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속의 빛나는 여성들

윤정훈 2024. 3. 9.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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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그림자, 그 안에서 고유한 세계를 구축한 세 명의 여성 아티스트.
카르멘 헤레라 (Carmen Herrera, 1915~2022). ©Carmen Herrera, Courtesy Lisson Gallery
「 누구도 닿을 수 없는, 나만의 시간 」
이경희서양 중세 종교화를 연구했다. 에디터, 인터뷰어, 육아인으로서의 시간을 쌓고 있다..

고대 그리스인은 오늘날의 ‘시간’을 서로 다른 두 개의 개념으로 구분했다. 시곗바늘이 가리키는 일정한 흐름을 의미하는 크로노스, 누구에게든 특별한 순간으로 다가와 결정적인 때를 선사하는 카이로스. 카르멘 헤레라는 쿠바 아바나에서 태어나 건축 공부 후 20대 후반 뉴욕으로 건너가 여생을 ‘하드에지(1950년대 말 미국에서 일어난 기하학적 추상화의 새로운 경향)’ 추상화가로 활동했다. 106년이라는 지상에서 크로노스, 그중 뉴욕 예술계에서 지낸 65년간 그가 스친 ‘작가로서의 카이로스’를 세간의 기준으로 짚어보면 크게 세 번이다. 41세에 뉴욕에서 처음으로 열린 작은 개인전, 89세에 성사된 첫 작품 판매, 101세가 되던 2016년 휘트니 미술관에서 치른 첫 회고전. 이후 각종 전시와 옥션에서 주목받았으며, 패션계는 그의 작품을 모티프로 고유한 컬렉션을 제작하기도 했다. 세상은 헤레라의 말년에 이르러 사금 채취하듯 그의 작품과 이야기 조각을 모으기 시작했다. 전후 시대 새로운 미술을 이끈 1950년대 미국 모더니즘 시기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예술계는 오래도록 헤레라에게 냉담했다. 그가 라틴아메리카, 그것도 미국의 적국인 쿠바 태생이자 점점 나이 들어가는 여성 작가였기 때문이라 유추할 수 있다.

‘Amarillo - Uno’(1971). ©Carmen Herrera, Courtesy Lisson Gallery

하지만 헤레라는 모더니즘의 색면 추상을 이끌던 바넷 뉴먼(Barnett Newman)과 교류하면서 영향을 받은 작가다. 갤러리와 평단이 그를 몰랐을 리 없다는 말이다. 영어 교사인 남편과 맨해튼의 작은 집 다락방에서 검소하게 작품 활동을 이어간 시간이 오직 소외와 좌절로 점철됐다고 안타까워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얕은 짐작일 뿐이다. 정작 헤레라는 눈감기 한 해 전에 이렇게 말했다. “무시당하는 것은 자유의 한 형태이기도 하다. 나는 누군가를 끊임없이 기쁘게 해야 하는 일에서 해방감을 느꼈다(Being ignored is a form of freedom. I felt liberated from having to constantly please anyone).”그가 원래 무관심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한 인터뷰에서 갖은 무관심과 차별로 많은 상처를 받았음을 고백하기도 했다. 하지만 숱한 거절을 겪고 주류 밖 외로운 섬에 놓여 온전히 혼자가 됐을 때 작품을 더욱 자유롭게 탐색하는 것이 가능해졌음을 알게 됐다. 비평은 물론이고 세간의 이목조차 닿지 않는 자리에서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던 사람. 이전에 보지 못한 그만의 태도와 조형 언어는 자연스러운 결실이었을 것이다.

