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동급생과 사랑에 빠진 중년 여자의 진실

김상목 2024. 3. 12.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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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메이 디셈버>

[김상목 기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우리가 너무나 쉽게 읊어대지만 늘 망각해버리는 삶의 지혜 중 하나다. 항상 우리는 타인을 여러 가지 잣대를 동원해 단정해버리곤 한다. 과거엔 학연-지연-혈연 관련 온갖 미주알고주알 호구조사를 통해, 요즘은 하다못해 혈액형이나 MBTI까지 동원해서 말이다. 낯선 타인이 두렵거나 불안하기 때문일 테다. 그렇게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정보를 통해 타인을 규격화하고 선입견을 설정하는 과정을 통해 자기 안의 공포를 불식시키고, 상대를 어떻게 대할지 결정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다. 결국엔 알고 보면 내 안의 불안이 문제인데도 말이다.

그렇게 여러 가지로 포장된 안일함과 위선은 세상의 이면과 진실을 드러내는 데 더없이 유용한 재료가 되어준다. 거대한 사건이나 사회적 쟁점을 펼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술가들은 종종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일상, 혹은 대개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돼)'로 우리가 치부해버리는 현상에 대한 면도날 같은 해부와 색다른 관점의 접근으로 익숙한 것들을 재해석하는 데 매혹을 느낀다.

심심해 보이지만 천천히 음미할수록 맛이 각인되는 평양냉면 같은 작업은 오랫동안 뇌리에 새겨지게 마련이다. 물론 <파 프롬 헤븐>과 <캐롤> 등의 작품으로 예술영화 애호가들에게 자신만의 인장을 깊숙이 각인시킨 토드 헤인즈의 신작 <메이 디셈버> 역시 우리들 고정관념의 이면을 헤집어놓는 생채기 같은 작업이다.

배역 캐릭터 연구를 위해 당사자를 찾아온 배우
 
▲ "메이 디셈버"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판씨네마㈜
 
새로운 영화 촬영에 들어가기 직전인 배우 '엘리자베스'(나탈리 포트만)가 조지아주 한적한 교외에 자리한 마을 사바나를 찾는다. 신작의 배경이 된 어떤 사건의 당사자들과 만나 한동안 지내면서 배역에 대한 이해를 높이려는 목적이다. 당사자들의 허락을 사전에 받아둔 상태이지만 긴장감이 감돈다. 그가 연기하려는 배역이 20여 년 전 뉴욕타임스 1면에 실릴 정도로 전미 대륙을 충격에 빠뜨린 사건의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가 도착한 집에선 한창 (미국 중산층 전매특허의 풍경이라 할) 테라스 파티 준비가 한창이다. 그를 반갑게 맞이한 건 '그레이시'(줄리안 무어)와 '조'(찰스 멜튼) 부부다. 이미 그의 방문은 예정되어 있었던 데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 TV 드라마를 통해 스타가 된 엘리자베스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는 아닐지언정 격에 맞는 대접을 받는다. 그는 그레이시와 조 부부에게 영화를 위해 협조해 줘서 감사하다며 사의를 표한다. 그리고 곧바로 배역 준비를 위한 관찰과 질문을 시작한다.

부부는 덤덤하게 엘리자베스의 호기심에 답하며 일상을 이어간다. 그들 부부의 일상은 별 특별할 것도 없이 화목해 보인다. 세 자녀 중 첫째는 대학 재학 중이고, 쌍둥이인 둘째와 셋째는 이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 예정이다. 파티엔 이웃들도 격의 없이 모여든다. 겉으로 보기엔 남부러울 것 없는 만사형통의 중산층 가족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엘리자베스가 굳이 먼 길을 찾아올 이유도, 그 전에 영화화할 소재로서의 흥미도 없을 테다.

