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을 기획하고 결의를 다진 곳

이영천 2024. 3. 9.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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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발통문이 만들어진 고부면 신중리 대뫼 마을을 찾아

2024년이 동학혁명 130주년이다. 처음엔 '반역'에서 동학란으로, 또 그사이 동학농민전쟁이었다가 백 주년에서야 비로소 ‘동학농민혁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름 하나 바꾸는데 백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동학혁명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혁명에 참여했던 오지영 선생이 지은 <동학사> 한 권을 들고 전적지를 찾아다니며, 그 답의 실마리나마 찾아보려 한다. 우리를 되돌아보는 기행이 되었으면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사발통문(沙鉢通文)이 만들어진 곳은 어디일까? 그래서인지, 이 마을에 갈 때마다 늘 발걸음이 가볍다. 혁명을 기획, 설계하고 결의를 다졌다니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인가? 고부에서 흥덕 나가는 큰길에서 샛길로 조금 꺾어들면 닿는 신중리 대뫼 마을이다.

마을 한가운데 녹두회관을 먼저 찾는다. 회관 마당에 부조로 세워진 '무명 동학농민군 위령탑'을 보고 싶어서다. 이 위령탑을 볼 때마다 젊은 나를 다시 만나 새로운 힘을 얻는다. 그래서 걸음이 저절로 이곳으로 향한다.
 
▲ 무명 동학농민군 위령탑 대뫼 마을의 녹두회관 마당에 세워진 위령탑. 1987년 6월 최루탄을 맞고 쓰러지는 이한열 모습을 형상화 했다.
ⓒ 이영천
 
부조는 1987년 6월 9일 직격 최루탄을 맞고 쓰러지는 모습의 이한열 형상화다. 끝내 갚을 수 없는 마음의 빚을 그에게 졌다. 최근 읽은 소설도 한몫했다. 그때 그곳에서 잃어버린 이한열의 운동화 한 짝, 남아있는 다른 그것을 묘사한 <L의 운동화>(작가 김숨 소설)가 뇌리에 남아서다. 이번 걸음 역시 그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어보려 위령탑을 먼저 마주한다.

마을은 혁명이 설계된 무대다. 그 기획에 따라 동학혁명이 진행되었고, 주체는 이름 없는 농민들이었다. 목숨 바쳐 싸운 그들에게 이 조형물이 어떤 위로가 되겠는가만은, 이 또한 기억을 위한 장치다.

기억은 그들이 닦아 세운 토대를 발판으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다짐이다. 다짐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실천을 담보하는 것이어야 함은 물론이다. 'L의 운동화'를 기억하듯, 죽음으로 산화한 이름 없는 동학농민군에 대한 기억도 현재진행형이어야 하는 이유다.

혁명 모의

대뫼엔 잊지 말아야 할 곳이 있다. 바로 혁명을 설계하고 그 약속으로 사발통문을 작성한 집이다. 녹두회관에서 잠깐 거리다. 이곳에서 고부 봉기를 비롯해 동학혁명을 주도한 인물들이 모여 비장한 각오로 혁명을 결의했다니, 얼마나 뜻깊은 일인가?

마을이 기댄 능선을 따라 동서로 뻗은 길 바로 아래 제법 규모 있는 한옥이다. 큰길에서 아래로 뻗어 내린 좁은 길을 끼고, 정남향으로 정갈하게 앉아있다. 집 담벼락엔 박홍규 화백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서사와 서정을 담은 그림들이 혁명 과정을 축약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 사발통문이 작성된 집 고부 신중리 대뫼 마을의 사발통문이 만들어진 집. 당시 송두호의 가옥으로 알려져 있다.
ⓒ 이영천
 
집 앞에 서서, 덜컥 대문을 열어 버렸다. 익숙한 듯 주인께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집을 지키는 강아지 소리가 제법 맵차다. 이런 무례라니, 고개 숙여 인사하고 얼른 다시 닫았다. 나처럼 예의 없는 얼마나 많은 이들이 대문을 잡아당겼을까? 규모를 갖춘 한옥이 정갈한 격식을 갖추고 있다.
집을 나서 마을 동쪽 언덕으로 향한다. 그곳에 '동학농민혁명 모의 탑'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모의'라는 다소 부정적인 어감에도 불구하고, 장대한 그 뜻마저 폄훼되는 건 절대 아니다.
 
▲ 동학혁명모의탑 대뫼 마을 동쪽 구릉에 세워진 모의탑.
ⓒ 이영천
 
한때 사발통문에 서명한 인물의 진위로 주민 사이에 작은 갈등이 있기도 했다. 또한 사발통문의 진본을 모의 탑에 안치했다가 후손이 어디론가 다시 가져가 버렸다고 하는 풍문이 떠도는 등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함에도 대뫼는 동학혁명과 관련된 여타 지역보다 더 큰 자부심을 내보이고 있음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혹 앙금이 남았다면, 어서 빨리 씻기길 바란다.

