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 나이 82세, 일하는 할머니들의 지금

2024. 3. 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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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 나이 82세! 다양한 분야에서 당당하고 꼿꼿하게 자기만의 길을 걷는 멋진 언니들의 일과 삶.
「 Actress 김용림 」
1940년생, 김용림의 이름은 몰라도, 그의 얼굴은 모를 수 없을 것이다. 60년의 배우 활동, 70편의 드라마와 7편의 영화, 셀 수 없이 많은 어머니와 시어머니, 고모, 선역과 악역… 한 세기를 살아낸 배우의 초상.
재킷 25만7천원대 딘트. 이너 톱 1백5만원 한킴. 스커트 1백57만9천원대 어웨이크 모드 by 네타포르테. 선글라스 28만원 젠틀몬스터. 귀고리 16만원, 목걸이 32만원, 반지 12만원 모두 넘버링. 부츠 15만5천원 찰스앤키스. 베레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팔찌 본인 소장품.

Q : 촬영할 때 카메라 앞에서 “괜찮아!”, “그래?” 같은 가상의 대사를 읊기도 하고, 소리 내어 웃기도 하는 등 연기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A : 그게 편해요. 전 포스터나 CF를 찍을 때도 그렇게 해요. 표정이 훨씬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나오더라고요. 배우라 그런가 봐요.(웃음)

Q : 배우 인생 60년이에요. 배우를 꿈꾸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A : 원래 미대에 가고 싶었는데 그때 집안이 기울었어요. 미대는 돈이 많이 드니 포기했는데, 다른 데는 가기 싫어서 고민하던 차에 마침 KBS에서 성우 4기를 모집하더라고요. 고등학생 때 연극부 부장이었는데 그때 같이 연극했던 친구 세 명과 “심심하니까 우리 방송국 시험이나 한번 보자”고 가서 모두 합격한 거예요. 그래서 남산 KBS로 출근하기 시작했죠. TV 개국 전이라 라디오 드라마가 인기였을 땐데, 명랑한 아가씨 느낌의 여자 주인공을 많이 맡았어요. TV 개국 후엔 연속극, 외화 더빙, 무대 연극… 아주 바쁘게 살았고요. 연속극 하나 하면 보통 촬영을 6개월 잡는데 1년에 두 작품씩 하곤 했어요. 정말 쉬지 않고 일해왔죠. 슬럼프 느낄 새도 없을 정도로.

Q : 60년을 쉴 새 없이! 그런 힘은 어디서 나올까요?

A : 저도 모르겠어요!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었지만, 전 정말로 집에 있으면 에너지가 떨어지고 대문 밖으로 나서야 에너지가 생기는 여자 같아요.(웃음) 작품을 하면 에너지가 더 생기고요.

Q : 연기라는 게 정답이 있는 분야도 아니고, 끊임없이 나를 채우고 또 쏟아내야 하는 일이잖아요. 어떻게 그렇게 오래 꾸준히 할 수 있는지 궁금해요.

A : 일단 내가 연기를 좋아해요. 좋아하지 않는 일은 그렇게 할 수 없어요. 배역을 맡으면 희열을 느끼거든요. 내 표현력으로 내가 아닌 어떤 인물을 만들어내는 거잖아요? 얼마나 재밌어요. 전 세상에서 제일 좋은 직업이 배우라고 생각해요. 잘하고 싶은 욕심도 강했어요. 내 배역을 최대한 잘 표현해서 감독님과 작가님에게 칭찬받아야 한다는 욕심. 한 작품을 할 땐 오직 거기에만 몰두했죠. 2가지를 동시에 완벽하게 해낼 수는 없는 법이거든요. 드라마 할 땐 드라마만, 연극 할 땐 연극만! ‘이런 역할은 하기 싫고 저런 역할 하고 싶다’ 같은 생각도 안 했어요. 오로지 지금 내 앞에 주어진 역할에 집중하는 것. 그게 쌓였을 뿐인데 어느덧 60년이 넘은 거예요.

Q : ‘오로지 내 앞에 주어진 것에 집중했다.’ 멋지네요.

A : 완벽주의 성향이 있어요. 뭐든지 내 맘에 안 들면 못 견뎌서 스스로를 들볶으니 피곤하죠. 그러나… 그렇게 해야만 했던 거야. 무엇을 하든 1등을 해야 하는 성격을 타고났기도 했고,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선택한 직업이었거든요. 그러니 책임지고 잘 살아야죠.

Q : 일을 시작할 때 먼 미래를 바라보며 그린 그림은 없었나요?

A : 없었어요. 처음엔 ‘좋은 성우가 되겠다’는 생각뿐. 그런데 성우든 배우든 쓰임을 받는 사람이잖아요.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어떤 역할을 하는 게 아니란 말이죠. 그러니까 역할이 주어졌을 때 실력을 제대로 발휘해야 해요. 그래서 정말 열심히 했어요. 작가가 써준 인물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도록, 집에서 화장실 갈 때도 대본을 놓지 않았죠.

Q : 70편의 드라마와 7편의 영화에 출연했는데, 최애 작품과 최애 캐릭터가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A : 없어요.(웃음) 어떤 역이든 나에게 온 역할이면 그저 충실하게 임하자는 게 철칙이었고, 그 철칙을 지켰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은 역이나 애착이 더 큰 역도 없어요. 물론 서른 살부터 엄마, 시어머니, 고모, 아니면 악역을 주로 맡았다 보니 젊거나 예쁜 역할을 해보고 싶지 않냐는 질문을 많이 받긴 했는데… 참 이상하게도 그런 생각이 안 들더라고요.

Q : 그렇다면 새롭게 도전해보고 싶은 역할이나 장르가 있을까요?

A : 정말 많은 역할과 장르를 소화했지만 한 가지, ‘내가 이걸 해봤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게 바로 뮤지컬이에요. 노래도 잘하지 못하고 이젠 80대 중반이라 그럴 에너지가 없을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안 해본 거니까. 작은 역이라도 뮤지컬을 한번 해봤으면 좋겠어요.

