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지상낙원"... 유명 소설가의 거침없던 친일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2024. 3. 2.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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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정비석

[김종성 기자]

일제 치하에서는 단군을 숭배하는 대종교뿐 아니라 서양에서 들어온 기독교 신앙도 탄압을 받았다.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에서 16명이 기독교인인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으로 대한제국을 피보호국으로 전락시킨 1905년 전후는 한국인들이 정신적으로 혼란스러울 때였다. 이 시기에 인기를 끈 것은 일본 종교가 아니라 기독교였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어지럽히는 시기에 기독교가 교세를 늘렸다.

유학자이자 역사학자인 박은식은 독립운동의 피의 역사를 서술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1904년부터 1906년에 이르기까지 신도가 수십만으로 증가하였다"라는 말로 기독교 확장을 언급한 뒤 "일본인들은 이들을 배일파로 지목하고 은연중에 하나의 적으로 생각하였다"고 설명한다.

일제가 기독교를 혐오한 것은 유일신 사상 때문이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은 일왕(천황)을 숭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본은 한국인과 기독교를 떼어놓는 데 혈안이 됐다. "총독부에서 포교규칙을 제정하여 교회 관리자를 두고 교회당·설교소·강의소 등은 허가받지 못하면 설치할 수 없도록" 한 것도 그 때문이라고 박은식은 지적한다. 그는 1911년에 일제가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 혹은 105인 사건을 일으킨 것도 "교회 박멸"을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저들은 테라우치 암살 사건으로 120명을 체포하고, 기이하고 혹독한 형벌을 가하여 많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곧 교회를 박멸하기 위하여 허위로 날조한 죄안(罪案)으로 모함한 것이었다."

기독교와 일제의 대립은 일제강점 후반에 더욱 두드러졌다. 일본이 신앙 통일 혹은 정신 통일을 목적으로 강요한 신사참배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십계명 제1조와 정면충돌했다. 이는 수많은 교인들의 배교로 이어졌다.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적지 않은 교인들이 항일 순교의 길을 택하는 원인이 되기도 됐다.

정비석이 기독교 비판한 진짜 이유
 
 정비석
ⓒ 임응식
 
이런 상황에서 친일 소설을 써서 기독교인들의 정신에 파고든 작가가 있다. 장편소설 <자유부인>으로 유명한 정비석이 바로 그다. 그는 기독교인을 일왕 신도로 바꾸려는 시도를 통해 일제의 편을 들었다.

초창기 한국 기독교는 서구 문명의 장점을 받아들이는 데 기여했지만, 그것을 능가하는 폐해도 조장했다. 자본주의의 극단적 형태인 제국주의의 한국 침략을 용이하게 해주는 부정적 기능도 함께 수행했다. 정비석이 비판한 것은 그런 측면이 아니었다. 일제 부역자가 된 그는 제국주의의 모순을 건드릴 수 없었다. 서양 기독교와 한국인들을 떼어놓는 데만 주안점을 뒀을 뿐이다.

친일파 연구의 토대를 닦은 역사학자 임종국(1929~1989)은 <친일문학론>에서 정비석의 1943년 콩트인 <한꺼풀 가면>에 대해 "미국인 선교사들의 위선을 고발"한 글이었다면서 그 내용을 자세히 소개한다. 이에 따르면 콩트의 배경은 "소화(昭和) 10년"인 1935년이다. 만주사변(1931)을 일으킨 일본이 중일전쟁(1937)으로 나아가는 과도기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미국인 선교사 페치프렌은 한국인 교인들로부터 "살아계신 신"으로 추앙을 받는다. 그는 1935년에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를 충실히 따르던 한국인 목사 최성준은 동행을 자청한다. "신의 나라 아메리카를 구경"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여객선에서 페치프렌은 평소처럼 최성준에게 친절을 베푼다. "여전히 신처럼 친절하였다"라고 소설은 말한다. 그런데 하와이에 정박하면서부터 태도가 이상해진다. 최성준에게 짐을 맡기고 혼자만 상륙하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샌프란시스코에서 하선할 때도 최성준을 하인처럼 부린다. 마중 나온 친지들 앞에서 최성준을 가리키며 "이건 조선의 토인인데 내가 거기 있을 때 귀여워해 준 충실한 노예"라고 소개한다.

일제강점 이듬해인 1911년에 의주에서 출생한 정비석은 세계사적 관점에서 기독교의 모순을 비판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1929년의 항일투쟁 사건인 '신의주고등보통학교 생도 사건'으로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던 운동권 학생이었다. 총독부 기관지인 1929년 6월 6일자 <매일신보> 1면 우중단은 이때 검거된 학생 중 하나로 정비석의 본명인 정서죽을 거명했다.