‘Ariel’(2006). ©Carmen Herrera, Courtesy Lisson Gallery

카르멘 헤레라의 작품은 엄정한 대칭을 이루면서도 예상을 엇나가는 틈과 구성으로 무한한 움직임을 연상시킨다. 두세 가지 제한된 색과 단순한 구성에서 오는 특유의 단단함과 긴장감이 놀랍다. 날카로운 선과 각도로 이뤄진 면은 어디론가 쏘아 올린 화살 같고,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담대한 색들은 정교하게 구획돼 있다. 작품 속의 선과 면은 화면 가장자리에서 아슬아슬하고 첨예하게 소멸한다. 어딘가로 수렴하는 선과 면의 경계에 작가가 기울였을 심혈과 긴장이 선연하다. 이토록 절제된 색과 구성에 집중한 이유는 무엇일까. 작품 제목에 실마리가 있다. 스페인어로 ‘구조(Estructura)’ ‘평형(Equilibrio)’ ‘각도(A′ngulo)’같은 작품명은 작품을 보지 않아도 이미지를 상상할 수 있다. 주요 색상 두 가지를 작품명으로 정한 경우도 많은데, 일례로 1950년에 곡선과 초록 면으로 채운 ‘그린 가든(Green Garden)’은 약 10년 뒤 더 단순화된 ‘하양과 초록(Blanco y Verde)’ 시리즈로 변화하며 무언가 연상할 여지를 더욱 축소해 버린다. 이처럼 정교하게 계산된 작품은 건축에 대한 조예에서 기인한다. 실제로 헤레라는 스페인의 16세기 왕실 수도원 엘 에스코리알(El Escorial)이나 수도원 개혁을 이끈 성자들의 중세 성채 도시 아빌라(A′vila) 같은 문화유산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격정적인 긴 인류사를 거쳐 땅 위에 굳건히 자리한 건축물의 정교한 균형을 사랑했다. 이런 마음은 역동성을 잃지 않는 동시에 항상성을 추구하는 작품에서도 드러나며, 시간을 거듭할수록 더욱 분명해졌다. 특히 수많은 회화적 표현을 최대한 지워나갔던 ‘정제’ 과정은 양차 대전과 고국의 쿠바혁명을 통과한 작가의 생애 전반에 매우 중요한 작업이었다.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고 싶다(In this chaos we live in, I would like to put some order).”헤레라가 언급한 ‘Order’의 어원은 ‘베틀에 나열된 실’에서 왔다. 날실과 같은 20세기의 크로노스, 예기치 못한 상흔을 남긴 인류 공통의 카이로스. 이로 인해 어지러워진 씨실을 본래의 자리로 하나씩 돌려놓고 싶었던 건 아닐까.

‘Diptych(Green & Black)’(1976). ©Carmen Herrera, Courtesy Lisson Gallery

오늘날 트렌드 전문가들은 AI 발달로 분초를 다투는 속도사회가 우리 삶의 토대를 이룰 거라고 전망한다. 헤레라는 한 세기에 걸쳐 가속화되는 변화의 물결을 몸소 겪으며 깨달았을 것이다. 최소한의 것이 오히려 혼돈 속에서 소중한 이정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잠깐의 멈춤이나 동시대의 트랙에서 낙오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지금의 우리에겐 100년 가까이 자신의 길을 홀로 걸어간 그가, 누구도 의식하지 않았던 꾸준한 행위가 새로움이자 경이로 다가온다. 최소의 선과 색으로 구축한 질서. 이를 통해 카르멘 헤레라는 누구도 닿을 수 없는 자신만의 때, 즉 카이로스를 직접 만들고 또 만났다.

릴리 라이히(Lilly Reich, 1885~1847).
「 언제나 독립적으로, 언제나 함께 」
이다미 건축사무소 ‘플로라앤파우나’ 대표.