Q : 배우 김용림에게 일이란?

A : 나의 삶. 물레방아처럼 쉬지 않았죠. 그렇다고 쉬어봤으면 좋겠단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나는 일을 해야 하는 여자, 작품을 해야 하는 여자… 이 나이에도 일하는 게 그냥 감사하죠.

Q : 무엇에 재미를 느끼나요?

A : 요즘엔 대단한 재미를 느끼진 못해요. 다만 즐거운 마음으로 생활하려고 스스로를 고양시키죠. 그럼 일상에서 사소한 기쁨을 느끼고, 그걸로 충분해요. 재미라는 건 그런 노력이 필요한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사는 게 뭐가 그렇게 재미있겠어?(웃음) 모든 건 정말 마음먹기에 달렸어요. ‘즐겁다, 행복하다’ 되뇌면 진짜 즐겁고 행복해지기 시작하고 ‘슬퍼, 울적해’ 하면 자꾸 가라앉죠.

Q : 삶에서 가장 용감했던 순간을 꼽는다면?

A : 미대의 꿈을 접고 이 일을 택했을 때. 결과적으로는 잘한 선택이다 싶어요. 그림을 그리려고 억지로라도 미대를 갔더라면 인생이 어떻게 됐을지 모르잖아요. 훌륭한 화가가 못 됐을 수도 있고, 유학도 가고 싶어졌을 텐데 그 과정에서 새로운 어려움도 생겼겠죠. 60년 넘는 세월을 배우로서 걸어온 걸 보면 나의 길을 제대로 온 것 같아서 감사해요.

Q : 예전 인터뷰를 찾아보니 불교가 ‘나’를 공부하는 종교라 좋다고 답한 적이 있더라고요. 저는 뛰어난 연기자들의 공통점은 ‘나 자신’을 치열하게 탐구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나’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요?

A : 배우는 한 인물을 만들어내기 이전에 사람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연기만 잘해선 안 돼요. 나를 만드는 게 선행돼야 다른 인물도 근사하게 표현할 수 있죠.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고 공부하는 거고요. 저는 절에 가서 참선하고, 하루에 1시간이라도 조용히 내 안을 들여다보면서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요. 반성 없이는 발전이 없잖아요. 내가 올바르게 하루를 제대로 살았는지, 너무 이기적이진 않았는지, 좋은 일을 못 하고 지나간 건 아닌지 돌아보고 매일매일 더 훌륭한 사람이 되는 길을 고민하는 거예요.

Q : ‘멋있는 할머니’란 어떤 사람일까요?

A : 거창하게 훌륭하다고 칭송받는 것만이 멋진 어른은 아닐 거예요. ‘저 선배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사람이 멋진 거죠.

Q : 그렇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멋있는 할머니’가 되고 싶은 〈코스모폴리탄〉 독자들에게 한마디해준다면?

A : 먼저 육체와 정신이 모두 건강해야죠. 요즘 젊은이들을 보며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너무 자신만 바라보고 산다는 거예요. 이기적이면 본받을 만한 사람이 될 수 없어요. 세상을 좀 더 넓게, 너그럽게 보며 살았으면 좋겠어요. 여유와 포용력을 가져야죠. 바르게 서려고 노력하고요.

Q : 그렇게 살아온 어른만이 할 수 있는 말이네요.

A : 그동안 살아온 삶을 돌아봤을 때 연기에 늘 충실했고, 누구에게 못됐다는 소리 안 듣고, 남의 마음 아프게 하지 않고 살았으면… 그것만으로 반듯하게 산 거 아닐까요? 앞으로 남은 삶도 그렇게 살아보려고 합니다.

「 Fashion Designer 진태옥 」
1934년생. 소녀 시절, 흰 셔츠를 본 찰나의 순간이 그를 디자인으로 이끌었다. 한국 기성복 시대를 연 장본인이자 한국인 최초로 파리 프레타포르테 컬렉션에 참가했고, ‘20세기를 빛낸 패션인 500인’에 유일한 한국인으로 등록된 디자이너.
셔츠 49만원대, 팬츠 56만원대 모두 진태옥. 이어 커프 5만원대 아진코. 목걸이, 반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Q : 선생님의 연혁을 보다가, 결혼 후 일을 시작했다는 게 놀라웠어요. 어떻게 그 시절에 결혼을 하고도 일을 할 수 있었나요?

A : 제가 무남독녀 외동딸이라 어머니가 아주 잘 키우고 싶어 하셨어요. 직접 말씀하신 적은 없지만 뭔가 해낼 인물을 만들어야겠단 의지가 느껴졌죠. 그런데 그 시대 여자들에게 결혼이란 사회 활동과는 담을 쌓는 거잖아요. 시집살이만 하다 보니 어느 날, 나라는 존재가 없다는 걸 느꼈어요. 저는 책과 영화를 좋아해서 현재 내가 속한 세계 말고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더 답답하고 괴로웠죠. ‘내가 이렇게 살아야 하나? 우리 엄마는 날 그렇게 안 키웠는데? 뭔가는 돼야 한다고 했는데?’ 그래서 합법적으로 결혼 생활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길을 찾은 게 패션이었어요. 디자이너라는 명칭도 제대로 자리 잡지 않았을 때였지만 목표가 생겼죠. ‘한국 여성으로서 디자이너의 세계를 만들어보자, 그리고 언젠가는 세상으로 뛰쳐나가보리라.’

Q : 그 목표는 다 이뤘네요. 국내 기성복 시장을 처음 개척한 이야기도 궁금합니다.

A : 1971년 미국에 가서 아침이면 맨해튼 32가에 있는 맥알핀 호텔에서 나와, 60가까지 올라갔다가 매디슨가까지 내려오는 걸 반복하며 기성복 매장을 살폈어요. 옷 한 벌의 스티치 하나하나까지 다 봤죠. 귀국 후 그동안 옷을 만들었던 자료로 평균 치수를 내봤더니 미국에서 사온 옷과 치수가 딱 맞더라고요. 진짜 해봐도 되겠단 생각에 본격적으로 시작한 거예요.

