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로비였네?… 전시관 뒤집다

손영옥 2024. 3. 5.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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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틀 깬 아트선재센터·리움미술관
리움, 아트선재센터 등 사립미술관을 중심으로 로비 공간을 본격적인 전시 공간으로 활용하는 전시가 시도되고 있다. 현대미술에서 유기물이 작품의 매체로 등장하는 등 화이트 큐브 문법에 도전하는 작가들의 요구를 적극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사진은 아트선재센터 로비에서 열리고 있는 댄 리 개인전 ‘상실의 서른 여섯 달’ 전시 전경. 아트선재센터 제공


미술관 로비에 들어섰다. 야외에서나 맡을 수 있는 흙냄새와 발효한 술 냄새 같은 게 훅 끼쳐온다. 흙더미에는 장독이 있고 천장에서 늘어뜨린 밧줄에는 매달린 국화에서 향이 뿜어 나온다.

서울 종로구 율곡로 아트선재센터에서 진행 중인 댄 리(36) 개인전을 최근 찾았더니 이처럼 로비에 시골 마당 같은 전시가 연출되고 있었다.

미술관 로비가 변신하며 ‘화이트 큐브(흰색 입방체 공간) 전시 문법’을 깨고 있다. 로비는 호텔· 공연장 등에서 응접실, 통로 등을 겸해 사용되는 넓은 공간으로 사람들이 대기하며 쉬거나 만남이 이뤄지는 공간이다. 미술관 로비도 그런 역할을 충실히 했고, 아트 토크, 전시 개막식 개최 장소로 쓰이기는 했지만 이처럼 미술관의 핵심인 전시공간으로 탈바꿈하는 것은 최근 2년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모더니즘 전시 문법을 깨는 이런 시도는 규제가 강한 국공립보다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사립에서 시도되고 있다. 아트선재센터와 리움미술관이 그 선봉에 있다.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인도네시아계 브라질 작가 댄 리가 아트선재센터에서 하는 개인전 ‘상실의 서른 여섯 달’은 화이트 큐브가 강제한 전시 조건에 반기를 들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즉 작가는 한국에서 첫 개인전을 하며 흙, 꽃, 버섯, 곰팡이, 효소 등 비인간 행위자를 전시 요소로 끌어들였다. 유기체의 탄생과 확산, 소멸을 보여주기 위해 그 순환 과정을 관찰할 수 있는 생태 시스템을 전시장 안에 구축한 것이다.

유기물을 전시한다는 것은 기존에는 통용되지 못했다. 아트선재센터 김장언 관장은 5일 “통상의 화이트 큐브는 작품 보존을 위해 항온항습 조건을 유지하고 멸균 처리를 해야 했다. 미생물이 자랄 수 없는 환경이다. 그래서 전시장 안에 흙을 부어도 멸균처리를 해야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런데 댄 리의 경우 전시장 안에 식물이 자라게 하고 누룩으로 술을 발효시키는 것이 전시의 주콘셉트이다. 이처럼 화이트 큐브가 수용하는 전시 조건을 깨뜨려야 하는 새로운 전시 프로젝트가 인류세, 기후위기 시대를 맞아 새롭게 등장함에 따라 로비가 대안으로 적극 활용되는 측면이 있다”고 했다.

현대미술에서 마침내 살아있는 생물을 다루기 시작했다는 것은 주목할 일이다. 유기물은 1960년대부터 현대미술에서 작품 소재로 등장했다. 하지만 그때는 주로 버려진 장소 등이 전시 공간으로 활용됐다면 지금은 화이트 큐브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는 점에서 과거와 다르다. 현대미술의 역할이 달라짐에 따라 작품의 전시와 보존, 관리와 유지 등이 책무였던 20세기 미술관의 개념도 낡은 것이 돼 환골탈태해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아트선재센터 로비에서 지난해 열린 ‘서용선: 내 이름은 빨강’전 전경. 아트선재센터 제공


아트선재센터는 지난해 7월 중순∼10월 하순에는 중견 작가 서용선(73) 개인전 ‘서용선: 내 이름은 빨강’전을 했다. ‘미알못’(미술을 알지 못하는) 대중에게는 어려울 수 있는 설치미술이나 미디어아트 전시 위주로 해온 아트선재센터가 회화 전시를 본격적으로 해 관객의 심리적 문턱을 낮췄다는 점도 그렇지만 전시장 가는 길목인 로비부터 전시 공간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관객을 마중 나온 듯한 효과를 냈다.

