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기에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나

김삼웅 2024. 3. 1.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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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인물열전 - 딸깍발이 선비 이희승 평전 2] 출생과 성장기 ①

[김삼웅 기자]

 의왕시의 이희승박사 생가 소개 갈무리
ⓒ 최병렬
 
이희승은 1896년 6월 9일 경기도 광주군 의곡면 포일리(현 의왕시 포일동)에서 아버지 종식(宗植)과 어머니 박원양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출생한 시기는 그야말로 격동기였다. 2년 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고, 1년 전에는 일본인들이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태어난 해 11월 1일을 기해 조선왕조는 태양력을 사용하였다. 각지에서 을미의병이 일어나고 아관파천, <독립신문> 창간, 독립협회 발족,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고종의 황제즉위식이 거행되었다.

아버지 이종식은 가난했던 전의 이씨 가문에서도 고지식하기로 이름난 분이었다.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으셨는데 다 잃고 다음에 내가 태어나서 나는 5형제 중 장남이 되었다. 

아버지는 시골에서 공부하다가 서울로 올라오셔서 초시 후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景慕宮, 지금의 서울대 의대 자리) 참봉으로 벼슬길에 올랐는데, 후에는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으로 당상관인 정삼품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분은 일본 유학생으로 선발됐을 때 상투를 자르기 싫어 유학을 포기했을 만큼 완고하고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갑오경장을 전후해서 개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닥칠 무렵, 조정에서는 젊고 유능한 관리들을 일본에 보내어 개화 문물을 배워오게 할 목적으로 유학생을 뽑았다. 아버지는 그 대상으로 선발됐으나 머리를 깎아야 한다는 조건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고 만 것이다. (주석 1)

이희승은 다섯 살 때 어머니를 따라 서울에 왔다. 아버지가 벼슬이 높아가면서 소실을 두고 고향의 조강지처를 돌보지 않아 참다못한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앞세워 상경한 것이다. 

어머니는 남산 기슭에 셋방을 얻어 기거하였다.

"아직 서울 셋방에 살 때인 다섯 살 때 나는 어머니에게서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학식이 높은 분은 아니었으나 한글로 토가 달린 <천자문> 정도는 가르칠 만한 분이었다. 제법 총기가 있었던 나는 1년 만에 천자를 떼고 여섯 살 때는 아버지에게서 <동몽선습>을 배웠다. (주석 2)

서울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이를 불편하게 여긴 아버지가 모자의 하향을 재촉하여 선향인 경기도 풍덕군 남면 상조리로 내려왔다. 그는 이곳에서 서당에 다니면서 <맹자>, <대학>, <논어>를 차례로 배웠다. 열두 살 적에 아버지가 서울로 불렀다. 아들에게 신식교육을 시키고자 해서였다.

나는 어머니 품을 떠나 서울의 가회동에 있는 아버지 집으로 옮아갔다. 그 집에 들어가서야 나는 아버지가 새 장가를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서울의 새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처녀 시집을 왔으나 끝까지 소생이 없었다. 어린 나이에도 나는 고향에 홀로 남은 어머니가 불쌍하다는 생각에 기가 죽어 지냈다. 그런 나를 새어머니는 자상하게 보살펴주었다. 지금도 나는 그 분의 기른 정을 잊지 못해 경건한 마음으로 제사를 드리고 있다. (주석 3)

이희승이 성장하는 동안 나라 안팎이 소연했다. 열강의 이권침탈이 극심해지고 어용단체 황국협회가 독립협회를 공격하였다. 제주에서 이재수의 난이 일어나고, 청국에서 영국의 이익과 조선에서 일본의 이익을 서로 옹호하기로 약조한 영일동맹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희승은 열세 살 되던 해 봄 관립 한성외국어학교에 입학했다. 상투를 자르기 싫어 일본유학을 마다고 했던 아버지가 나를 외국어학교에 보낸 것은 지금 생각해도 일대 혁명적인 일이라 할 수 밖에 없다. 터진 봇물처럼 밀어닥치는 개화 사조가 그분의 완고한 머릿속에도 스며들었던 탓일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가 처음부터 내게 외국어 공부를 시키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그 학교에 간 것은 전혀 우연이었다. (주석 4) 

이희승이 살던 집 아랫집에 살던 학생이 외국어학교 영어부 학생이었는데 큰 소리로 영어책을 읽어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여 아버지에게 말씀드려 승낙을 받았다. 그래서 13살 때 이 학교에 입학하였다.

"초립(草笠)을 쓰고 당혜를 신고 분홍 삼팔두루마기를 입고 보자기에 책을 싸서 끼고 다녔다. 학생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수업료를 받지 않은 것은 물론 교과서와 각종 학용품을 나누어주었고 매일 점심값으로 3전씩을 지급하기까지 했다. 내가 입학했을 때엔 이런 은전은 없어졌지만 수업료는 내지 않았다." (주석 5)

주석
1> 이희승, <딸깍발이 선비의 일생 (일석, 이희승 회고록)>, 18쪽, 창작과비평사, 1996(이후 <회고록> 표기)
2> 앞의 책, 19쪽.
3> 앞의 책, 27쪽.
4> 앞의 책, 32~33쪽.
5> 앞의 책, 35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딸깍발이 선비 이희승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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