Q : 세계로 나가보니 어떻던가요?

A : 볼 게 너무 많았죠. 파리에서 크리스찬 디올 매장을 찾았을 땐 그야말로 신세계를 발견한 기분이었고, 스위스 취리히의 스키장에 갔더니 이건 또 무슨 세상인지! 게다가 일본 사람들이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설원에서 촬영을 하더라고요. 문화 충격에 잠을 잘 수가 없을 정도였어요. 세계를 봤으니 한국에만 머무를 수 없다, 파리에 꼭 돌아가겠다 다짐했죠. 누군가는 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그 누군가는 진태옥이라고 못박고, 진짜 1989년에 파리로 돌아갔어요. 성공하겠다는 강한 포부가 있던 건 아니고, 한국에 이런 디자이너가 있다고 알리는 깃발을 꽂기 위함이었어요. 그때의 파리 하늘색, 냄새와 공기, 날씨를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지금도 그런 날씨엔 향수에 빠지곤 해요.

Q : 디자이너로서의 시작을 떠올리게 하는 한 장면이 있을까요?

A : 제주도로 피난 갔던 16세 때예요. 창호지 사이로 들어온 햇빛이 빨랫줄에 걸린 흰 셔츠를 통과해 저한테까지 닿았어요. 그때 섬유의 아름다움과 셔츠라는 아이템의 매력을 깨달았죠. 디자이너로서 첫사랑과도 같은 장면이에요. 햇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셔츠가 바람에 살랑이던 모습… 그 장면, 순간, 소리… 그 찰나가 제 영혼의 울림이 됐어요.

Q : 찰나가 선생님을 디자인으로 이끌었군요.

A : 네. 그 찰나가 어떨 땐 내 영혼을 막 흔들어놔요. 어떨 땐 너무 찬란해요. 너무 찬란해서 때로는 외롭기도 해요. 물론 그런 일이 밤낮으로 있는 건 아니에요. 어느 순간 그냥 느끼는 거라서. 대신 저는 그걸 절대 안 놓쳐요. 아주 꽉 붙들고 작품에 녹이죠.

Q : 예술가의 말이네요. 그렇다면 디자이너 진태옥을 완성한 수많은 장면 중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

A : 어느 날 아침, 평소처럼 흰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나가기 전 거울 앞에 섰어요. 그런데 그 순간 ‘오늘의 이 장면을 이루기 위해 50년이란 세월을 달려왔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나를, 내 작품 세계를, 나의 정체를 찾은 거죠. 또 한번은, 산에 갔다가 발견한 죽은 나뭇가지를 사무실의 백자에 그냥 푹 꽂아둔 적이 있었어요. 그걸 본 독일 총리가 이 실내 분위기를 레퍼런스로 자신의 집을 꾸며봐도 되겠냐길래 그러라고 했죠. 시간이 좀 지나 코로나19가 한창일 때 총리 부인에게 문자가 왔어요. “남편이 마담 진한테 배워서 이렇게 꽂았는데, 건강한지 연락해보라더라”며 항아리에 뭘 꽂은 사진을 보냈더군요. 내가 남에게 이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란 게 흐뭇했죠. 옷은 내가 이룬 세계고, 공간은 나라는 사람을 나타내잖아요. 이 2가지를 깨달은 순간 그저 앉아서 “그래, 그래, 그래…” 하고 되뇌었어요.

Q : 어떤 업적을 이룬 장면을 말씀할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내가 이룬 것보다 나라는 사람을 깨달은 게 더 중요했다는 거죠?

A : 그냥 기록이지, 업적까지는….(웃음) 내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에요. 잊지 못하는 기억이 또 하나 있어요. 오래전 부산에 갔을 때 어떤 아가씨가 보자기를 들고 온 거예요. 그걸 풀었더니 자기 어머니가 아껴 입은, 제가 디자인한 원피스가 나왔어요. 그 안감에 사인을 해달라고…. 너무 감동받았어요. ‘이 옷을 소장하는 데 가치를 두다니 디자이너 하길 참 잘했다’ 싶었죠. 제겐 이런 기억이 더 소중해요.

Q : 한 가지 일을 오래 한 기쁨은 무엇인가요?

A : 일은 그냥 내 삶이에요. 그리고 열정이 곧 내 생명인데, 열정이 식지 않았으니 생명은 연장되고 있죠.

Q : 오랫동안 일하며 어려움은 없었나요?

A : 솔직히 없어요. 어려움이 오면 긍정적으로 생각하거든요. 내가 느끼는 것에서 20%만 생각하면 모든 걸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답니다. 그 안에 핵심적인 문제가 있고, 80%는 거품이라 시간이 해결해줘요. 욕심을 덜어내야 해요. 그러면 마음의 평안을 지키게 되고, 이렇게 건강할 수 있죠.(웃음)

Q : 그럼에도 아직 욕심이 생기는 게 있다면요?

A : 좋은 쇼를 보면 가슴이 뛰고 나도 하고 싶단 생각이 들어요. 또 음악 공연을 좋아하는데, 좋은 곡을 들으면 패션쇼 장면을 꿈꾸곤 해요. 작품을 하는 것에 아직도 열정이 있어요.

Q : 인생에서 가장 용감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A : 결혼이지, 뭐. 그건 정말 도전이잖아요!(웃음)

Q : 한국인 최초 파리 프레타포르테 진출이라든지 일하면서 했던 도전보다 결혼이 더 큰 도전인 거예요?(웃음)

A : 그럼요! 왜 결혼을 했을까….(웃음) 그래도 그 덕분에 오늘의 진태옥이 있는 거죠. 일하면서 생긴 사건 중엔 역시 첫 파리 컬렉션이에요. 뭘 모르면 용감하잖아요. 저랑 악수하려고 기다렸다는 수지 멘키스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지도 몰랐고. 그리고 바이어가 60번까지 뽑은 디자이너 명단을 보니 겐조가 59번, 제가 54번이더라고요. 첫 성과가 그렇게 나타나니 농담으로 “에이, 파리 애들 별거 아니네!” 하기도 했어요.(웃음)

Q : 여성 진태옥의 삶은 어땠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A : 축복. 그 이상의 표현은 없어요. 주변의 모든 사람이 저를 아끼고 사랑해주거든요. 날씨가 좋다거나 무언갈 보고 제 생각이 났다며 연락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해요.