리움미술관에서 지난해 상반기 선보인 마우리치오 카텔란 개인전으로 이는 리움이 로비를 전시 공간으로 본격적으로 활용한 첫 전시였다. 리움미술관 제공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 리움미술관도 리노베이션을 거쳐 2021년 10월 재개관한 뒤 ‘로비 엄숙주의’를 깨고 로비를 전시공간으로 적극 끌어들이는 행보를 보인다. 리움을 새로 지휘하는 김성원 부관장은 지난해 선보인 이탈리아의 작가 마우리치오 카텔란(64) 개인전으로 로비 전시의 포문을 열었다. ‘입 닥쳐!’라는 듯 코르크 마개를 입에 문 남성을 찍은 사진 작품으로 기둥을 감싸고, 기둥 아래에는 한국의 노숙자를 형상화한 극사실주의 조각을 두었다. 곳곳에 비둘기 조각 작품을 풀어놓기도 했다. 덕분에 재개관 후 기둥은 물론 카운터, 물품보관소 등 모든 구조물을 부와 권력의 상징인 검은색으로 치장해 위압감을 느끼게 했던 로비가 대중에게 편하게 내려왔다는 호평을 받았다.

리움미술관 로비에서 지난해 하반기 열린 강서경 개인전 ‘버들 꾀꼬리’ 전경. 리움미술관 제공


이어진 여성 작가 강서경(47) 개인전 ‘버들 꾀꼬리’는 3차원 공간에 산수를 그리고 싶었다는 작가의 생각을 실현하듯 로비 공간에 나이테를 연상시키는 조각 작품을 놓았다. 벽면에는 조선 후기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형상화하듯 작품을 설치했다. 전시를 기획한 곽준영 전시기획실장은 “영상 작품을 전시장 안이 아닌 로비에 설치하자고 작가에게 제안하면서 조각 작품도 두는 등 로비 공간을 적극 활용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지금 진행 중인 프랑스 작가 필립 파레노(60)의 아시아 첫 개인전 ‘보이스(Voices)’에서는 로비를 마치 간이 극장처럼 꾸몄다. 이는 전시실 뿐 아니라 로비와 야외의 데크를 포함하는 등 전시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설치 작품으로 구현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반영됐다.

인공지능(AI)을 활용해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흐리고 이 둘의 결합을 탐구하는 작가는 야외 데크에 인공두뇌 역할을 하는 타워 ‘막(膜)’를 설치했다. 놀이공원 자이드롭 모양의 이 타워는 센서 기능이 있어 기온·습도·풍량·소음·대기오염과 미세한 진동까지 지상의 모든 환경요소를 수집해 미술관 내부로 보낸다. 타워가 보낸 데이터는 전시장 안 작품에 반영돼 사운드나 영상으로 변환되기도 하고 캐릭터의 인공 목소리를 자극하기도 한다.

로비의 경우 두 채널 영상이 있는데 한쪽은 자연 풍경, 한쪽은 그래픽 풍경이 펼쳐진다. 실제 풍경을 찍은 것 같은 자연 풍경은 AI가 만든 것이고, 오히려 다른 쪽이 데이터 정보가 들어와 실시간으로 바꾸는 그래픽 화면이다. 영상 주변으로는 반원 모양의 벤치가 있어 앉아서 볼 수 있도록 했다. 이것은 건축물 천장의 로톤다식 원형 구조의 둘레를 반원으로 한 것이다. 작가는 전시장의 건축적 형태까지 작품 속에 끌어들이고자 했다.

작가는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미술관은 닫힌 공간이다. 값비싼 작품을 보여주기 위해 조명을 여과시키고 항온·항습을 한다. 나는 전시장의 외부 공간까지 끌어들임으로써 거품 같은 화이트 큐브의 권위에 틈을 내고 싶었다”고 했다.

로비 전시는 관람객에 대한 배려의 측면도 있다. 통상 리움미술관은 상설전은 무료, 기획전은 유료로 진행이 된다. 로비에 작품을 전시함으로써 상설전을 찾는 관람객에게 무료로 기획전의 일부제공하는 효과를 거두는 것이다.

김성원 부관장은 “기존에 미술관은 공간별로 소장품 전시하는 곳, 기획전 하는 곳 등 위계가 있었다. 그런데 작가들이 점점 로비에 작품을 설치하고자 하는 등 고정관념을 허무는 요구를 적극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그런 요구를 무리가 없는 한 수용하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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