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의 선각자요, 선비의 본보기며 광복투쟁의 등불
[박도 기자]
▲ 왕산 허위 유허비 |
ⓒ 박도 |
왕산 허위 유허비
"겨레의 선각자요, 선비의 본보기며 광복투쟁의 등불"
왕산(旺山) 허위(許蔿) 선생은 1855년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동에서 태어났다. 1896년 왜적은 날로 모진 이빨을 드러내 우리의 주권을 앗아가니 선생은 책을 덮고 선비의 매운 서슬을 떨쳤다.
그해 3월, 격문을 사방에 날려 의병을 일으키고 김천을 거쳐 서울을 향해 진격하였다. 그러나 의병의 깃발이 충청도 진천 땅에 이르렀을 때, 뜻밖에도 해산하라는 고종의 명을 받게 되어 눈물을 머금고 군사를 흩었다.
1899년 왕산 허위는 평리원 재판장 의정부 참찬 등의 관직을 지내며 도도한 탁류 속의 한 가닥 맑은 샘으로 넘어져 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밝고 넓은 경륜을 펼쳤다. 그러나 기둥 하나로 쓰러져가는 나라를 받치기에는 너무 기울어졌다. 왜적의 침략은 한층 심해지고 반역의 무리들이 더욱 날뛰니 다시 격문을 펴 그들을 꾸짖다가 왜병에게 잡히어 넉 달의 옥고를 치른 뒤 벼슬을 내던지니 1905년이다.
그 후 선생은 경상, 충청, 전라, 세 땅이 맞닿는 삼도봉 아래 숨어서 각도의 지사들과 연락하며 새로운 무장 투쟁의 길을 찾았다. 1907년 나라의 심장부인 경기에서 두 번째 깃발을 들어 양주, 포천, 강화 등지를 달리며 적과 맞서 싸웠고, 온 나라에 흩어져 있는 의병들을 묶어 연합 진용을 만들고 선생은 그 군사장이 되었다.
적 침략의 거점인 통감부를 무찌르고 수도를 탈환하여 왜적의 세력을 이 땅에서 몰아내는 작전으로 서울을 향해 진격하였다. 그러나 다른 의병들이 약속한 시간에 닿지 못하자 선생이 몸소 300여 명의 결사대만 거느리고 동대문 밖(현 망우리)까지 쳐들어가 고군분투하다가 패퇴하였으니 나라의 아픔이요, 역사의 슬픔이다.
1908년 경기도 연천군 유동에서 왜병에게 잡히니 하늘은 정녕 이 나라를 버렸다는 말인가! 그해 10월 21일 54세를 일기로 서대문 옥에서 기어이 순국하고 말았다. 선생은 겨레의 선각자요, 선비의 본보기며 광복 투쟁의 등불이요, 민족정기의 수호자다.
그 높은 뜻 금오산에 솟구치고
그 장한 길 낙동강에 굽이쳐
길이길이 이 땅에 푸르리라
▲ 왕산기념관 개관식날 세계 각처에서 고향을 찾은 후손들 |
ⓒ 박도 |
세계 유랑민이 된 왕산 유족들
고향을 지키는 허호 선배의 안내로 임은동 왕산 허위의 생가 터를 들렀다. 왕산 생가는 6·25전란으로 폐허가 된 채, 대나무 몇 그루만 자라고 있었다. 1915년 일가친척 및 유족들은 일제 등살에 살 수가 없어 일가 10여 가구가 들이 단봇짐을 지고 만주로 망명했다. 내거 고향 임은동을 방문한 그 무렵(2000년)에는 허호씨 가족만이 고향을 지키고 있었다.
만주로 망명했던 왕산 유족들은 이후 러시아 · 키르키즈탄 · 중국 · 북한 · 미국 등지로 뿔뿔이 흩어졌다. 미국에 거주하는 왕산 후손 허도성 목사가 일시 귀국하여 서울에서 만났더니 구미 임은 허씨 후손들이 그새 '일리야', '부로코피', '슈라', '나타샤'가 되었고, 당신 후손마저도 머잖아 '로버트 허', '벤 허'가 될 판이라고 눈시울을 적셨다.
고향에서 서울로 돌아온 뒤. 나는 당시 김관용 구미시장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당시는 서울 상암동과 구미 상모동에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을 짓는다고 한창일 때인데, 그에 앞서 왕산 생가 복원부터 먼저 하는 게 순서가 아니냐는 호소의 글이었다.
그 얼마 후 허호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당시 구미시장의 용단으로 왕산 허위기념사업회를 구성하여 사업추진 계획서가 만들어진 바, 구미로 와서 조언을 해 달라는 초청이었다.
▲ 북만주 경안현 현지에 있는 허형식 장군 희생비 |
ⓒ 장세윤 (전 동북아 역사재단 수석 연구위원) |
임은 허씨 두 항일 열사의 순국 장면
1908년, 왕산 허위 선생은 구한말 의병장으로 일본 통감부를 깨트리고자 의병 300명을 이끌고 서울 동대문 밖 10여 킬로미터까지 진출하여 일본군과 접전하였다. 하지만, 구식 무기로 신식 무기를 당해내지 못해 경기도 연천으로 물러났다. 이 전투가 대규모 국내 항일 의병전의 가장 치열한 싸움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뒤 이완용(李完用)이 경기도 연천으로 사람을 보내 관찰사나 내무대신 벼슬로 왕산 선생을 회유했다. 이에 왕산 선생은 심부름 온 이를 크게 꾸짖어 물리치고 절치부심하며 후일을 기약했다. 하지만, 왕산은 은거 생활 중 곧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일제가 서대문형무소를 만든 직후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왕산 선생의 옥사 이후 유족들은 고향에서 일본 순사와 밀정들의 등쌀에 견딜 수 없었다. 결국 1915년에 구미에 살던 임은동의 허씨 일족들은 만주로 야반도주하다시피 망명길에 올랐다.
이런 항일 집안에서 자란 왕산 집안 조카 허형식은 후일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에 선봉장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참모장이던 허형식은 안타깝게도 현지 소부대 활동 중이던 1942년 8월 3일 새벽, 북만주 흑룡강성 경안현(慶安縣) 청봉령(靑峰嶺) 소릉하(召陵河) 계곡에서 일제 만주국 경찰 토벌대와 격전 중에 장렬히 전사했다.
그는 일제 토벌대의 총에 맞아 움직일 수 없게 되자 당신 곁을 지키던 부하에게 퇴각 명령을 내렸다. 당신은 홀로 큰 나무둥치에 기대어 퇴각하는 부하를 끝까지 엄호한 후 적의 총탄에 맞아 마침내 장렬하게 숨을 거뒀다.
▲ 구미 임은동 소재 왕산기념관 |
ⓒ 박도 |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월간 <순국> 2024년 3월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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