Q : 선생님을 보며 꿈을 키울 청년들에게 한마디해준다면요?

A : 손자들에게 딱 하나 하라고 한 게 있어요. ‘10년 후의 내 모습 그리기’! 10살 땐 20살의 나를 그리고, 20살이 되면 30살의 나를 그리고, 30살엔 40살의 나를 그리고…. 그 나이가 됐을 때 그림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비교해보는 거죠. 그게 있어야 인생을 갈 지(之) 자로 안 걸어요. “그러니 환상이라도 좋아, 이루지 못한다 해도 괜찮아. 그러나 그림은 그려놔.”

「 Bodybuilder 임종소 」
1944년생. ‘나’를 찾는 일엔 때가 없다. 75세에 웨이트를 시작해 WNC 시그니처 보디피트니스 대회 비키니 부문 우승, WBC 피트니스 오픈 월드 챔피언십 2위를 기록한 무시무시한 저력의 보디빌더.
톱 가격미정 잉크. 데님 팬츠 10만8천원 프롬웨얼. 귀고리 4백28만원 에스트리.

Q : 5년 전 시니어 보디빌더로 세상에 알려지고 나서 많은 사람에게 ‘건강 전도사’ 역할을 하고 있죠. 주변 반응은 어떤가요?

A : 며느리나 친구들 같은 주변 사람들은 물론, 젊은이들 중에도 절 보고 운동을 시작했다는 사람이 많아요. 다니는 체육관엔 제 옆에서 자극받으며 운동하고 싶다는 사람들 대기가 걸려 있대요. 그런 얘기 들으면 보람을 느끼죠.

Q : 웨이트트레이닝 시작 전엔 에어로빅을 오래 했다고 들었어요.

A : 30대에 대중목욕탕을 운영했어요. 새벽 5시에 문 열고 저녁 9시에 닫는데, 카드도 없고 현금만 쓰던 시절이니 내내 앉아서 돈을 만졌죠. 그렇게 오래 앉아 일하니 몸이 점점 동그래져서는 30대 후반에 58kg까지 쪘어요. 지금 몸무게가 46kg인데 말이죠. 그래도 남편이 현명한 구석은 있어서, 부인이 건강해야 자기도 편하단 걸 알고 운동을 해야겠다더라고요. 마침 목욕탕 옆 새 건물에 에어로빅 센터가 생겨 다니기 시작했어요. 하다 보니 즐겁고, 6개월 정도 하니까 몸이 정리되더군요. 그렇게 시작해 35년을 했어요.

Q : 35년 동안 꾸준히요?

A : 네. 제가 원래 뭐든지 하나를 시작하면 무슨 사정이 생기지 않는 이상 끝까지 하는 스타일이에요. 목욕탕 정리하고 제주도에 내려가 살았을 때도, 손녀들 언어 교육 때문에 딸이랑 캐나다에서 지냈을 때도 에어로빅은 계속했어요.

Q : 웨이트는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건가요?

A : 어느 날 허리에 협착이 왔어요. 의사 선생님이 근육이 감소해 그런 거니 근육 운동을 권유하더라고요. ‘맞춤 운동, 재활 운동’이라고 적힌 헬스장을 봤던 게 생각나 가봤죠. 관장님도 근육을 키우면 통증을 줄일 수 있다길래 그 자리에서 등록하고 일주일에 세 번 1시간씩 PT를 받았어요. 한 달쯤 지나니 통증이 사라지는 거예요! 이게 내 갈 길이다 싶어 계속했죠. 이제 이사해 사는 동네도 다른데, 아직도 매일 1시간 반씩 지하철이랑 버스 타고 그 체육관에 가서 운동하고 와요. 3년 전엔 트레이너 자격증도 땄어요.

Q : 트레이너 자격증까지 딴 이유가 있나요?

A : 몇십 년 더 해야 하는데 제대로 알고 해야죠. 영어도 모르는데 근골격 용어를 외우려고 영어 독음을 한글로 써서 밤을 꼬박 새워가며 공부했어요. 덕분에 1년 반 전부터는 PT 없이 혼자 운동해요.

Q : 정말 한 우물을 제대로 파는군요.(웃음) 운동 외에도 놓지 않는 게 있어요?

A : 춤이요! 에어로빅 할 때 음악을 아주 즐겼어요. 빠른 템포로 뛰는 것도 좋아했는데, 노인이 돼 약해지면 못 할 수도 있겠다 싶어 노후 대책의 일환으로 춤을 배웠죠. 처음엔 지르박이라는 사교댄스를 배웠는데, 다른 사람이랑 시간도 맞춰야 하고 내가 남을 힘들게 할 수도 있어 불편하더라고요. 나 때문에 누가 피해를 보는 건 상대가 누구든 딱 싫거든. 그래서 혼자 추는 춤을 찾아 젊은 사람들이 다니는 댄스 학원에 냅다 갔어요. 배워보니 춤도 모던, 라틴, 탱고 등 10가지가 넘더라고요. 하나씩 배웠어요. 지금도 일주일에 두 번은 시니어 동아리에서 춤추면서 즐기고 살아요.

Q : 70대에 웨이트를 시작해 보디빌딩 대회에 출전하고, 영어를 못해도 자격증 공부를 하고, 혼자 댄스 학원 문을 두드리는 등 새로운 세계로 발을 들이는 용기는 어디서 비롯됐나요?