대뫼가 사발통문 작성지로 선택된 건 전봉준과 뜻을 같이하는 송두호 집안이 대를 이어 살아 온 마을이고, 통문이라는 성격을 극대화할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며, 읍내와 근접해 있다는 점 등이 충분히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사발통문

만석보 수탈을 계기로 이제 고부 농민들이 관(官)을 응징할 기회를 엿보기 시작한다. 추수가 끝나고 농한기에 접어든 1893년 11월, 전봉준을 중심으로 혁명을 기획하기에 이른다. 조선 왕조 내내 지금까지 일어났던 민란들과는 차원이 다른 구도다. 혁명의 대의명분과 행동강령은 물론 지향하는 목표를 분명하게 제시한, 철저하게 의도된 실천 계획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군수를 잡아서 목을 베고, 군기창과 화약고 무기로 농민군을 조직해 전주성을 함락시켜 전라감영을 접수하며, 이어 서울을 점령해 새로운 나라와 권력을 수립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사발통문엔 우리를 침탈하던 외세에 대한 언급은 빠져 있다. 자주 국가의 길을 가로막는 근원을 부패한 내부권력으로 보았음을 읽을 수 있다.
 
▲ 사발통문 1893년 11월 대뫼 마을 송두호 집에서 만든 사발통문. 혁명의 대의명분과 행동강령을 적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 이영천(동학농민혁명기념관 촬영)
 
대뫼의 그 집, 결기 가득했을 그 밤의 분위기를 소설 속 전봉준의 말로 가늠해 본다.
 
"이 통문에 이름을 적어 넣는다는 것은, 나는 이렇게 죽기로 각오했다고 세상에 알리는 것이오. 다시 말하거니와 우리는 군수 하나쯤 짚둥우리나 태워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군수 목을 매달아 죽이고 무기고를 점령해서 무장을 한 다음, 전주 감영을 들이치고 그 여세로 서울로 쳐들어가 조정을 뒤집어엎습니다. 글자 그대로 역몹니다. 나 혼자만이 죽고 마는 것이 아니고 내 가족과 외족·처족까지 삼족이 멸하는 멸문지화를 당하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말합니다. 이름을 적을 때는 잘 생각해서 후회 없도록 하시오."
전봉준의 말에 좌중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굳어졌다. (녹두장군. 송기숙. 창작과비평사. 1990. 제4권 p364 인용)
 
고부 봉기, 나아가 동학혁명은 이미 오래전부터 전봉준이 구상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교조신원운동 시기 들끓는 백성의 열의를 확인하고, 성공 가능성을 확신했음이 분명하다. 이를 다짐하는 표식으로 작성하여 널리 알리고자 한 게 다름 아닌 '사발통문'이다.
 
▲ 사발통문 거사도 대뫼 마을 사발통문이 만들어진 집 담벼락에 그려진 박홍규 화백의 거사도.
ⓒ 이영천
 
사발통문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 서명한 방식을 두고 흔히 '주동자 색출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말을 한다. 과연 그럴까? 통문에 서명한 모두가 주동자다. 누군들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오히려 참여한 사람 모두가 평등을 추구한 건 아닐까. 상하좌우가 없는 대동 세상을 염원한 후천개벽이 사발통문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고 나는 본다.

전봉준이 구상한 나라

움튼 하나의 사상이 일정한 시간 동안 응축되어 사회 일반에 영향을 미치면 미세한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런 변화들이 모이고 쌓여 거대한 힘으로 나타날 때쯤이면 거스를 수 없는 폭풍이 된다. 혁명이다. 이를 끌고 가는 힘이 눈에 보이지 않는 사상이다.

실체화 한 사상이 세상을 휩쓴다. 이것이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고 진보다. 그러나 사상이 만연하다 해서 그것이 기계적으로 역사를 추동하지는 않는다. 객관적인 여건이 만들어져야 한다. 1890년대 조선에서는 동학이 바로 그런 사상이었고, 고부의 무르익은 여건이 역사를 변화시킬 필요충분조건이었다.

그렇다면 전봉준이 추구한 정치와 권력 구조는 무엇이었을까? 수많은 논의가 있을 것이나, 1890년대 당시 여러 경로를 통해 조선에도 일반화한 '입헌군주제'의 과도기적 형태가 아니었나 조심스럽게 추정해 본다.

가까운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천황제와 내각제가 이원화한 형태의 권력 구조를 꾸리고 있었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도 마찬가지다. 극심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의 특성상, 정부를 운용할 능력을 갖춘 지식인층을 규합하고 다중의 동의와 지지를 구하는 방법으로써라도, 실권 없는 군주는 존재해야 한다고 여겼을 가능성이 크다.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으나, 과도기적 입헌군주제 이후 권력 구조와 체제에 대해서도 충분한 고민이 있었다고 추정해 본다.

조선이 건국된 이래, 기층 민중들이 중심이 되어 정부를 전복시킬 혁명을 기획하고 그 기록을 남긴 것은 아마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다. 조선 왕조 시기, 군사를 동원한 몇몇 무장봉기가 있었지만, 양반 출신의 주도로 상층 권력에 대한 불만 해소나 정권교체를 위한 도전에 국한되었다. 모순에 찬 사회구조의 제반 문제를 일거에 해소하는 혁명 단계로 나아가고자 시도한 건 단 하나도 없었다. 소소한 군란이나 변란에 머무르고 알았다.
 
▲ 녹두회관 동학혁명에서 대뫼 마을이 갖는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녹두회관.
ⓒ 이영천
 
하지만 사발통문에 서명한 전봉준을 비롯한 고부 민중의 혁명 기획은 달랐다. 조선이 맞닥뜨린 제반 문제를 일거에 해소하고, 아래로부터 분출하는 힘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이름 없는 백성의 힘이다. 이제 때를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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