로 엇갈린다. 그렇게 10대 초반의 인연은 급작스럽게 중단된다. 아직은 지금처럼 국경을 초월해 연락하기 어렵던 시절이다.

12년이 지났다. 나영은 뉴욕에서 극작가가 되었고 해성은 군생활을 마치려는 참이다. 문득 그 소년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한 번 정도는 추억이 꿈틀거리기 마련이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자신을 SNS 게시판에서 애타게 수소문한다는 첩보를 입수한다. 궁금한 마음으로 확인해 보니 바로 해성이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둘은 13시간의 시차를 무릅쓰고 온라인 영상 채팅을 활용해 재회한다. 그렇게 12년 전 소년과 소녀는 다시 만나게 된다.

해성은 나영을 열심히 검색했지만 이제 뉴욕에 정착한 상대는 노라가 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 사이의 거리는 시차를 통한 간격으로 각인된다. 13시간의 시차를 감당하는 건 일회성으론 어렵지 않아도 지속하려면 일상생활의 애로는 피할 수 없다. 비밀일기장처럼 왕년의 소꿉친구들은 즐겁게 대화시간을 기다리지만, 점점 누적되는 피로도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나영은 모종의 결단을 내리고 해성에게 통보한다.

다시 12년이 흘렀다. 이제 그들은 30대 중반에 접어들었다. 나영은 여전히 뉴욕에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해성은 한국에서 직장인이 되었다. 10년이란 시간은 그냥 흘러가지만은 않았다. 해성은 얼마 전 사귀던 여자친구와 헤어졌고, 나영은 동료 작가와 결혼한 지 한참이 지났다. 그런 가운데 해성이 뉴욕으로 휴가 여행을 오기로 했다. 둘은 그렇게 재회한다. 서로 그동안 만날 기회가 없지는 않았으나 둘은 굳이 만나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나영이 한국에 방문했을 때에도 해성은 오히려 피했던 기색이다.

그런 사연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대면하게 된 둘은 그저 반가움에 빠져든다. 하지만 이제 둘은 24년 전, 그리고 12년 전의 사이로 돌아갈 순 없다. 노라의 남편 아서까지 셋은 기묘한 대화를 이어간다. 그리고 곧 예정된 작별의 순간이 깃든다. 그 물리적 순간에 도달하고 나서야 마침내 지난 24년간 그들이 품었던 복잡한 감정이 정화되고 그들만의 소우주가 새로운 단계로 전환된다.

코리안-디아스포라 영화에 한 획을 긋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스틸 이미지
ⓒ CJ ENM
 
<패스트 라이브즈>가 공개된 뒤, 적지 않은 이들이 영화에 대한 불편함을 내비쳤다. 두 주인공 남녀의 사반세기 가까운 애증의 관계를 통해 감독 본인을 포함해 북미 대륙으로 이주한 한국계 이민자들의 정서와 정체성을 압축적으로 선보이려는 의도에 대한 정서적 거부감이 핵심이다. 해성은 지고지순하게 10여 년 후에도 첫사랑 소녀를 잊지 못해 열심히 수소문하다 어렵게 (온라인상으로나마) 재회하고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과거의 나영은 이제 먼 이국에서의 삶에 충실하게 살기 위해 매몰차게 튕겨내 버린다. 

하지만 노라의 선택은 지극히 합리적이다. 13시간의 시차로 상징되는 거리의 물리학은 결코 마음 만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감독은 영화 중반에 채팅 시간을 간절히 기다리던 둘이 그 대가로 부담해야 하는 심신의 피로감과 일상생활의 파괴를 잔잔하지만 확연하게 표현한다. 해성도 죽을 맛이지만 극작가로서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전력으로 쏟아부어야만 하는 노라로선 양자택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기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그는 자신이 10대 초반에 결단한 이민자로서의 꿈을 쫓기로 한다. 노라에겐 지극히 당연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래도 해성에게 마음이 더 기울어지게 마련이다. '한국인이라면 멀리 떠나 있어도 이곳을 고향으로, 혹은 언젠가 돌아올 곳으로 상정하며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곰곰이 따져보면 현실감이 떨어지는 이러한 기대심리를 자꾸만 '디아스포라'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투영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각자의 다양한 사정으로 인해 한국을 떠난 이들에게 '민족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주입하려는 경향은 한국 현대사에서 뿌리내린 방어적 민족주의와 결합한다. 주권을 빼앗기거나 생존을 위해 만리타향으로 뿔뿔이 흩어진 이들에게 한민족으로서의 동정과 함께 마땅히 고국을 그리워하는 동포로서의 기대치를 투영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영이 자신을 노라로 표현해도 해성과 관객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이런 감정은 우리가 '조선족'이나 '고려인', '자이니치'로 통칭 되는 이들에게 은연중에 품고 있는 감정과 연결된다. 재일동포가 부당하게 당하는 일제강점기로부터 이어져 온 차별에 관심을 갖는 건 지극히 당연하고 필요한 일이지만, 그들이 일본 사회 내에서 소수자로서 정체성을 갖고 평등하게 살아가는 이상을 기대하는 건 과도한 욕심이 아닐까. 그들의 선조가 겪어야 했던 생존의 위기 당시에는 국가건 누구건 대책을 세우지 못했건만 자꾸만 단일민족의 환상을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기대하고 종용하는 건 '폭력'에 가까울지 모른다.