A : 무언가 도전할 게 생기면 이런 생각이 들어요. ‘같은 인간인데, 누구도 하는데 내가 왜 못 해? 내가 바보야?’(웃음) 여자라고 못 할 것도 없고 나이 많은 것도 상관없는 거예요, 뭐든. 근데 저도 예전엔 도전 정신이 이렇게 강한 줄 몰랐어요.

Q : 어떻게 스스로가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나요?

A : 제가 24살에 결혼했는데, 남편이 아주 가부장적이고 강한 성격이었어요. 저도 대단한 성질을 가진 사람인데, 남편에게 맞서면 싸워야 하고, 싸우다 보면 자식이 둘이나 있는데 이혼을 하게 될 것 같고…. 근데 남편이 나쁜 사람은 아니라서 “당신 말이 맞아요, 당신 하라는 대로 할게요”하고 살면 별문제가 없었죠. 그러니 그렇게 마음먹고 45년을 살았어요. 남편하고 자식만 알고 살았지, 나는 없었어. 임종소란 사람은 없었어. 그러다 남편 떠나고 혼자 되고 보니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되더라고요. 그러다 허리 협착 때문에 웨이트를 시작했고, 보디빌딩 대회에 나가고, 외신이랑 방송에도 나오고…. 그러면서 깨달았죠. ‘아, 이게 나였구나. 내가 이렇게나 도전 정신이 강한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갇혀 살았구나.’

Q : 내가 아닌 채 산 시절에 대한 후회는 없었나요?

A : 후회는 안 해요. 자식을 잘 길렀으니까. 내 발등을 내가 찧은 건 자식들을 책임지기 위해서였어요. 그리고 잘 키웠잖아요. 그러니까 후회 없이 살았습니다.

Q : 비록 65세까지는 갇혀 살았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는 ‘나’로서 살고 있잖아요. 여자 임종소의 삶을 돌아보자면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A : ‘인생은 살고 볼 일이다’…. 남편이 떠났을 땐 살아야 하나, 죽어야 하나, 그 두 길밖에 안 보였어요. 난 전업주부였는데, IMF 때문에 갖고 있던 건물도 팔았고, 아들 사업도 무너진 상황이라 더 막막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방송에도 나가고 모델로도 활동하는 인생을 살 줄 생각이나 해봤겠어요? 살다 보니 이렇게 좋은 일도 생기니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궁금해지더라고요. ‘그러니 어디 한번 가보자!’ 하며 인생을 살게 됐죠.

Q : ‘어디 한번 가보자!’란 마음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게 있나요?

A : 몸이 허락하는 한 운동은 계속할 것이고, 기회가 생긴다면 국제대회를 한번 나가보고 싶어요. 입상이나 등수에 욕심 내는 건 아니고요. 국제대회에 나간다는 건 외국인들과 겨룬다는 거잖아요? 한국에서 임종소란 사람이 왔다고 보여주고 싶은 거죠.(웃음) 예전에 BBC 방송에서 화상 통화를 한 적 있으니, 세계에 나를 또 한 번 알릴 기회가 될 수 있겠죠.

Q : 그렇다면 야심은요?

A : 지금처럼 먹는 약 없이 건강하게 운동하는 것.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에게 건강한 롤모델이 되며 사는 것.

Q : ‘멋있는 할머니’란 어떤 사람일까요?

A : 그 소리 많이 듣는데, 저 아닐까요?(웃음) 망설이지 않고 도전하는 사람이죠. 저를 봐요. 75세에 웨이트를 시작했는데도 근육이 불끈 나오는 걸 느꼈잖아요. 이 나이에도 하면 되더라는 걸 알리고 싶어 대회도 나간 거라고요. 멋있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면 도전을 해라! 하면 된다.

Q : 선생님에게 건강한 인생이란?

A : 내 건강을 내가 챙기는 인생.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녜요. 젊어서부터 건강관리를 해야지, 효자나 배우자가 있다 해도 내 건강은 대신 못 해줘요.

Q : 선생님을 보면서 용기를 얻을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A : 젊어서부터 인내력과 지구력을 키우고 건강관리를 하세요. 구닥다리 같은 소리라 느낄지 모르겠지만 저는 여러모로 부족한 게 많은 환경에서 살았잖아요. 요즘 젊은이들은 우리보다 좋은 게 너무 많단 말이죠. 그런데 부모들이 고생 안 시키려고 화초처럼 키운 면이 있어 인내력도 지구력도 약하다는 느낌을 받아요. 식단은 또 인스턴트 위주라 건강 약해지기도 쉽지.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 정확한 운동을 50분에서 1시간 정도만 규칙적으로 하세요!

「 Poet 신달자 」
1943년생. 사람의 마음을 읽고, 쓰고, 매만지며 수백수천 편의 시를 썼고, 136권의 책을 냈다. 계집애, 딸, 여학생, 엄마, 할머니, 어떤 명칭으로도 한정되지 않고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왔다는 신달자 시인의 시와 삶.
재킷 1백29만9천원 빅팍. 드레스 32만8천원 킴지수. 장갑 가격미정 한킴. 안경 28만9천원 젠틀몬스터. 목걸이, 슬링백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반지 본인 소장품.

Q : 젊은 시절 아버지의 일기를 읽은 걸 계기로, 사람의 마음을 보기 위해 문학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으셨다고요. 시를 쓰며 보니 사람의 마음은 어떻던가요?

A : 시와 같아요.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에 다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본다 해도 단면일 뿐이죠. 이 지구상에 몇천 년 전부터 많은 시인이 있었겠지만 여전히 우리가 건드리지 못한, 한 나라에 버금가는 공간이 마음에 남아 있을 거예요. 사람의 마음은 어마어마한 우주와도 같은 것이죠.

Q : 등단하고 60년이 흘렀어요. 24년 동안 남편을 수발하고 아이 셋과 손자들까지 키우면서도 시를 꾸준히 썼는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글을 쉬지 않고 써왔다는 게 놀랍습니다.

