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상처를 치유하는 노동자입니다"

김웅헌 2024. 3. 8. 13:3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인터뷰-한국GM 그 안에 사람人] 한남화 광주직영 정비사업소 기술선임

[김웅헌 기자]

"저를 키운 건 8할이 아버지였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께 48만 원을 달라고 했습니다. 광주 가서 자동차정비를 배워야겠다는 얘기를 하니 이것저것 따지지도 않고 흔쾌히 돈도 주시고 출가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때 정비학원비 45만 원을 내고 나머지로 3만 원으로 생활했어요. 그 소중한 돈이 지금에 와서 집을 살 수 있었던 종잣돈이 됐습니다. 군대에 가기까지 학원도 다니고, 카센터에서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아마도 아버지의 한 없는 믿음이 젊은 나이에 홀로서기를 할 수 있었던 밑천이었던 것 같아요."
 
▲ 한남화 기술선임 여러가지 판금용 공구 앞에선 한남화 기술선임.
ⓒ 금속노조 한국지엠지부
   
12일, 광주광역시 송암공단에 위치한 한국지엠 광주직영 정비사업소에 근무하는 한남화 기술선임을 만났다. 그는 이곳에서 판금을 도맡아 하고 있다. 주변에선 그가 판금에서부터 기능 정비까지 가능한 멀티플레이어로 통한다고 했다.

"저는 1974년 여수 화양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곳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지요. 집안 사정으로 대학은 가지 않았습니다. 군대에서는 운전병일 때 정비학원을 다닌 게 많은 도움이 됐어요. 운명처럼 전역 후 여수에서 자동차 관련 직종으로 취업을 했고, 96년부터 본격적으로 자동차 판금 일을 하게 됐습니다. 공업사에서 판금을 도맡아 하며 실력도 인정받았습니다. 소사장까지 하며 결혼도 하고, 남매도 낳고, 돈도 부족하지 않게 벌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구인·구직 정보지를 보는데 지엠대우 직업훈련원(현재 한국지엠)에서 교육생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자동차회사의 직원이 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2003년 그길로 사업을 정리하고 훈련생이 됐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무모했던 것 같아요. 6개월가량의 교육이 끝나고 지금은 없어진 군산공장에서 철판으로 도어를 만드는 부서에서 현장실습을 하게 됐습니다.

2004년 2월에 운 좋게 31살에 정규직으로 군산공장 차체 프레스부서에서 도어를 만드는 곳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운이 참 좋았던 것 같아요. 이후에는 부산직영 정비사업소를 거쳐 17년도에 광주정비로 오게 됐습니다. 되돌아보니 자동차와 관련된 일을 한 지 벌써 31년이 됐네요."

그에게 정비 분야 중 자동차 판금 업무란 무엇인지 개인적인 생각을 물었다.
 
▲ 한남화 기술선임 파손된 차량을 수리할 때 사용되는 공구 사용법을 설명하고 있다.
ⓒ 금속노조 한국지엠지부
   
"이 직업이 맨손으로 철판을 만질 때도 있고, 손과 몸으로 하는 일이다 보니까, 예전보다는 덜하지만 크고 작은 상처들이 생기기도 합니다. 지금이야 외형이 많이 파손되거나 찌그러지면 작업표준에 따라 대체로 교환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지만, 예전에는 대부분 원형복원을 위해서 섬세하게 판금 작업을 했었어요. 이 직업은 감각이 매우 중요합니다. 앞으로도 판금 분야는 앞으로도 로봇으로 대체할 수 있는 직업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판금 분야는 고객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동차라는 것이 한국에서는 교통수단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자동차 외형에 문제가 생기면 보기가 싫잖아요. 저는 사고로 들어오는 자동차를 수리할 때 원형처럼 복원하려고 무진장 노력합니다. 나의 손길로 인해 고객의 파손된 자동차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기분 좋게 할 수 있으니까요."

"제가 판금을 완벽하게 했다고 해서 끝이 아닙니다. 다음 공정인 도장 파트를 거쳐야만 고객들에게 차량을 인도합니다. 최대한 판금 분야에서 원형복원을 해 줘야만 도장공정에서 퍼티 작업과 페인팅 작업이 수월해집니다. 엄밀히 따지면 저의 고객은 도장 파트에서 일하는 사람들일 거예요."

