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아름다움의 방법

손다예 2024. 3. 9. 00:0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과감한 색은 중립적인 색채로 변했고, 대담한 로고는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2024년의 미니멀리즘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뉴욕의 미니멀리즘을 대표한 캘빈 클라인의 광고 캠페인.

최근 이사를 앞두고 옷장을 정리했다. 트렌드는 변해도 종국에 남는 것은 비슷하다. 변함없이 믿음직한 마르지엘라 테일러드 재킷, 언제 샀는지 기억조차 없는 꼼 데 가르송 니트 카디건과 사시사철 입는 네이비 실크 스커트 등. 핏과 소재가 좋은 건 당연하고, 세월을 비껴나는 간결함이 깃든 것들. 결국 옷장 속에서 건재한 것은 조용한 아름다움이다.

VALENTINO
뉴욕의 미니멀리즘을 대표한 캘빈 클라인의 광고 캠페인.

2024년 S/S 트렌드는 90년대를 가리킨다. 행선지는 미니멀리즘. 미니멀리즘은 때로는 경제의 내리막길과 동행하곤 한다. 불경기와 불안정기엔 최소한의 소비가 미덕이니 소비자들은 단순함과 실용성을 추구한다. 팬데믹 이후 경제적 파동과 정치적 불안감, 기후 위기 등 세계적 혼란이 확산되면서 미니멀리즘이 부상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게다가 모던과 미니멀의 상징인 피비 파일로가 돌아온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패션 트렌드 검색 엔진 ‘태그워크(Tagwalk)’의 분석에 따르면 2023년보다 ‘셔츠’는 45%, ‘흰색’은 8%, ‘미니멀리즘’은 46% 증가했으며, ‘1990년대’는 가장 많이 검색된 태그로 뽑혔다.

1990년대 뉴욕의 아이콘 중 하나였던 제니퍼 애니스톤.
마른 체형의 케이트 모스는 90년대 미니멀리즘을 가장 잘 소화한 모델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미니멀리즘은 단순히 경제적 이유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스갯소리로 이 모든 게 소셜 미디어 때문이다. 디지털 시대를 사는 우리는 매일 수만 개의 자극적인 이미지를 소화한다. 자신의 일상을 시시각각 자랑질하는 큐레이팅에 환멸을 느끼는 건 나뿐일까? 이 시대의 부자들은 화려한 일상과 적나라한 소비 대신 심미적이고 조용한 방식으로 부를 드러내고 싶어 한다. 이런 현상을 ‘스텔스 웰스(Stealth Wealth)’라고 부르는데, 패션계뿐 아니라 사회 전반의 주요 키워드다. 패션이 해결해 내야 하는 지속 가능성에 대한 최선의 방안인 ‘최소한의 소비’가 미니멀리즘의 핵심인 것이다.

90년대 미니멀리즘 아이콘 캐롤린 베세트 케네디의 실용성을 강조한 룩.
90년대 미니멀리즘 아이콘 캐롤린 베세트 케네디의 실용성을 강조한 룩.
90년대 미니멀리즘 아이콘 캐롤린 베세트 케네디의 실용성을 강조한 룩.

1990년대 미니멀리즘 아이콘 캐롤린 베세트 케네디는 이미 25년 전 이 두 가지를 삶으로 실천했다. 그가 이번 시즌 디자이너들의 영감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캐롤린 베세트 케네디는 캘빈 클라인의 홍보담당자였고, 존 F. 케네디 주니어의 아내였다. 대단한 정치 가문의 일원이었고 대중의 관심사였지만, 결혼 이후 단 한 번도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 오로지 스타일로 대중과 소통하고 자신을 드러냈다. 화이트 셔츠와 슬립 드레스, 남성의 재킷, 로퍼 등 그의 아웃핏은 단순하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그의 스타일이 사람들의 이목을 끈 건, 그리고 1999년 불운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이후 그가 특정한 스타일로 기억되는 것은 ‘무엇’이 아닌, ‘어떻게’라는 태도 덕분이다. 부유했지만 수수했고, 유명했지만 유별스럽지 않았다. 애쓰지 않은 멋은 캐롤린 베세트 케네디를 매력적으로 만들어주었다. 더불어 캐롤린 베세트 케네디를 런웨이로 불러들인 것은 실용이 곧 우아함이었던 1990년대 뉴욕 패션에 대한 그리움(도나 카란과 캘빈 클라인의 전성기였던 뉴욕)과 뉴욕 패션의 정체성에 대한 갈급함이다.

DIOR
여성성을 강조한 기네스 팰트로의 심플 룩.
GUCCI
LOEWE

단순한 옷은 외려 풍부한 스타일을 만든다. 기본 위에 작지만 강력한 요소를 더하는 것이다. 과감한 구조를 만들 수 있고, 컬러로 재미를 줄 수도 있다. 미니멀리즘에서 빠질 수 없는 화이트 셔츠는 이번 시즌 수많은 변주를 이끌어냈다. 디올은 소매를 과장하는 재미를, 펜디는 쇄골을 강조하며 어깨를 드러내는 관능미를 더했다. 개인적으로 이번 시즌 미니멀리즘을 흥미롭게 풀어낸 브랜드는 로에베. 화이트 셔츠에 클래식한 블레이저와 예측하기 어려운 하이웨이스트 팬츠를 매치해 대담한 프로포션을 완성했고, 크리스털 슈즈를 더해 소녀적인 감성도 놓치지 않았다. 속이 비치는 슬리브리스 톱에 펜슬 스커트를 함께 입었던 기네스 팰트로를 마주한 듯한 구찌 룩도 인상적이었다. 회색의 단조로움은 시어한 소재의 저지 톱과 슬릿이 깊게 들어간 스커트의 조화, 핫 핑크 슈즈의 반전으로 세련되게 변화했다. 이질감이 드는 소재를 풍성하게 사용하는 미우치아 프라다는 이번 시즌 오버사이즈 왁스 재킷과 오간자 스커트로 미니멀리즘을 현대적으로 풀어냈고, 프로엔자 스쿨러는 테일러드 코트에 물 빠진 진으로 애쓰지 않아도 멋을 낼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을 제시했다.

PRADA
PROENZA SCHOULER

트렌드를 좌지우지하는 빅 브랜드들이 선택한 미니멀리즘인 만큼 올봄에는 기본에 충실한 실용적인 옷을 옷장에서 꺼내보자. 크루넥 니트 톱, 화이트나 연한 블루 셔츠, 실키한 스커트, 울 테일러드 재킷. 색을 맞춰 단색으로 입되 소재를 다양하게 믹스하고, 단조로운 실루엣의 룩에는 밝고 선명한 색의 네일이나 주얼리를 더하는 것도 좋겠다. 조용한 아름다움의 매력, 애써 드러내지 않아도 괜찮다는 마음을 갖는다면 더더욱 미니멀한 매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Copyright © 엘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