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일로 시작한 노동자동맹파업

박종선 2024. 3. 4.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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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기] 부천시의 항일독립운동과 일제잔재청산의 중심은 부천역 남부

[박종선 기자]

3·1절을 맞이하여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는 부천촛불행동 회원들과 함께 부천역 남부지역 역사답사를 진행하였다. 부천역 남부는 일제에 맞서 독립을 쟁취하고자 한 항일운동과 일제가 우리 민족을 지배하고 수탈하기 위해 각종 기관들을 설치한 억압의 역사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개발로 옛모습은 사라지고 변화하였지만 역사는 아직 우리들 삶 속에 살아있다. 그 역사에 대해 함께 알아보는 뜻깊은 답사였다.
 
▲ 부천역 남부 잔디광장에 모인 부천촛불행동과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 회원들 부천의 항일독립운동과 일제잔재 청산 답사
ⓒ 박종선
 

부천역 남부에는 항일독립운동을 설명하는 안내판이 총 3개 설치되어 있다. 경기문화재단이 지난 2018년 말에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설치한 것으로 연대순으로 살펴보면 1919년 3월 24일에 일어난 계남면사무소 습격사건, 1927년 9월 23일에 일어난 소사역하역노동자동맹파업 그리고 1927년 10월 28일에 일어난 부평농민조합운동이 그것이다. 부천에서 잊혔던 역사를 다시 살아나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안내판으로 답사 또한 이 안내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부천의 3·1운동은 소사리독립만세운동

부천의 3·1 운동은 3월 24일에 일어났다. 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의 열기가 23일 후에 부천에 도달한 것이다. 밤에 소사리(素砂里) 부근 여섯 개 마을 주민들은 높은 곳에 올라 봉화불(篝火)을 피워 놓고 독립 만세를 외쳤는데 소사주재소 순사가 출동하여 해산시켰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 1919년 3월 25일 고제(高第) 8,758호 <독립운동 관계의 건>(제26報) 2 소사리독립만세운동을 설명하는 자료
ⓒ 박종선
 
이전에는 계남면사무소 습격사건도 부천의 3·1운동이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이는 인천시 계양의 장기리 황어장터 만세 운동 일환으로 벌어진 계양면사무소 습격 사건을 보고하는 과정에서 '계양면'을 '계남면'으로 잘못 표기하여 발생한 오류(양경직 계남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연구 발표)가 와전된 것이었다.

계남면사무소 습격사건에 대한 안내판 수정을 위해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는 독립기념관과 경기문화재단 담당부서에 공문과 함께 이를 설명하는 책자를 보내드렸다.

소사역하역노동자동맹파업

소사역하역노동자동맹파업은 1927년 9월 23일에 일어난 노동운동으로 아주 사소한 일로 시작되었다. 소사역은 현재의 부천역으로 1899년 개통되었는데 경인선의 핵심 역할을 담당하였다. 바로 부평평야에서 생산된 쌀을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하는 것이었다.

일본인 역장이 하역노동자 1명을 자택으로 불러 1원 25전을 주면서 배(梨)를 사오라고 하였는데, 그때 화물을 실은 기차가 도착하자 하역노동자는 화물을 내려놓은 뒤 사온다고 하였으나 역장은 심부름을 얼른하지 않는다며 하역노동자 뺨을 때리며 발로 구타했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풀 때 없는 하역노동자 다섯 명은 다음날 휴업을 하며 동맹파업을 했다. 이 당시 소사역장은 이스도오 야스시조(石堂悌助)로 조선총독부 철도국 소속 직원이었다.
 
▲ 1927년 10월 1일 조선일보 소사역하역노동자동맹파업을 설명하는 조선일보 기사
ⓒ 박종선
부평농민조합, 경기도 최초의 소작 운동

일제는 산미증식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1923년 부평수리조합을 설치하여 한강물을 부평평야에 끌어와 농업용수로 활용하였다. 부평수리조합의 사무실이 심곡본동 663에 위치하게 되었는데, 부평수리조합은 그 당시 296만 원이라는 거대 자금을 들여 완성하였지만 부실공사문제, 1925년 대홍수로 끊임없이 공사비가 들어가게 되었다. 결국 여기에 대한 사업비 부담은 지주와 소작인들에게 지워질 수밖에 없었다. 1926년 풍년이 들었지만 수세가 추수의 4~5배나 되었다고 하니 지주나 소작인들 모두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내몰리니 1927년 10월 5일 지주들은 회의를 열고 구답 6할, 신답 5할이었던 소작료를 구답 6할 5푼, 신답 6할로 소작인들과의 협의 없이 올려버렸다. 이에 분노한 소작인들은 10월 15일 회의를 열고 10월 23일 오정면 오정리에서 부평농민조합 창립 총회를 열기로 결의하였지만 일본 경찰들이 집회를 열지 못하게 막자 1주일 후인 10월 28일 계남면 소사 정미소 창고로 옮겨 창립 총회를 열고 소작료 인하 방침을 결의하였다.