그레이스와 조 부부는 연상연하 커플이다. 문제는 남편과 아내가 '23년' 차이란 것이다. 그런데 남편 '조'는 엘리자베스와 동갑인 36살이다. 성인이 된 자녀가 셋이나 되는데 말이다. 이쯤 되면 뒷골이 저며 올 관객이 꽤 나올 상황이다. 이들 부부가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 남편은 13살이던 것이다. 즉 미성년자와 성인의 로맨스였고, 미국 실정법상 아내인 그레이스는 아무리 쌍방 합의를 거쳤다 해도 강간죄를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의 '사랑'은 결과적으로 그레이스가 전과자가 되게 만든 것은 물론, 첫 번째 아이는 옥중 출산으로 태어나는 운명을 겪게 했다. 그것도 20여 년 전에 일어난 사건이다. 게다가 출소 후 성인이 된 '조'와 끝내 결혼해 두 명의 자녀를 더 낳고 지금까지 부부로 지내온 것이다. 이만하면 영화 소재로 언제 달려들어도 충분할 지경이다.

그들 각자의 시각과 입장이 차례로 관객 앞에 펼쳐지다
 
▲ "메이 디셈버"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판씨네마㈜
 
엘리자베스는 부부는 물론 주변 관련자들에게 궁금한 점을 묻고 관찰을 이어간다. 무엇보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재연해야 할 그레이스와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그리고 배역을 위한 심리적 준비로 이들 부부의 일상과 함께 그들이 해로하게 된 '금단의 사랑'을 이해해야만 한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쉽사리 아들의 동급생이던 13살 소년과 사랑에 빠져든 중년 주부의 심리를 수긍하지 못하고 탐색 강도를 올리기 시작한다. 대체 23년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해 엘리자베스는 마치 탐정이 된 것처럼 조사를 거듭하고 도발적인 질의를 던진다. 영화 제작을 위한 협조적 관계로 출발한 세 사람의 관계는 조금씩 균열에 휩싸인다.

어느 정도 안면을 쌓았다고 판단한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스에게 민감한 질문을 이어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레이스는 선을 긋는다. 영화에서 다루는 시간, 즉 자신과 남편 조가 미디어에 집중포화를 맞던 초반 몇 년의 이야기만 필요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 외의, 정확히는 이후의 삶에 대한 세밀한 문답은 사전에 허용한 적도, 굳이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라며 '공식적'인 것 말고는 그 이상은 도무지 꺼내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그 정도로 만족할 리 없다. 이제 그는 주변 관련자들을 수소문하기 시작한다.

그레이스는 조와 만나기 전 이미 자녀를 여럿 둔 유부녀였다. 당연히 남편이 있었을 것. 엘리자베스는 졸지에 아들의 동급생에게 아내를 빼앗긴 그 남편, '톰'과 만난다. 담담한 표정으로 의외로 협조적으로 질문에 답하는 톰이지만 20여 년 전의 충격은 여전히 그에게 그림자를 드리운다. 우연히 만난 그레이스의 아들 '조지' 역시 자신은 그 사건의 후유증을 여전히 갖고 있다며 엘리자베스에게 말한다. 상처가 여전히 아물지 않았지만, 비록 데면데면하긴 해도 그레이스와 예전 가족들은 간간이 교류하고 있음도 확인된다.

당시 소송을 담당했던 변호사도 만난다. 변호사라는 직업 특성상, 그는 자신이 온전히 동조하거나 이해하지 않더라도 의뢰인의 권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런 복잡한 속내 때문에 변호사는 엘리자베스에게 모호한 일단의 이면을 끄집어내 들려준다. 이상할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과거를 회상하는 그들이지만, '공식적'으로 알고 있던 사건 당시 정황과 기묘하게 엇박자를 드러내는 증언들은 엘리자베스가 전제하던 것들을 허물어뜨리기 시작한다.

그레이스는 과거의 자신을 영화에서 연기할 엘리자베스에게 일정하게 벽을 치면서도 친절하게 대한다. 자신의 어린 시절 일화나 엄격했던 가정환경과 남자 형제들에 둘러싸인 배경도 술술 털어놓는다. 전남편이나 의절하다시피 한 큰아들, 그리고 이웃들을 엘리자베스가 차례로 '건드리는' 걸 알면서도 이상할 만큼 침착하고 빈틈이 없다.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철벽'을 치는 그레이스의 진실을 반드시 파헤치고 소화하겠노라 호승심을 불태우는 듯 보인다. 마침내 공략 대상을 바꾼 그는 동갑내기인 남편 조를 목표로 선을 넘기 시작한다. 과연 엘리자베스의 진의는 무엇이고, 그는 배역을 온전히 소화할 수 있게 될까?