협업은 릴리 라이히(Lilly Reich, 1885~1847)가 가장 잘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나보다 딱 한 세기에 앞서 독일에서 태어나 활동한 릴리는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였으며, ‘독일공작연맹(Werkbund)’임원이자 교육자였다. 빠진 직업이 없나 체크가 필요할 정도로 다방면에서 활동했는데, 당시엔 전문 교육기관이 많지 않아 점진적으로 전문 영역을 이동하거나 확장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릴리는 당시 여성들이 갖춰야 할 재봉과 자수를 습득하고 가구나 인테리어, 전시, 건축으로 활동을 넓혀갔으며, 그만큼 다양한 재료와 새로운 기술, 협업 구조를 폭넓게 이해하고 활용할 줄 알았다. 전성기 시절 릴리의 대표 작업은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 1886~1967)와의 공동 작업이다. 미스와 협업할 때도 릴리의 사무실은 독립적으로 운영됐다. 그런데 유독 이 시기 릴리 라이히의 크레딧이 분명히 명기되지 않았다. 당대를 주름잡던 건축가에 대한 역사가들의 낭만적 서술이 건축을 오직 한 사람의 작업으로 환원하기 급급했던 탓일까. 협업은 릴리에게 재료와 기술, 공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크고 복잡한 구성 속에서 실현시킬 기회를 주었지만 동시에 그의 명성에 크고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1927년 베를린에서 열린 〈Die Mode der Dame〉 전시장 한쪽에 마련된 벨벳과 실크 카페. Ⓒ Digital image,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Scala, Florence.

릴리의 탁월함은 가구나 인테리어에서 여지없이 발현됐으나 흥미로운 도약은 전시 디자인에 있다. 독일공작연맹 활동은 릴리에게 다양한 산업전시를 조직하고 디자인할 기회를 줬다. 1851년 영국의 수정궁에서 시작해 19세기 초중반 국가의 산업 성장을 장려하고 홍보하며 자리잡은 산업전시는 오늘날 수많은 박람회와 디자인 페어, 디자인 비엔날레의 전신이 됐다. 연맹이 주도한 전시는 당대의 삶을 상정하고 대중을 교육했다. 전시장에 선보인 유리와 리놀륨, 레이온 같은 재료들은 전후 변화할 주거와 삶의 풍경을 안내하는 마중물이나 다름없었다. 독일의 가장 앞선 제조사들과 함께 20~30년대 릴리가 디자인한 산업전시들은 단순 제품 홍보가 아니라 새 시대의 공간을 물질 중심으로 선행한 ‘가벼운 건축의 풍경’이기도 했다. 1934년 베를린에서 열린 전시 〈German People-German Work〉는 19세기 후반에 대량생산되기 시작한 유리의 가능성과 깊이를 우아하게 보여주면서 공간의 덧없는 순간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설치미술이다. 릴리는 반으로 잘린 원기둥처럼 둥글게 휜 열두 개의 유리판을 줄과 열을 맞춰 세우고, 유리를 바닥에 고정하는 최소한의 장치만을 남겼다. 거대한 유리는 투명함 속에서 자신들의 무게를 잊은듯 서 있으며, 매끈한 곡면 위로 반사돼 일렁이는 풍경은 빠진 직업이 없나 체크가 필요할 정도로 다방면에서 활동했는데, 전시장의 흩어지는 시간을 아스라이 포착한다.

미스와 공동 작업한 바이센호프 체어.