소작인 4000여 명 중 387명이 부평농민조합에 참여하였으며, 단결된 의견과 항쟁으로 결국 지주들의 소작료 인상안은 폐기되었다. 부평농민조합운동은 경기 지역에서 일어난 최초의 소작 항쟁으로 그 의미가 매우 크다하겠다.

하지만 그 이면을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다. 부평수리조합 내 지주가 300여 명이었는데 박용균(朴容均)이라는 지주만 소작료 인상을 끝까지 주장했다고 한다. 박용균은 그 당시 몇 명 없던 의사로 돈을 많이 벌어 지주가 된 사람으로 대정 3년(1914년) 3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인천에서 개업하여 1922년에는 면협 의원, 같은해 10월에는 위생조합장, 1924년에는 경기도평의원에 선출되었다고 하니 일제강점기 돈과 명예를 모두 가진 사람이었다.

1930년 7월 20일 조선매일신문에 의하면 부천군 대지주를 파악하는데 1등인 한다농장(半田農場) 1만 4000석, 2등인 교전구치(橋田駒治) 5000석에 이어 박용균은 3500석으로 3등을 했다고 하니 그 재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부내면 하리 박용균 의사 면협의원 위생조합장 경기도평의회 부평수리조합지주
ⓒ 박종선
   
▲ 1930년 부천군 지주현황 1등 반전농장, 3등 박용균
ⓒ 박종선
 
지역 유지가 면장, 임기는 최대한 오래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 개편으로 만든 부천군(富川郡)의 모습과 지금 부천시(富川市)의 모습은 많이 다르다. 부천군은 총 15개 면(面)을 거느린 거대한 행정구역으로 지금으로 보면 계남면(1931년 이후 소사면)과 오정면이 부천시에 해당이 된다. 그렇다면 계남면사무소(소사면)와 오정면사무소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 해답의 단초는 바로 여기에서 근무한 면장들에 있다.

부천군수 뿐만아니라 면장들도 조선총독부에서 임명하기 때문에 관보에 그 이름이 실린다. 1919년부터 1941년까지 관보에 실린 면장들의 이름을 확인해 보면 특이한 점이 바로 지역의 유지들이 면장을 했다는 것이며, 임기는 정해지지 않고 최대한 오래했다는 것이다. 면장을 대표하는 사람이 바로 계남면(소사면)에서는 원영상, 오정면에서는 변영모다.

원영상은 면장 외에도 소사금융조합장(素砂金融組合長), 소사방공본부(素砂防空本部)와 여자청년단(女子靑年團) 결성 등을 주도적으로 하였으며, 변영모는 1914년부터 16년까지 조선총독부 직속 기관인 임시토지조사국 측지과에서 기수(技手)로 근무한 후 소사금융조합(素砂金融組合) 감사(監事), 부평명덕회(富平明德會) 평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해방이 된 후 1952년에도 면장을 할 정도였다.
 
▲ 계남면(소사면)과 오정면 면장 임기와 명단 계남면(소사면)과 오정면 면장 명단, 임기. 원영상과 변영모
ⓒ 박종선
 
강제동원에 동원된 소사신사

부천에는 신사가 2개 있었는데 소사신사(素砂神社)는 현재의 심곡도서관(심곡본동 555-76번지)에 위치하였으며 오정신사(吾丁神社)는 여월동 1번지 도당교사거리에 위치하였다. 특히 일제는 지배를 공공히 하고 침략 전쟁을 미화하고 강제동원정책을 펴는데 소사신사를 많이 활용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행사를 보면 1937년 7월에 실시한 무운기원제, 12월 남경함락 축하행사, 1938년 7월에 진행된 청년단 연합결성식이 있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 후 부족한 물자와 인력을 보충하기 위해 강제동원을 실시했는데, 특히 지원병을 모집한 후 소사신사에 참배한 후 출발한 기사를 신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부천군 대부면 이승업(李承業), 소래면 안병희(安炳熙), 오정면 박승순(朴承順)이 대표적이다. 
 
▲ 지원병 소사신사 참배 부천군 대부면 이승업(李承業), 소래면 안병희(安炳熙), 오정면 박승순(朴承順)
ⓒ 박종선
이 외에도 일제의 자본이 들어와 조선의 금융을 잠식했던 소사금융조합, 부천에서 많이 생산되었던 복숭아를 비롯해 농산물을 위탁 판매했던 소사산업조합, 억압하고 통제하는 경찰관 주재소 등 다양한 기관이 존재하였다.

부천시의회는 지난 2021년에 <부천시 일제잔재 청산 지원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였으므로 부천시는 시민들이 이러한 내용들을 알고 답사할 수 있도록 안내판을 세우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안내판을 통해 짧은 시간 역사적 사실과 핵심 내용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안내판의 유무는 매우 중요하며, 답사도 안내판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디.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는 부천의 역사를 알고자 하는 분들이 해설을 요청하면 언제든지 도와드릴 예정이며, 항일독립을 기념하고 일제잔재를 청산하는 사업을 지속적으로 진행할 것이다.

추운 날씨에 2시간 가까이 참여해주신 회원분들게 감사인사 드린다. 
 
▲ 부천촛불행동과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 답사 단체사진 부천역 남부 잔디광장 단체사진
ⓒ 박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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