당연하고 익숙한 것들을 의심하라 권하는 이야기
 
▲ "메이 디셈버"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판씨네마㈜
 
영화의 제목인 <메이 디셈버>는 12달 중 특정한 2달을 조합한 구성이다. 'May'는 5월, 'December'는 12월이다. 한국어 번역으로는 감도가 떨어지지만, 영어 원문으로 보면 뭔가 동떨어진 느낌이 확 든다. 실제로 두 달은 각각 만발한 봄과 짙어가는 겨울을 상징하는 시기이다. 이 영어 관용구는 곧 나이 격차가 많은 커플을 가리킨다. '봄과 겨울 같은 관계'란 의미를 뜻하는 셈이다. 누가 봐도 그레이스와 조 커플을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세간의 관심은 무엇보다 그들의 나이 차이에서 기인한다. 36살 중산층 가정의 청소년 자녀를 둔 성인 여성 + 여성의 아들과 같은 학교에 다니는 10대 초반 소년이 단순한 감정 교감을 넘어 육체관계를 맺고 끝내 세상의 비난과 사법당국의 처벌을 감수하면서 결혼해 20여 년을 함께 한 상황은 온갖 구설수를 양산해 왔다. 지금은 시골 마을에서 평범하게 살고 있지만, 과장 좀 보태면 모든 미국인이 이 사건을 기억할 정도다. 아마 세상의 편견은 두 가지로 구분될 테다. 첫 번째는 애욕에 눈이 돌아 아들 친구를 유혹해 성적 관계를 맺은, 멀쩡한 가정을 내팽개치고 바람난 여성의 성공적인 '가스라이팅'과 그 때문에 파괴된 '정상가족'의 비극으로 해당 사건과 당사자를 규정하는 태도일 것이다. 하지만 남편 조는 그 당시 그레이스를 유혹한 건 정작 자신이었다고 말한다.

두 번째는 좀 더 복잡한 이야기다. 둘은 나이의 문제를 초월해 순수한 사랑을 했고, 그 결과 여러 불이익을 감내했으니 이제는 비록 곡절은 많았지만 평범하게 행복을 좇는 부부로 그냥 인정하면 된다는 낭만적인 시각으로 기울어지는 입장이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그 전제에 의구심을 품은 것 같다. 과연 온전히 두 사람이 20여 년 전 순수한 사랑으로 그 사단을 감행한 것일까? 영화는 엘리자베스가 던진 돌이 평온해 보이던 그레이스와 조 커플의 수면에 파문을 일으키는 과정을 마치 각자의 입장을 공평하게 대변하듯 분배하며 순차적으로 전시한다. 그레이스는 겉보기엔 씩씩하고 차분하게 삶을 영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베이커리를 꾸리고, 직접 사냥을 즐기는 등 자기관리에 철저해 보인다. 찔러도 피도 안 나올 것처럼 효과적으로 엘리자베스의 의도성 질문을 방어하고, 가족관계도 주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볼 수 없되, 관객은 확인 가능한 찰나에서 그레이스가 겉보기엔 아주 효과적으로 위장술을 펼친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그레이스는 남편 조에겐 종종 불안한 기색을 내비친다. 남들이 보기엔 정서불안으로 보일 만큼 사소한 일에도 흔들리고 고통에 시달린다. 자기 운명을 당당하게 뒤바꾼 애정행각의 당사자란 타이틀 뒤에는 연약한 내면이 숨겨져 있다. 주변 인물들이 엘리자베스에게 들려주는 은밀한 비밀 또한 그런 반전을 뒷받침한다. 심지어 아들 조는 엘리자베스가 듣자마자 충격에 빠질 정도로 '센' 일화를 언급한다. 듣고 나면 그래서 그레이스가 그런 일탈에 빠지는구나 할 만큼 개연성이 성립된다. 하지만 그 일화의 진위는 누구도 당사자가 아니라면 확인 불가능한 경우에 속한다.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스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그저 내용을 하나 더 알고 싶은 게 아니라 방송 드라마 출연으로 어느 정도 인지도를 쌓긴 했지만, 자신이 원했던 연기가 아니라 틀에 박힌 캐릭터로 그쳤다고 규정한 그는 정말 자신의 연기 인생 전기가 될 역할로 이번 영화를 소화하고 싶다. 그런 의지 때문인지 그는 제작사가 마련한 당사자들과의 교류 조건을 초과해 밀착하려 든다.