A : 남편 병수발로 중환자실에 있던 어느 날, 어머니가 제게 전화를 했어요. 그땐 중환자실에 전화를 잘 안 바꿔줬는데 직원이 다급히 찾더군요. 제 어머니가 “딸 음성만 듣고 죽게 해달라”고 했대요. 그땐 저도 가슴이 터질 것같이 힘들어서 전화를 받자마자 “왜!” 하고 화를 냈죠. 근데 엄마는 아주 낮고 힘겨운 목소리로 “그래도… 니는 꼭 될 기다”라는 말만 하시고, 얼마 후 돌아가셨어요. 저는 그 한마디를 지팡이로 삼고 인생을 살았어요…. 누구나 인생에 어려움이 와요. 그런데 그걸 타개하는 데는 꼭 조건이 있습니다. 내가 가야 할 곳이 저기 있으니 이 어려움이라는 강을 어떻게든 건너가야 한다는, 발이 아파 걸어서 못 가면 온몸으로 굴러서라도 저 너머에 가야 한다는 야망과 인내심과 의지요. 어머니는 제가 어릴 때부터 시집 잘 가야 한다는 말 같은 건 안 하셨어요. 공부 잘해야 한다, 사회에 필요한 인물이 되라고만 했죠. 제겐 늘 세상에 나가서 뭔가를 해야 한다는, 사회적 욕망이 있었어요. 엄마의 마지막 한마디가 그 욕망에 불을 붙였고요. 이런저런 상황으로 생긴 상처를 오히려 횃불로 삼고 ‘우리 엄마가 가라고 한 곳이 저기 있다’며 기를 쓰고 어려움이란 강을 건넌 겁니다.

Q : 그렇게 악착같이 글을 쓸 수 있었던 건 어머니의 유지가 컸군요.

A : 내가 처한 환경이 그 힘을 주기도 합니다. 전 자식이 있고 가장 역할을 해야 했죠. 그걸 동력 삼았어요. 6인실 화장실에서 글 쓰고, 밤에 또 마저 쓰고 그렇게 살았답니다. 제 일을 놓은 적이 없어요. 그때 나온 소설이 〈물 위를 걷는 여자〉인데, 150만 부나 팔리고 드라마와 영화로도 만들어졌어요. 덕분에 병원비, 애들 학비며 결혼 비용까지 다 댔고 저는 대학원에서 박사까지 넉넉하게 마쳤어요. 인간이라면 사회적 욕망이 있습니다. 특히 여자들은 지금 안 보이는 것 같아도 헤집어보면 다 있어요. 그걸 덮어놓고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어이 들춰내 나같이 횃불 들고 가는 사람이 있는 거죠.

Q : 선생님에게 시란 무엇인가요?

A : 내가 호흡하는 공기. 누군가 앞으로 절대 쓰지 말라고 하면 전 숨을 못 쉴 거예요.

Q : 점점 시를 읽지 않는 시대죠. 청년들에게 시를 권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A : 요즘엔 영상 시대라 다들 눈을 ‘보기’에만 쓰죠. ‘읽기’에 써보세요. 굉장히 달라질 겁니다. 인간은 감정적 동물이라 감정을 쓰다듬어줘야 하는데 글을 읽으면 그런 정서를 느낄 수 있어요.

Q : 과거의 한 인터뷰에서 “시는 공감대가 필요하다”고 말한 게 기억에 남았어요.

A : 시는 다른 사람이 읽고 ‘이거 내 이야기야’라고 공감할 수 있어야 해요. 공감이야말로 인간의 불완전한 구석을 채워주잖아요. 마음 한구석이 허전한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시가 있을까요? 지난해 낸 〈전쟁과 평화가 있는 내 부엌〉이라는 시집을 추천하겠어요. 외로움도 고통도 신음도 다 끌어안고, 아픈 몸과 정신과 내가 화합하는 내용이에요. 재작년에 폐 수술을 하면서 정신적으로 많이 무너졌는데, 아픈 몸과 마음을 무덤까지 내가 끌고 가야겠더라고요. 안 외롭고 안 아프려고 용쓰며 살았는데 딱 내려놓게 됐죠. 외로움과 아픈 몸에게 그냥 함께 가자고 썼어요. 위로가 필요하다면 〈열애〉라는 시집이 상처와 열애하는 내용이라 권하고 싶습니다.

Q : 선생님의 인생을 꿰뚫는 시를 꼽자면?

A : ‘등잔’이라는 시를 말하고 싶네요. 백자 등잔을 사놓고 방치한 적이 있어요. 어느 날 집구석에서 발견해 잘 닦아서 불을 켜봤더니 너무 황홀한 불빛이 나오더라고요. 거기서 여자를 봤죠. 현실을 살아내느라 버려진 줄 알았지만 불을 켜보면 황홀한 빛을 낼 수 있는 몸.

Q : 여성 신달자의 삶은 어땠나요?

A : 계집애, 딸, 여학생, 엄마, 할머니 등 어떤 명칭으로 한정되지 않고 남성 중심 사회에서 내 이름으로서 살았다는 건 굉장히 많은 고충을 지고 왔다는 거죠. 여자가 한 인간으로 서는 데는 남자보다 훨씬 높고 단단한 기반이 필요했으니까요. 그런데 그럼에도 해내는 여자들이 있었기에 우리나라가 여기까지 온 겁니다. 옛날부터 한국엔 훌륭한 여자들이 많았어요. 일례로, 미스코리아도 하고 빼어나게 예뻤던 고등학교 친구가 있었어요. 그 친구가 서울의 한 은행에 취직했는데 업무가 뭐였는지 알아요? 은행 가운데 금빛으로 칠한 의자에 하루 종일 앉아 있는 거예요. 걔를 구경하러 온 남자들이 은행 상품을 이용하도록. 어느 날 아줌마들이 그 앞에서 “여자는 꽃이 아니다”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했어요. 그랬더니 다음 날부터 친구가 그 의자가 아니라 창구에 앉아 여느 은행원처럼 일을 하더라고요. 이게 1965년이에요. 그런 시절이 있었어요. 그날의 시위처럼 여성들이 어디선가 어떤 말을 하고 행동하며 사회를 변화시켰으니 오늘날만큼이라도 남녀평등이 이뤄진 거예요. 신문에 이름이 나야지만 훌륭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 옛날 평범한 여자들이 돌을 날랐던 덕분에 전쟁도 이기고 행주치마란 말도 생긴 거 알죠? 전 여성들에게 강의할 때 꼭 말합니다. 여성들이 세상을 바꾼다고요.