릴리의 전시 디자인에는 두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재료의 제작 공정과 중간 가공 상태를 최종 재료 및 제품과 함께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재료에 담긴 시간과 과정, 수공예와 기계식 가공을 동시에 현시할 줄 아는 디자이너였다. 새로울 것 없어 보이는 직물을 이야기할 때는 원형의 울과 직조 기계를 같이 전시해 산업이 소외시킨 재료의 출처와 가공 기술의 가능성을 물었다. 무늬목을 벽에 그래픽처럼 붙여 새로운 재료에 대한 이해를 위트 있게 보여주는 한편, 통나무로 대구를 이루기도 했다. 두 번째 원칙은 가벽의 도움 없이 재료 자체를 벽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1927년 ‘벨벳과 실크 카페(Cafe´ Samt und Seide)’에서 릴리는 패션 디자인 전시장 한쪽에 마련된 직물회사 홍보 공간에 다양한 직물을 곡선으로 휜 금속 튜브에 커튼처럼 매달았다. 직물 커튼은 전시 대상인 동시에 전시장으로, 공간을 가로지르는 커튼이 슬며시 나눈 사이사이에 테이블과 의자가 있어 카페로도 기능한다. 이 두 번째 원칙은 릴리와 협업한 이후에 나타난 미스 반 데어 로에의 공간으로 이어지며 모더니즘 건축의 주요 모티프가 됐다. 미스가 건축을 주도하고 릴리가 인테리어를 주도했던 ‘투겐다트 빌라(Villa Tugendhat)’내부는 ‘벨벳과 실크 카페’와 유사한 면모를 띤다. 패브릭이나 얇은 목재 등 가벼운 재료가 공간을 나누는 벽이 되고, 공간을 색색의 가죽 의자와 울 카펫, 나무와 금속, 유리 가구들이 부드럽게 점유하는 식이다.

짧은 시간을 점유하고 사라지는 전시공간은 ‘건축의 영속성’이라는 편견에 갇힌 자들로부터 쉽게 폄하된다. 하지만 우리에게 가능한 세상을 꿈꾸기 위해 많은 사람, 많은 분야가 모여 손에 잡히는 허구를 던져보는 장이기도 하다. 릴리는 가장 앞서서 디자인의 이름으로 이를 증명해 냈다. 비록 그의 디자인 중 실제로 지어진 공간은 전시 속 모델하우스뿐이라 해도 건축사에서 릴리의 작업을 위대한 유산으로 삼아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힐마 아프 클린트(Hilma af Klint, 1862~1944).
「 힐마 아프 클린트의 초월적 여정 」
이현아프리랜스 에디터, 아트 라이터. 예술산문집 〈여름의 피부〉를 썼다.

힐마 아프 클린트(1862~1944)는 불현듯 우리 앞에 툭 떨어진 이름이다. 그로 인해 다시 쓰인 미술사에 따르면 ‘바실리 칸딘스키 이전의 추상 화가’. 21세기를 사는 우리만 놀랐을 뿐 19세기에 태어난 이 여성 화가는 이런 상황을 예견한 것이 틀림없다. 그는 사망 당시 2만6000쪽의 글과 1300점의 그림을 남겼고, 1932년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내가 죽고 20년이 지나 공개될 모든 작품에는 위에 언급된 기호(+, ×)가 달려 있을 것이다.”동시대가 자신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내릴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힐마는 수 년에 걸쳐 망각에 부칠 자료와 미래로 건넬 자료를 정리하고 분류했다. 전자는 폐기했고 후자는 그의 죽음과 함께 봉인됐다가 이 계획의 조력자였던 조카 에릭 아프 클린트(1901~1981)에 의해 공개됐다. 힐마가 동시대로부터 이탈을 꿈꾼 이유는 무엇일까?

‘HaK 108’. Ⓒ The Hilma af Klint Foundation.