물리적 시간이나 제작환경 여유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조금이라도 더 이 가족과 오래 붙어있으려는 엘리자베스의 집착은 단지 연기를 위한 것인지 관객을 헷갈리게 만들기 충분하다. 어느 순간부터 엘리자베스는 그레이스가 되려는 것처럼 다가오기 시작한다. 그레이스와 같은 화장을 하고, 거북해하는 주민을 설득해 실제로 처음 이 부부의 정사가 발각된 펫숍 창고를 안내받아 실제로 성행위가 일어난 장소에서 자위행위와 함께 20여 년 전 그레이스를 홀로 재연해본다. 그레이스가 세간에서 허용하는 '선'을 넘은 것처럼 엘리자베스 역시 연기를 위한 사전 조사의 '선'을 넘어버린 지 오래다.

어떤 관객들은 마치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스의 위치를 침범하려는 것처럼 여길 테다. 연하의 남편이자 자신과 동갑내기인 조를 향한 엘리자베스의 관심은 자신이 연기에서 만나게 될 가상의 상대역을 향한 '그림자 권투'의 성격과 함께, 조에게는 다른 인생을 살 기회 혹은 자격이 있다며 자신이 마치 그를 구원의 천사처럼 갱생시키겠다는 욕망이 동시에 발현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런 엘리자베스의 태도는 마치 유혹하는 것처럼 성실한 남편이자 아빠로서 어린 나이에 안정된 가족을 지탱해온 조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흔들기 충분할 만큼 강렬하게 다가온다.

아름다운 나비가 탄생하기까지 인고의 과정 같은 인생의 무게
 
▲ "메이 디셈버"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판씨네마㈜
 
물론 겉으로는 <메이 디셈버>의 아슬아슬 위태로운 이야기는 그저 용두사미로 그친다. 그레이스와 조 부부는 오랜만에 대학에서 돌아온 큰딸과 재회하고, 둘째와 셋째는 별 탈 없이 졸업식을 치른다. 부부는 대견한 표정으로 함께 졸업식 행사에 참석하고, 겉으로는 친밀하게 예전 가족들과도 인사를 나눈다. 영화 내내 균열이 발생하긴 했지만, 그들의 지난 20여 년 동안 쌓아온 신뢰와 기반이 허물어질 정도의 위기는 아니다. 겉보기엔 만사형통의 위기탈출 마무리다. 하지만 토드 헤인즈 감독의 장기, 극도로 절제된 묘사이지만 분명히 우리가 쉽게 포착하지 못하고 지나치곤 하는 순간들의 함의를 극대화하고 그를 통해 세상의 위선과 우리들 자신의 허위를 해부하듯 끄집어내는 재주는 많은 것을 돌아보게 만들기 차고 넘칠 만큼 충분하다.

남편인 조는 북미권의 나비를 상징하는 종, '제왕나비'를 공들여 기른다. 취약한 종을 보전하기 위해 거실에서 그는 애벌레부터 번데기를 거쳐 성체가 되기까지 정성스럽게 (마치 지난 세월 어린 아빠로서 복무한 것처럼) 유충을 보살피고 나비가 되면 기꺼이 떠나보내길 거듭해 왔다. 아내 그레이스가 벌레를 꺼림칙하게 여기긴 해도 이제는 이골이 난 것인지 적응된 것처럼 '티키타카'할 정도다. 그의 나비를 향한 정성은 (엘리자베스로 상징되듯) 같은 나이의 평범한 또래들과 동떨어진 본인의 지난 시간에 대한 보상심리 혹은 출구장치로 여겨진다. 나비에 대한 그의 태도는 또 다른 자식을 향한 것에 비견될 정도로 묘사되기에 그런 추측에 설득력을 더한다.

