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자본잠식 업체를 '5대 시행사’로…증권사 부실펀드 줄패소

이병준 2024. 3. 13.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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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랑엔하겐(Langenhagen)의 저먼프로퍼티그룹(구 돌핀트러스트) 건물. 중앙포토


부실 해외부동산 펀드에 투자했다가 손해를 입은 국내 증권사들이 줄패소했다. 13일 증권가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1부(부장 김지혜)는 최근 정보통신공제조합이 SK증권을 상대로 “투자금을 돌려달라”며 제기한 부당이득금 반환 청구 소송에서 정보통신공제조합의 손을 들어주고, SK증권에 50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사단법인인 정보통신공제조합은 지난 2017년 8월, 독일 ‘헤리티지 펀드’를 기초자산으로 발행된 KB증권의 파생결합증권(DLS)을 신탁 형태로 만든 파생상품(DLT)에 50억원을 투자하는 특정금전신탁계약을 SK증권과 체결했다.

독일 현지 시행사인 저먼프로퍼티그룹(GPG)이 독일에서 기념물로 등재된 오래된 건물(헤리티지 건물)을 사들여 주거용으로 바꾼 후 분양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여기에 자금을 빌려주면 시행사 선분양 → 분양대금 회수 → 투자자에게 만기에 상환금 지급으로 이어지게 돼 있었다. KB증권은 DLS 발행자금으로 싱가포르의 ‘반자란 자산운용’이 운용하는 헤리티지 펀드에 투자하고, 헤리티지 펀드는 이 투자금으로 싱가포르에 설립된 특수목적법인(SPV)이 발행한 전환사채를 인수, 현지 차주에게 사업 자금을 대출하는 구조다.

당초 신탁계약 만기는 2019년 9월이었다. 하지만 사업 지체로 대출 원리금 상환이 지연된 데 이어 GPG가 2020년 7월 독일 현지 법원에 파산 신청을 하면서 투자금을 돌려받지 못하게 되자, 공제조합은 2022년 2월 SK증권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SK증권이 잘못된 투자설명을 제공해 착오를 유발했다”면서다.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계약내용의 주요 부분에 착오가 있었던 경우, 법률 행위를 적법하게 취소할 수 있다.

SK증권 측은 재판에서 “현지 실사에 동행해 시행사 본사와 베를린 현장 네 곳을 방문해 사업이 실제 진행되고 있는 걸 확인했다. 당시엔 시행사에 대해 특별한 문제점을 찾기 어려웠고, 투자 목적 달성이 가능할 것이라 예상됐다”며 “시행사가 파산신청을 해 투자 원리금 전액을 환수받기 어려워진 상황은 투자 권유 당시 합리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투자 위험이라 할 수 없다”고 항변했다.


‘상위 4.4%’랬는데…실상은 부실업체


SK 증권. 사진 홈페이지

하지만 재판부는 “SK증권이 잘못된 투자 설명을 제공해 착오를 유발했다고 보는 것이 상당하다”고 지적했다.
법원에 따르면 SK증권은 투자제안서에서 현지 시행사에 대해 ‘독일의 5대 시행사’ ‘독일 상위 4.4%에 드는 기업으로 건전한 재무상태를 보여준다’고 소개했지만, 금융분쟁조정위원회 조사 결과 GPG는 독일 상위 10개 개발사 순위에 포함되지 않을 뿐더러 2015년 이후 재무제표를 공시하지 않아 공시의무 위반 366건으로 현지 법원으로부터 약 65만 유로(약 9억3100만원)의 벌금을 부과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2014년 기준 GPG는 150개 자회사 중 113개가 완전자본잠식 상태였다.

재판부는 2017년 6월 SK증권의 독일 현지 실사를 거론하며 “현지 실사 범위엔 시행사에 관한 문서 실사도 포함돼 있다”며 “시행사의 사업 이력이나 관할 당국으로부터의 인·허가 자료 등을 요구해 검토하는 과정에서 시행사가 독일의 5대 시행사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점에 관해 충분히 알거나 알 수 있었다고 보인다”고 했다.

게다가 SK증권은 해당 신탁계약 투자제안서에서 현지 신용평가사 던앤브래드스트리트(D&B) 보고서를 인용해 시행사의 신용등급 등을 기재했는데, D&B는 종합의견란에 “구체적 수익 창출력을 확인할 수 없어 상거래 및 여신 거래에 있어 상당 수준의 주의가 필요하다”고 경고한 것으로도 확인됐다. 재판부는 ‘글로벌 감정평가법인을 통해 현재 가치 대비 미래 매각 가격이 4~5배 되는 자산에 투자한다’는 투자제안서 내용에 대해서도 “(실제로는) 투자 원금으로 취득하는 독일 현지 부동산 23건 중 21건의 경우 시행사와 특수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 감정평가법인이 단독으로 시장가치 산정을 위한 자문의견서 형식으로 감정평가를 진행했다”고 지적했다.

SK증권 측은 항소한 상태다. SK증권 관계자는 “정보통신공제조합은 판매회사의 설명의무 등이 적용되지 않는 전문투자자임에도 1심 판결은 분쟁조정위원회 결정과 같이 착오취소를 인정해 당사로서는 법원의 결정을 수용하기 어렵다”고 했다. 금융 당국은 헤리티지펀드에 투자한 일반 투자자의 경우 현지 시행사 시행 능력을 직접 검증하기 어렵다는 점 등을 이유로 2022년 투자원금 전액 반환을 결정했었다.


KB증권도 ‘호주 부동산 펀드 사기’ 패소


지난 2022년 11월 독일헤리티지 피해자연대, 금융정의연대, 전국사모펀드 사기피해공대위 관계자들이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연합뉴스

한편 호주 장애인 아파트 임대사업에 투자하는 부실 펀드를 판매했던 KB증권과 JB자산운용 역시 최근 해당 펀드에 각각 500억원을 투자했던 한국투자증권과 ABL생명보험이 “펀드 대금을 돌려달라”며 서울남부지법에 제기한 매매대금 반환 등 청구 소송에서 패소했다. “중대한 투자 위험이 있다는 의심을 일으킬 만한 정황이 발견됐음에도 합리적인 조사 의무를 다하지 않음으로써 투자자들에게 투자 판단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여야 할 투자자 보호 의무를 위반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KB증권과 JB자산운용에 한국투자증권과 ABL생명보험의 미회수 금액의 90%인 60억원을 각각 공동으로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병준 기자 lee.byungjun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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