Q : 여성에게 3계명을 남긴다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가요? 어머님이 선생님에게 “죽을 때까지 공부해라, 돈도 벌어라, 행복한 여자가 돼라”라고 3가지 전언을 남겼던 것처럼.

A : 첫째, 인간관계를 잘 맺어라. 산다는 건 손을 잡는 일이에요. 더 중요한 건 그 손의 온기를 잊지 않는 것이고요. 그러니 감정적으로 대하지 말고 사람을 수용하는 삶을 사세요. 상황과 상대에 맞춰 빨간 사람도, 노란 사람도 될 줄 아는 것 또한 굉장한 능력이에요. 둘째, 외국어를 2개 정도는 공부해라. 우주는 하나니까요. 셋째, 세상이 달라지건 안 달라지건 확실한 자기주장이 있을 것. 옳다고 생각하는 거나 지켜야 하는 목표는 꼭 있어야 합니다.

Q : ’멋있는 할머니’란 어떤 존재일까요?

A : 울어본 사람. 마음 아파하고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많이 울어본 사람은 많은 걸 양해할 수 있겠죠. 그런 할머니는 남들 앞에서 소리 내지 않은 울음이 더 많을 거예요.

Q : 도전하고 싶은 게 있나요?

A : 결국 글을 쓰는 일이에요. 글을 쓰는 일은 곧 생각하는 일이고요. 아무리 늙어도 내가 경험하고 느낀 걸 세상에 남겨야죠. 그리고 여든이 넘고 나니,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는데 누굴 미워하며 보내는 게 나한테 손해라고 느꼈어요. 전 제 이익을 추구해요.(웃음) 그러니 모두를 아우르고 사람을 선하게 대하며 살다가 눈을 감을 겁니다.

「 Climber 송귀화 」
1949년생. 74세로 남극 빈슨봉을 등정한 순간, 송귀화는 세계 여성 최고령 7대륙 완등자로 우뚝 섰다. 노년으로 에베레스트, 엘부르즈, 디날리, 아콩카과, 코지어스코 등을 등정한 송귀화가 인생이라는 산을 오르는 방법.
드레스 코트 가격미정 페라가모. 장갑, 앵클부츠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Q : 지난해 12월, 남극 빈슨봉 등정에 성공해 세계 여성 최고령으로 7대륙 최고봉을 완등했다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A : 원하던 게 잘 마무리된 것 같아 시원해요.(웃음) 산행하면서 한 번도 체력이 떨어진다고 못 느꼈고, 갈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고, 인연이 잘 닿아 가능했죠. 운이 참 좋았어요.

Q : 어떤 계기로 산에 오르기 시작했나요?

A : 원래 바다를 더 좋아했어요. 직장 다닐 땐 토요일 저녁에 밤차로 내려가서 일요일 아침에 바다만 보고 올라올 정도로. 휴가도 꼭 섬으로 가고요. 그러던 어느 날 직장에 산악회가 있다고 한번 나와보라길래 갔는데 재미있더라고요. 저는 양주에서 태어나 양주에서 직장 생활하고, 바깥 세상을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였거든요. 그런데 산에 가면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으니 점점 재미를 붙였어요. 그러다 공무원 해외여행이 자율화되면서 해외에 나가볼 궁리를 하던 중, 유럽 최고봉이라는 엘부르즈에 누가 간다는 거예요. 멋도 모르고 따라갔죠. 하얀 산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고.

Q : 그렇게 떠난 첫 원정은 어땠나요?

A : 처음 갔을 땐 날씨가 너무 안 좋아서 아무도 못 올라갔어요. 내년에 다시 오기로 하고 귀국했죠. 대신 그때 같이 갔던 사람들에게서 많이 배웠어요. 어떤 분은 저보다 4살이나 많은데 너무 산을 잘 올라서 비결을 여쭤보니 일요일마다 친구들이랑 도봉산을 간대요. 한번 오라길래 갔더니 다 너무 빠른 거예요. 전 여름에도 땀 한 방울 안 흘리고 느긋하게 등산하는 편이었어서 따라가느라 진땀을 뺐죠. 그분들은 지리산도 중산리에서 화엄사까지 하루 만에 갔다 오고, 설악산 공룡능선도 하루 안에 다 도는 사람들이었거든요. 그래도 꾸준히 갔더니 점점 따라가게 되고, 몸도 완전히 익숙해졌어요. 그 상태로 이듬해 다시 엘부르즈를 갔을 땐 가뿐하게 올랐어요. 완전히 등산 체질이 된 거죠.1년 만에 엄청난 변화를 이뤘네요. 산을 오르는 건 저절로 되는 게 아니라 노력을 해야 가능하단 걸 알았죠. 그때 저보다 12살도 더 어린 젊은 남자도 지쳐서 몇 번 주저앉았는데, 저는 아주 꼿꼿하게 올라갔어요. 48살 여자가 그렇게 해내는 걸 보니 뭔가 좀 하겠다 싶었는지, 2000년에 북아메리카 최고봉인 매킨리(현재의 디날리)를 같이 가자고 하더라고요. 나같이 제대로 배우지도 못한 사람한테 매킨리에 가자고 할 사람이 주변에 없잖아요. 이건 무조건 가야겠다 생각해 사표 내고 갔어요.

Q : 산을 오르려고 사표까지요?