1929년 5월 24일 자 <동아일보> 2면 중간은 사건 가담자들을 "좌경"으로 분류했다. 그해 6월 21일자 <동아일보> 2면 중상단이 이 학생들의 혐의 중 하나로 "3월 1일 교실에 회합, 조선○○만세 고창"으로 제시한 데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이 시절에는 '독립'이란 표현을 함부로 쓸 수 없었다. 이 시절의 '좌경'이 '독립운동'과 거의 비슷한 표현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독립운동권 학생들이 좌경세력으로 분류된 것은 이들이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연구를 동시에 했기 때문이다.

정비석은 징역 10월과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18세 때에 '좌경 사건'에 연루된 것은 그가 세계사적 관점에 입각해 제국주의와 기독교의 한국 진출을 비판할 지적 여력을 갖고 있었으리라는 판단을 갖게 한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정비석 편은 사건 뒤에 그가 "일본 히로시마로 건너가 중학교를 졸업한 후 도쿄의 니혼대학 예과에 들어갔다"고 설명한다. 니혼대학 본과에 들어간 뒤에는 <프롤레타리아신문>에 작품을 제출해 당선됐다고 알려준다. 제국주의에 대한 학문적 비판이 가장 왕성한 일본에서 보여준 이런 행적은 그가 제국주의와 기독교의 관계에 대해 얼마든지 세련된 비판을 할 수 있었으리라는 판단을 가능케 한다.

그런데도 <한꺼풀 가면> 같은 수준 낮은 콩트를 썼다. 위선자는 기독교뿐 아니라 어느 영역에든 있는 것인데도, 서양 선교사의 위선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한국 민중과 기독교를 이간시키려 했다. 제국주의를 까놓고 비판할 수 없는 친일파였기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볼 수 있다.

일제 침략 전쟁 찬양한 소설가
 
 1989년 한국야쿠르트가 만든 설렁탕면 광고에도 출연한 정비석
ⓒ 유튜브 캡처
  
그의 기독교 비판은 <산의 휴식> 같은 작품에도 나타난다. 임종국은 이런 작품 활동이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라는 역사적 흐름에서 나왔다고 지적한다. 신사참배에 대한 거부감을 불식시킬 목적으로 그런 작품들을 썼던 셈이다.

21세 때인 1932년에 니혼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한 정비석은 1935년에 콩트 <여자>를 <매일신보>에 발표하면서 식민지 한국 문단에 데뷔했다. 그 뒤 <동아일보> 및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뒤이어 1940년에 매일신보사 기자로 들어갔다.

총독부 기관지 발행사에 들어간 그는 이때부터 일본 녹봉을 받으며 친일재산을 축적했다. 이후로 그는 한국인들을 서양 기독교와 떼어놓는 글뿐 아니라, 농민·청년·문인들을 일본제국주의와 결합시키는 방향의 글도 많이 쏟아냈다.

1940년 10월에는 지금의 태릉 육사에 위치한 육군지원병훈련소 입소식을 참관한 뒤 12월호 <삼천리>에 "전 조선 청년들이 모두 한번씩 훈련소 문을 거쳐 나오는 날이면 조선에는 새로운 광명이 비칠 것"이라고 썼다. 1942년 7월호 <동양지광>에는 과거에는 "농기구" 대접밖에 못 받았던 농민들이 일본 국민으로 새로 태어났다고 썼다. 일본 덕분에 농민들의 지위가 향상됐다고 썼던 것이다.

1942년 4월호 <국민문학> 기고문에서는 문학을 무기로 삼아 국민문학에 봉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문인들에게 순수문학이 아닌 정치문학을 권유했던 것이다. 1943년 4월호 <국민문학> 기고문에서는 문학을 전쟁 승리의 도구로 삼아야 한다면서 "내가 살고 싶은 곳은......이 지구상의 단 한 곳의 낙원......조국 일본이 아니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이전에 좌경이나 불온세력으로 분류됐던 이광수·최남선·홍난파 등은 일제강점기 후반에 새로운 친일파로 두각을 나타냈다. '뉴라이트'에 비견될 만한 이 흐름에 항일운동권 출신인 정비석도 가세해 일제의 세계침략에 협조했다.

처음부터 친일파였던 게 아니라 일종의 '뉴친일파'였던 정비석은 1945년 8.15 해방에 개의치 않고 활동을 이어갔다. 1946년에는 중앙신문사 편집부장이 되고 한국전쟁 때는 종군작가로 활동했다. 박정희 정권 때는 방송윤리위원도 역임하고 적십자사 서울시 상임위원도 지냈다.

해방 뒤에 그의 작품이 쏟아져 나왔다. 문제작 <자유부인>이 발표돼 사회적 논란을 일으키고 <소설 손자병법>, <소설 초한지>, <소설 삼국지> 등의 역사소설도 나왔다. <민비>, <연산군전>, <퇴계일화집>, <퇴계소전>, <이조여인사화>, <명기열전>, <현부열전> <소설 김삿갓> 등도 그가 집필한 역사 소설이다.

역사에 죄를 많이 지은 문인이었다. 그런 문인치고는 상당히 자유롭게 글을 썼다. 그런 면에서 그는 '자유 친일파'였다. 1991년 10월 19일, 80세를 일기로 그의 자유는 사그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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