힐마는 1862년 스웨덴 해군 가문에서 태어났다. 가문의 구성원들은 피아노 악보를 외우듯 해로를 기억했고, 할아버지는 ‘스웨덴 해도’를 만든 제작자였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건 뛰어난 해도의 특성인데, 이는 힐마 그림의 주도동기(Leitmotiv)이자, 뛰어난 해도의 특성이었다. 교육과 투표권 등 모든 분야에서 남녀가 동일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19세기 말. 힐마는 자유로운 부모 아래서 성장한 덕분에 스톡홀름 아카데미에서 미술 교육을 받았고 결혼시장에 ‘상품’으로 나가지 않을 수 있었다. 또한 그의 부모는 종교에 관해서도 자유를 허용했고 17세부터 강령회에 참여했다. 힐마는 1891년 가을 강령회에서 ‘침착하게 너의 길을 가라’는 첫 목소리를 들은 후, 소리나 이미지로 나타나는 정신세계 동반자들과 함께 그림을 그렸다. 평생 신지학 · 인지학은 물론 자연과학까지 폭넓게 탐구한 그의 그림 속에서는 색과 선, 기호와 상징, 동식물, 그리고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수많은 형태가 바라보는 이와의 조우를 기다리고 있다. 어떤 그림은 폭포처럼 쏟아지는 듯하고, 어떤 그림은 작은 나비가 날갯짓을 하는 양 조심스러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당시 수많은 여성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힐마의 그림은 제대로 전시하거나 평가받을 기회조차 없었으며, 그의 비구상적 회화는 사람들에게 ‘도대체 무얼 보란 거지?’ 하는 의문만 불러일으켰다. 비구상적인 면 외에 드러나는 작품의 특징 중 하나는 압도적 크기다. 그의 대표작 열 점의 대형 그림을 포함해 많은 그림의 높이가 2~3m를 넘었다. 힐마는 거대한 그림을 옮기는 대신 그림을 촬영한 사진과 원본을 작게 모사한 수채화를 짝으로 맞춰 열 권의 화집을 만들었다. 그의 세계가 책의 형태로 작은 여행 가방에 담겼다. 그 가방을 들고 스위스 어느 기차역에 서 있었을 힐마와 그의 동반자 토마시네 안더손의 모습을 상상하면 가슴이 뛴다. 마치 그들과 나란히 앉아 종착역을 알 수 없는 미래로 나아가는 기분이다.

‘HaK 102’. Ⓒ The Hilma af Klint Foundation.

그러나 사후에도 이 여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1970년 초 에릭은 스웨덴 국립미술관, 현대미술관에 전시를 제안했으나 거부당했다. 1986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에서 열린 〈미술에서의 정신적인 것: 1890-1985년 사이의 추상 회화〉에서는 평론가로부터 ‘칸딘스키, 말레비치, 몬드리안과 동급을 받을 만한 미술가가 아니며, 여자가 아니었다면 이처럼 과분하게 주목받지 못했을 것’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힐마의 재발견이 이뤄진 곳은 2018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이다. 힐마는 그림에 액자를 하지 않았는데, 액자라는 틀 대신 그림을 전시할 ‘신전'을 계획했다. 관람자가 아카데미나 좁은 화랑이 아닌 천문대가 있는 꼭대기를 향해 나선형으로 올라가는 건물에서 그림을 감상하기를 바랐다. 초대 관장인 힐라 폰 르베이(Hilla von Rebay)의 의뢰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설계한 구겐하임 미술관은 힐마가 살아생전 상상했던 ‘신전’과 놀랍게도 닮았다. 무엇보다 비구상적 회화가 관람자를 물질주의에서 해방시킬 수 있고 보다 높은 형태로 이끌 것이라는 힐라의 신념과 일치했다. 두 여성의 생각이 운명처럼 맞물리며 열린 전시 〈Hilma af Klint: Paintings for the Future〉는 구겐하임 설립 이래 최대 관람자(약 60만 명)를 불러모았다. 힐마는 조카 에릭에게 이렇게 말한 적 있다. “나는 작고 보잘것없지만, 엄청난 힘이 나를 관통하기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단다.” 나는 그 문장을 헌신과 투쟁이라는 글자로 다시 읽는다. 힐마는 작품을 시대에 고정하지 않았고, 동시대인의 시선에 가두지도 않았다. 평생을 바친 작품을 걸고 본인의 서사를 직접 써 내려간 후, 두려움 없이 현재로부터 탈선했다. 자기만의 세계를 축소한 화집을 여행 가방에 넣고 기차역에 서 있던 화가는 21세기의 어느 역에 내렸다. 이렇게 멋진 시간 여행이라니. 힐마를 만난 것처럼, 아직 도달한 적 없는 미래에서도 어떤 여성들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바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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