'헬조선', '탈조선'이라는 신조어가 공공연하게 생겨나고 <한국이 싫어서>라는 제목의 소설이 베스트셀러에 영화화되는 2020년대에도 우리는 국가와 민족이라는 거대한 공동체에 개인이 종속된다는 20세기의 사고가 여전히 짙게 남아 있는 편이다. 물론 그 자체로 일정한 당위성을 지니고 있고 우리가 해결해야 할 숙제가 남아있지만, 그렇다고 21세기에도 무한정 반복될 순 없는 노릇이다. 부모의 손에 이끌려 한참 어릴 적에 한국을 떠난 후 새로운 땅에서 성공하기 위해 노력하는 노라의 초상은 <패스트 라이브즈>가 사회적 주제의식을 선연히 내비치지 않는데도 생각해볼 거리를 진하게 남긴다.

만국 공통의 공감대, 첫사랑의 추억과 작별을 고할 때

다시 두 주인공의 관계로 돌아가 보자. 해성의 선택은 미묘한 감정으로 다가올 법하다. 간절히 찾다 겨우 소식이 닿은 첫사랑에게 달려가야 하지만, 그는 21세기 한국 사회 시스템 치하의 청년이다. 20대 중반이 될 때까지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을 부모의 기대, 그리고 또래 친구들과 공유하는 인생의 궤적에서 과감히 이탈하는 결단은 그에겐 너무나 이기적이고 위험한 승부수다. 뉴욕으로 언제 올 수 있냐고 여러 번 질문하는 상대에게 그는 속 시원하게 답해주지 못한다. 노라의 결단에는 해성의 그런 망설임이 작용했으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또다시 12년이 흐르는 동안에 그는 온전히 한국의 체제에 적응한 것으로 보인다. 나쁘지 않은 직장에 취업했고, 새로운 연애도 경험했지만 결국에 그는 12년 전 노라와의 짧은 만남과 단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모습을 드러낸다. 무심한 듯 반복되는 또래 친구들과의 술자리 장면 반복은 해성에게 숙명처럼 들러붙는 '동시대 한국(남성)인'의 정체성을 부각하는 장치로 실용성을 발휘한다.

둘의 감정은 역설적으로 오래 떨어져 있었기에 오히려 지속이 될 수 있었던 결과다. 사실 답을 알고 있었음에도 둘은 각자의 상황과 사정 때문에 외면하거나 회피하려 했다. 다가올 작별 혹은 파국이 두려웠을 수 있다. 첫사랑의 아픔을 경험한 이들이라면 누가 그들에게 쉽게 단정할 수 있을까. 그러나 어느덧 실제 각자의 삶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부유하며 거품을 키워가는 감정이 유익할 순 없는 노릇이다. 결국에는 작별의 순간이 도래할 수밖에 없다. 둘은 어떤 무언의 공감대 때문에 그렇게 오래 피해만 다녔던 '대면'에 도달한 것일 테다.

뉴욕이라는 이국적 공간을 배경으로 전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이들이 만나고 떠나는 이 글로벌 대도시에서 마침표를 찍는 그들의 인연은 너무나 드라마틱하게 귀결된다. (실제로 노라와 유사하게 경계인의 삶을 체험한) 해성 역 배우 유태오, 감독의 재현 그 자체라 할 노라 역의 배우 그레타 리의 발견이 반갑다. 그러나 의외의 '리베로'는 그의 남편을 소화한 아서 역의 배우 존 마가로였다.

주인공 둘만의 관계라면 조금 식상하게 늘어질 수 있는 중력장을 노라의 현재 반려인 아서의 입장을 통해서 확장하고, 관객에게 제3자로서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도록 해주는 솜씨가 특히 눈에 밟힌다. 이 정교한 직조 과정을 거친 수고 덕분에 영화는 한국인의 시야를 가뿐히 초월해 '디아스포라'에 속한 경계인들의 공통점과 삶의 고민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해준다. 아시아계 이민자들에 대한 조명이 이제 드물지 않은 가운데 유독 본작이 주목받는 데에는 그럴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는 법.

그 농밀한 감정의 교차가 그야말로 폭발하듯 극대화되는 삼자대면의 찰나, 그리고 마지막 작별인사로 이어지는 클라이맥스는 그 순간에 도달하기까지 둘이 거쳐온 영화 속 세월, 그리고 이를 정교하게 축조해낸 감독과 제작진, 연기자들의 수고 덕분에 어마어마한 감정의 고양으로 관객에게 누수 없이 전달될 법하다.

왜 신인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 미국 아카데미상 시상식 작품상과 각본상 후보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는지, 전 세계를 돌면서 수집한 수상 트로피로 작은 방 하나 가득 채울만한 위업을 달성했는지 끝까지 영화를 보고 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영화 개봉과 함께 출간된 대본집을 통해 인상적인 대사와 장면 묘사를 다시 확인하고픈 이들도 꽤 생길 테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스틸 이미지
ⓒ CJ ENM
 
<작품정보>

패스트 라이브즈 Past Lives
2024│미국, 한국│로맨스/멜로/드라마
2024.03.06. 개봉│105분│12세 관람가
감독/각본 셀린 송
주연 그레타 리(노라 문/문나영 역), 유태오(해성 역)
출연 문승아(어린 시절 노라 역), 임승민(어린 시절 해성 역),
존 마가로(아서 역), 최원영(노라 아빠 역), 윤지혜(노라 엄마 역),
장기하(해성 친구 역), 안민영(해성 엄마 역)
제작 A24
배급 CJ E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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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LA비평가협회상 뉴제너레이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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