게다가 이 제왕나비는 애벌레 시절에 독을 지니기 시작한다. 자녀, 그리고 가족이란 것이 내가 성실히 대한다 해서 기대치를 충족시켜주진 않는 것 마냥, 나비를 기르는 데엔 섬세함과 집중력이 요구되지만, 그런 수고가 온전히 결과로 보답받지 못하게 마련이다. 고도의 은유이자 상징적 행위인 셈이다. 거기에다 얼굴을 알 수 없는 동호회 회원과 조가 나누는 온라인 채팅 내용은 바깥에서 공개하기 힘든 조의 속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가 지난 20여 년 동안 사랑하는 연인에게도 공유하기 힘들었던 고뇌와 시련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레이스는 조를 사랑하지만, 종종 그의 태도는 20여 년 전 애완동물용품점 매니저와 아르바이트로 처음 만났던 관계에서 정지된 것과 같이 느껴진다. 하지만 조는 이미 그때의 성적 호기심 충만한 소년이 아님에도 말이다. 그런 내면의 갈등을 엘리자베스와의 긴장으로 비로소 표출하게 된 조의 캐릭터는 복병으로 강렬하게 관객의 뇌리에 새겨질 법하다.

어린 남편을 때로는 통제하려, 때로는 매달리고자 하는 그레이스의 상태는 오랜 훈련과 노력으로 뭇 사람들에겐 은폐되고 있지만 가까운 이들은 모두 간파하고 있는 상태다. 엄격한 군인가정의 외동딸이자 처음 만난 연상 남편과 시골 마을에서 안정 그 자체였던 (그래서 고도로 권태로웠던) 사건 이전의 삶이 그의 파격적 행보를 이해하는데 일정하게 역할을 소화하지만, 그 또한, 결국 외부의 추정에 불과한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그레이스에 대해 탐정으로서 캐릭터 파악을 완료했다고 자만하는 그때, 그레이스가 카운터 펀치 격으로 엘리자베스에게 반격의 한 마디를 날린다. 그 순간 세상 사람들은 모르는 진실에 자기만 도달했다며 득의양양하던 엘리자베스의 또 다른 편견은 거울이 박살 나듯 붕괴를 당하고 만다. 하지만 그 또한 그레이스의 고도의 방패인지 누구도 알 도리는 없다. 결국 그레이스의 진실은 물음표로 남는다.

배우와 연기, 카메라의 본질적 태도를 질문하는 역작의 탄생
 
▲ "메이 디셈버"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판씨네마㈜
 
엘리자베스의 기이한 욕망은 결국 배역에 대한 온전한 소화를 넘어 동일시 단계에 도달하려는 위험한 갈망이다. '선'을 넘으려는 그런 욕망은 역을 맡은 배우의 다른 대표작, <블랙 스완>에서 보여주던 캐릭터를 연상케 만든다. 그런 판단은 이 영화 전체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인, 그레이스가 엘리자베스에게 자신이 하던 것처럼 화장해주는 거울 컷으로 이어진다.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고전 <페르소나>에서 배우와 간호사가 처했던 상황을 온전하게 재현한 해당 장면은 실제로 존재하는 자와 연기하는 자의 경계를 뒤섞고 관계성을 고찰하게 만든다.

그런 심리적 상황에 더해 연기란 무엇인가를 놓고 엘리자베스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충돌은 그레이스와 조 부부의 딸을 포함한 고교생들에게 배우론을 설파하는 장면에서도 엿볼 수 있다. 본인 자신 또한 정답을 갖지 못한 상태인데도 그는 피해와 상처를 입은 이들에게 과도하게 개입하는 것은 물론, 진실을 제대로 전하겠다는 이유로 당사자가 겪을지 모를 상처와 균열을 외면한 채 자신이 꾀하는 바를 얻으려 한다. 이는 카메라가 피사체를 대하는 본질적 측면, '저격'의 태도다. 또는 진실을 전한다는 의도로 '약탈'의 자세를 정당화하는 심리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품었던 욕망을 노력 끝에 성취한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엘리자베스는 원점으로 회귀한 채 촬영에 들어가고, 주화입마에 빠진 것처럼 인상적인 마무리를 선보인다. 영화가 끝나는 순간, 이제 주인공들은 어느 한 명 과거로 온전히 돌아갈 순 없을 테다.

