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진일보한 여성사: 프랑스가 최초로 헌법 상 낙태의 자유를 보장했다
2012년까지만해도 한국에서 낙태죄는 '합헌'이었습니다. 모체의 자유보다는 태아의 생명권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어요. 그리고 7년 후인 2019년 4월 11일, 이 판단이 뒤집혔습니다. 헌법재판소에서 '임신 초기' 낙태를 금지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린 것이죠. 그간 형법과 모자보건법 등의 법률 상 금지돼 있던 낙태죄가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는 걸 분명히 한 셈입니다.
2022년 미국 대법원은 '로 대 웨이드' 판결 이후 49년 만에 여성의 임신중단권을 박탈했습니다. '로 대(對) 웨이드(Roe v. Wade)' 판결은 '수정헌법 제14조의 적법절차에 의거, 임산부는 낙태 여부를 결정할 사생활 권리가 있다'고 밝히며 여성의 낙태권을 보장한 결정이었어요. 그런데 이를 뒤집은 미국 대법원의 판결 탓에, 세상이 다시 거꾸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조금이나마 앞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프랑스가 세계 최초로 헌법에 여성의 낙태권을 명시했습니다. 4일(현지시각), 프랑스 상원과 하원은 파리 베르사유 궁전에서 진행된 합동 회의를 통해 헌법 개정안을 가결처리했는데요. 여성에게 낙태에 대한 헌법적 권리를 주자는 개정안은 780표 대 72표로 압도적 찬성을 얻어냈습니다. 프랑스에서 낙태는 이미 1975년부터 합법화했지만, 이 권리를 헌법에 명시한 것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여성과 남성이 동일하게 누릴 수 있는 신체의 자유가 아니라, 오로지 여성만이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죠.
이 움직임은 올 초부터 본격적으로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1월 여성의 낙태권을 명시한 헌법 개정안 초안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제출했거든요. 2022년 미국 대법원의 판결 이후 우려된 낙태권 후퇴를 비가역적으로 막겠다는 모습이었습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일부 주(州)에서 임신 중단 금지 후 임신 중인 여성이 총에 맞아 아이를 유산했는데 태아 살해 혐의로 구속기소되는 등 끔찍한 사건들이 벌어졌습니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번 개정안 통과를 두고 '보편적인 메시지', '프랑스의 자부심'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는 줄곧 자신의 엑스(X, 옛 트위터)에 "여성의 낙태 자유를 헌법에 명시해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는 권리로 만들겠다"라고 약속해 왔는데요. 이로써 마크롱 대통령은 그 어렵다는 헌법 개정에 성공한 또 하나의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되겠군요.
한국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낙태 금지가 일부 헌법불합치한다는 판결이 있던 2019년 이후, 헌법재판소는 국회에 2020년 12월 31일까지 대체 법안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국회는 그렇게 하지 않았죠. 결과적으로 2021년 1월 1일부터 낙태죄 조항은 효력을 잃었지만, 낙태권을 보호할 수 있는 법안은 없습니다. 프랑스의 역사적 결정 이후, 한국의 상황도 바뀔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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