광주직영 정비사업소에서 일하면서 요즘 가장 힘든 점들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 한남화 기술선임 손상된 차량 외형을 손의 감각으로 점검하고 있다.
ⓒ 금속노조 한국지엠지부
   
"예전엔 이곳에서 100여 명이 근무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사무직 포함해서 38명이 근무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 올해 4명, 내년에 4명이 정년퇴직을 합니다. 이제 인원 충원이 안 되면, 주변의 중소 정비공장의 수준도 안 되는 거죠. 이제 다들 50대 중후반 직원들만 남아서 들어오는 차량을 돌려보내고 고객들에게 항의까지 받기도 합니다. 가장 걱정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경영진들이 현재 직영 정비사업소 영역에서 수익창출만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펼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동차가 생산될 때 이미 차량 가격에 A/S 관련된 비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생산공장과 서비스 부문을 철저히 분리해서 관리합니다. 그럼에도 경영진들은 장비와 시설 투자를 축소하고 있다고 봅니다. 차량은 첨단화 대형화되고 있는데 전문인력 채용과 기술력 강화를 위한 교육에 투자를 줄이면 안 됩니다. 한국에서 자동차를 제조하고 판매하는 회사에서 직영 정비사업소는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회사 이야기가 길어지자 화제를 돌렸다. 그를 있게 한 가족 얘기를 들려 달라고 했다.
 
▲ 한남화 기술선임 파손된 차량의 교체할 부품을 컴퓨터에 입력하고 있다.
ⓒ 금속노조 한국지엠지부
   
"가족사가 다른 집안과는 조금 다릅니다. 아버지가 고향에 계시는데 이번 주에 요양원으로 모셨어요. 제가 형제자매 중 가장 가까이 있어서 아버지 뵈러 자주 고향 집에 다녔습니다. 이제는 어머니만 남고, 아버지는 서울로 옮겼어요. 요양원에 가셔서는 기억이 되돌아오셨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치매 증상이 회복된 것인지, 잠시 문득문득 정신이 되돌아오는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아버지는 저를 믿어주셨던 유일한 분이셨습니다. 그 힘으로 지금까지 왔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집안 형편상 일찍 독립을 해야 했습니다. 어떤 분들을 제게 쌈닭 같다고 하기도 하고, 자기주장이 너무 강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실 저는 고등학교 이후 빠른 독립생활, 홀로 제 영역을 개척해 왔습니다. 아마도 그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었던 삶의 패턴이 그런 오해를 불러온 것 같기도 합니다. 어찌 됐든 이제 살만하니 아버지를 곁에서 자주 볼 수 없게 돼서 참 울적합니다."

세부적인 가족사를 더는 묻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현재 군대에 가 있는 아들은 8월에 제대를 합니다. 이후 복학해서 대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취업했으면 합니다. 둘째 딸은 고등학교 3학년인데 나름 활달하고 소신 있게 잘 커 줘서 고맙습니다. 저는 광주정비사업소에서 정년퇴직까지 다녔으면 좋겠습니다. 어렸을 적엔 차량 정비를 하다보니, 만드는 게 궁금해서 한국지엠에 들어왔고, 만들다가 다시 정비사업소에서 고치고 있으니, 언젠가는 자동차의 마지막인
폐차장을 해보고 싶은 소망이 있습니다."

그는 부모님이 계셨지만, 이른 독립으로 자신을 지켜온 사람이었다. 자동차를 빼놓고는 인생의 시작과 끝을 표현할 수도 없었다. 그는 때때로 무모했지만, 온전히 자신의 힘만으로 가족을 지켜왔었다. 입사 21년 차, 한남화 기술선임. 그는 강한 쇠처럼 보이지만, 흔들리는 갈대의 심정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다. 판금용 망치를 들고 차가운 철판을 두드리며, 용접 불꽃을 벗 삼아 살아 낸, 그의 손 여기저기에는, 크고 작은 상처들이 훈장처럼 남아 있었다.
 
▲ 한남화 기술선임 일상적으로 철판을 만지는 손 여기저기에 상처들이 있다.
ⓒ 금속노조 한국지엠지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