하지만 손익분기점을 따져보자면, 세상의 돌팔매를 견디며 공동체를 건설하고 건사해온 그레이스와 조 커플은 위기를 잘 넘긴 셈이다. 이들은 영화가 대박 흥행을 치건 아니건 그들이 선택한 삶을 이어나갈 테다. 엘리자베스 역시 배우로서의 야망을 자신의 노력으로 일정 부분 세상의 호평으로 쟁취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들 내면의 평화와 만족은 과연 어떨까. 관객 각자가 주인공들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방향과 개별의 세계관으로 판단은 여러 갈래로 나뉠 테지만, 감독의 입장은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다. 사랑과 연민 대 재능과 욕망의 구도라면 답은 분명하지 않는가.

토드 헤인즈 감독은 자신의 작품세계에 새로운 연작을 추가했다. 익숙한 스타일이되, 답습과 반복에 그치지 않는 건 작가로서의 재능과 노력이 잘 어우러진 증명일 테다. 무려 5편째 함께한, '페르소나'라 해도 어색하지 않을 '그레이스' 역 줄리안 무어의 검증 끝난 지 오래인 연기력에 불꽃 튀는 경합을 벌이기 부족하지 않은 '엘리자베스' 역 나탈리 포트만의 조합이기에 가능한 수면 아래 격랑이 영화 내내 치열함의 극을 달린다.

하지만 이 둘만으로는 관객이 지쳐버릴 수 있다. 이 둘의 격돌을 이끄는 또 다른 전장이자, 그 자체로 제3의 주역으로 모자람이 없는 '조' 역의 찰스 멘튼은 '발견'이라 해도 무방해 보인다. 영화 속 캐릭터처럼 실제 한국계 혈통의 이 새로운 얼굴은 반드시 기억해둬야 할 배우이다. 언뜻 심심해 보이지만 마치 무림 고수들의 대결이 한 합으로 결착 나기 전, 며칠이고 우뚝 서 있기만 한 것처럼 극도로 정제된 작업을 통해 비록 감당하기 힘든 소용돌이일망정, 낯설고 새로운 영화를 목격할 기회다.

<작품정보>

메이 디셈버 May December
2023│미국│드라마
2024.03.13. 개봉 │117분│청소년관람불가
감독 토드 헤인즈
출연 나탈리 포트만('엘리자베스' 배리 역), 줄리안 무어('그레이시' 에서턴-유 역),
찰스 멜튼('조' 유 역)
각본 새미 버치, 알렉스 메카닉
제작 나탈리 포트만
수입/배급 판씨네마㈜

2023 76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경쟁
2024 96회 미국아카데미시상식 각본상 후보

미국영화연구소 AFI 올해의 영화상
고담어워즈 최우수 연상(찰스 멜튼)
크리틱스초이스어워즈 주목할만한 연기상(찰스 멜튼)
필름인디펜던트스피릿 신인각본상
전미비평가협회 남우조연상(찰스 멜튼), 각본상
뉴욕비평가협회 남우조연상(찰스 멜튼), 각본상
시카고비평가협회 남우조연상(찰스 멜튼), 각본상, 신인 배우상(찰스 멜튼)
플로리다비평가협회 감독상, 남우조연상(찰스 멜튼)
워싱턴DC비평가협회 남우조연상(찰스 멜튼)
뉴욕온라인비평가협회 올해의 영화상, 주목할만한 연기상(찰스 멜튼)
조지아비평가협회 특별 작품상
보스턴온라인비평가협회 남우조연상(찰스 멜튼), 각본상
네바다비평가협회 여우조연상(줄리안 무어)
필라델피아비평가협회 주목할만한 연기상(찰스 멜튼)
여성영화온라인비평가협회 남우조연상, 주목할만한 연기상(찰스 멜튼)
그레이터웨스턴뉴욕비평가협회 남우조연상, 주목할만한 연기상(찰스 멜튼)
디스커싱필름비평가협회 남우조연상, 각본상, 주목할만한 연기상(찰스 멜튼)
시애틀비평가협회 남우조연상(찰스 멜튼)
골드리스트어워즈 남우조연상(찰스 멜튼)
카프리할리우드국제영화제 신인 배우상(찰스 멜튼)
산타바바라영화제 비르투오소상(찰스 멜튼)
밀밸리국제영화제 공로상
클레어국제영화제 감독상
미들버그국제영화제 감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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