A : 왜냐하면 24일 정도 걸리거든요. 참 맹랑했죠.(웃음) 살면서 가장 용감했던 순간이었어요, 그게. 언제 그런 데를 가보겠어요? 그러니 기회를 잡아야지. 무슨 사표까지 내고 가냐며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이 많긴 했어요.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게 저기에 있으니까, 그때 못 가면 못 갈 것 같으니까. 그렇게 매킨리를 오르고 7대륙 최고봉 완등이란 목표가 생겼어요. 다른 데도 가보고 싶더라고.

Q : 과거 인터뷰에서 꼭 정상에 오르지 않아도 된다고 했던 말이 인상 깊었어요.

A : 정상에 오르는 건 내 의지만으로 되는 게 아니거든요. 날씨, 날짜 등 여러 조건이 맞아야 해요. 그래서 상황에 맞춰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겠단 마음으로 올라야 해요. 꼭 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엉켜요. 무리하다 목숨을 잃는 경우도 많죠. 아까워도 ‘다음에 오지, 뭐’ 하고 돌아설 줄 알아야 해요. 다음에 못 오더라도 다른 데 가면 되고. 과정을 즐겨야 안 다치고 오래 하거든요.(웃음)

Q : 등산하는 과정을 즐긴다는 건 뭘까요?

A : 잡념은 떨치고 올라가는 걸음에만 집중하는 거예요. 흐름이 깨질까 봐 사람들과 얘기도 안 해요. 올라갈 땐 올라가는 거에만 신경 쓰죠.

Q : 첫 원정이었던 엘부르즈를 포함해 최근 남극 빈슨봉까지, 산행 동료 중 여성도 있었나요?

A : 엘부르즈 갈 땐 혼자였고, 매킨리 갈 땐 둘이었고… 거의 혼자 가긴 했습니다. 여성 산악인 자체가 잘 없고, 한국여성산악회 멤버들도 젊은 사람이 없어요. 신입 회원이라고 들어오면 제일 어린 게 50대 후반? 애들 다 키우고 나서야 시간이 생기고, 남편이 안 좋아하는 집도 많으니까. 여자들이 그런 점에서 여건이 안 될 뿐이지, 제가 봤을 땐 잠재력이 상당해요. 마음먹으면 다 하는 성향이 강하거든요. 기회가 적을 뿐이에요. 저는 혼자였기 때문에 기회가 훨씬 많았던 거죠.

Q : 여성 동료가 없어 불편하진 않았나요?

A : 아쉽긴 했죠. 한 명이라도 더 있으면 텐트도 같이 쓸 수 있는데…. 혼자 쓰면 싱글 차지를 두 번 내야 하니 경제적인 이유로 그냥 남자랑 같이 썼거든요. 젊은 대원이랑 모자지간 같은 느낌으로.(웃음) 그냥 견디는 거였죠, 뭐. 그래도 올해 7월쯤 한국여성산악회 멤버들과 키르기스스탄의 우치텔봉에 가기로 했어요. 저는 한 번 가본 곳인데, 여자끼리 원정은 처음이니 기대돼요.

Q : 싱글인 덕분에 산은 맘껏 다녔지만 혹시 결혼을 안 한 게 아쉬울 땐 없었나요?

A : 전 지금이 제일 편해요. 내가 다 알아서 할 수 있고. 오히려 누가 옆에 있으면 진짜 귀찮을 것 같아. 누굴 끼고 살 성격은 아닌가 봐요.(웃음) 이젠 일상 루틴이 생겨서 심심할 시간도 없어요. 오전엔 등산하고, 오후엔 헬스장 가고, 헬스 끝나면 목욕하고 올라와서 TV도 보고 할 일 해야죠. 이렇게 사는 게 제 행복이에요.

Q : 멋지네요. 많은 여성이 롤모델로 삼을 법해요.

A : 저는 젊을 때 집에서 벗어날 생각만 했어요. 막내라 오빠 밑에서 농사를 도와야 했거든요. 그땐 간호조무사 자격증이 있으면 서독을 가던 시절이라 어렵게 자격증을 땄는데, 따고 나니 그 길이 막힌 거예요. 그래서 집에서 일만 하다가 서른 살 무렵 그 자격증 덕분에 보건소에 취직했고, 그 덕분에 이렇게 산에 다닐 돈도 모은 거죠. 그러니까 뭐든지 경제적으로 자립을 해야 하는 거야.

Q : 그 시절에 자립을 고민한 게 신기해요. 태어난 환경과 처지를 당연히 받아들이던 시절이잖아요.

A : 언제까지나 집에서 농사일만 하고 싶진 않았어요. 내 것도 아닌데! 오빠한테 돈 타 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고.(웃음)

Q : 요즘 여자들 중엔 선생님처럼 비혼으로 살면서 하고 싶은 것 하고, 나만의 루틴을 만들어 지키고, 내가 즐거운 하루하루를 사는 게 꿈인 사람도 많아요. 어떻게 해야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A : 내가 진짜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게 뭔지 찾고, 그걸 재밌어 하면서 열심히 하면 원하는 게 다 이뤄진다고 생각해요. 대신 억지로 하려고 해선 안 돼요. 진정으로 원하고 좋아하는 걸 꾸준히 계속하면 뭐든지 못 할 게 없어요.

Q : 그럼 선생님은 무엇에 재미를 느끼나요?

A : 여전히 산에 가는 거죠. 걷는 게 좋아요. 비 오는 날에도 우산 쓰고 산책로를 길게 걷고 와요.

Q : 7대륙 최고봉은 다 올랐는데, 또 도전해보고 싶은 게 있나요?

A : 세계는 넓잖아요. 걷기 좋은 길이 많아요. 네팔에는 베이스캠프를 도는 코스도 있더군요. 그런 트레킹 코스를 열심히 찾아서 열심히 돌아다녀야죠!

Q : ‘멋있는 어른’이란 어떤 존재일까요?

A : 정신적·육체적·경제적으로 자립한 사람. 그러면서도 자기가 재미있는 것 하면서 사는 게 멋진 어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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