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채 등록하고 80만원 벌자"…강남·성수에 노인들 줄 선 사연
" 앞으로 40분은 더 걸린대요. "
27일 오후 5시 서울 성수동의 한 와인 가게 앞에는 입구까지 긴 줄이 늘어섰다. 챗GPT를 개발한 오픈AI의 창업자 샘 올트먼이 지난해 7월부터 발행한 월드코인(WLD)을 무료로 받으려는 사람들이었다. 홍채 인식 기기 오브(Orb)에 눈을 대고 스캔하면, 가상자산 지갑(월드앱)에 10WLD가 지급되고, 이후 2주마다 3WLD씩 1년간 총 76WLD를 무상 제공하는 ‘기본소득’ 제공 방식이다.
이곳에서 홍채 등록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20대 청년부터 80대 노인까지 연령대도 다양했다. 경기 남양주시에서 가족 3명과 함께 찾은 A(51)씨는 “요즘 코인에 관심 없는 사람이 있냐”며 “100만원에 가까운 돈이 생기는 건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평소 코인 투자에 관심이 많다는 B(76)씨도 “80살 친구와 경기 산본에서 왔다. 강남 인근에는 몇 군데 없어서 한참 헤맸다”고 말했다.
몇몇 노인은 대기가 길어지자 간이 의자를 가져와 앉기도 했다. 직장인 C(28)씨는 “오늘 회사 일이 일찍 끝나서 줄을 섰다”며 “개인정보 유출이라는 우려도 있지만 과거 지문 인식처럼 첫 변화에 대한 거부반응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해당 매장 매니저는 “하루에도 100명이 넘는 사람이 등록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마포구에 한 카페에서 직접 홍채 인식을 해보니 몇 차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2분 정도 걸렸다. 어플리케이션을 설치한 뒤 구글 계정을 연동하고 QR코드 등록을 하면 오브에 홍채를 인식할 준비가 끝난다. 둥근 기계 앞에 서서 렌즈를 살짝 올려다보았지만 기계가 인식하지 못했다. 직원은 “라섹을 한 경우 한 번에 인식을 못 하는 경우가 있다”고 안내했다. 홍채 정보를 넘기겠냐는 질문에 동의하자 ‘웰컴 보조금’ 10WLD이 가상 계좌로 들어왔다. 가게 점원은 “최근 WLD 코인 가격이 급등하면서 사흘 만에 300명 가까운 인원이 방문해 홍채 등록을 하고 갔다”고 말했다.
최근 AI 투자 열풍으로 월드코인 가격이 급등했다. 가상자산 정보 사이트 코인마켓캡에 따르면 월드코인은 개당 약 1만원 대에 거래 중이다. 월드코인의 현재 시가를 기준으로 한다면 홍채를 등록할 경우 80만원에 달하는 수익이 생기는 셈이다. 월드코인이 세상에 처음 나온 건 8개월 전이지만 그간 가격은 2달러대에 머물렀다. 그러다 지난 15일 오픈AI가 텍스트 기반인 챗GPT에 이어 동영상 생성 서비스 ‘소라(Sora)’를 새로 출시하자 월드코인 가격이 덩달아 약 3배로 급등했다.
온라인에서는 “어느 업체에 가면 덜 기다릴 수 있다”, “월드코인 추천인으로 내 코드를 넣어달라”며 월드코인 관련 정보가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있다.
샘 올트먼과 발행업체(‘툴스 포 휴머니티’)는 “인류에게 기본소득을 제공한다”는 개념을 앞세우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비관적인 전망을 하고 있다. 홍준영 한국 핀테크연합회장은 “토큰 몇 개를 미끼로 사람들의 개인정보를 민간 기업이 대량으로 수집하고 있는데, 심지어 이 업체는 보안 관련 업체조차 아니다”라며 “민간 기업이 이익을 위해 이 정보를 어디에 팔아넘길지 알 수 없다. 기술 혁신은 전혀 없이 마케팅으로 코인 가격을 부양하는 수법이 도지코인과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이미 월드코인을 사칭한 사기 피해까지 발생하고 있다. 주로 로또 환불, 리딩비 환불을 해주겠다며 월드코인 지갑을 생성하도록 유도한 뒤 가짜 코인을 진짜 코인인 양 판매하는 수법이다. 한 대형 법무법인에서는 피해자들을 모집해 사기 업체를 상대로 대리 소송에 나섰다.
개인정보와 관련해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임종인 고려대 정보보호 대학원 교수는 “홍채 정보는 아이디와 달리 바뀌지 않는 중요한 개인정보인데 검증되지 않은 해외 업체에서 내국인 민감 정보를 대량으로 수집하고 있는 건 매우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보 수집 동의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정보가 어디서 관리되고 어떻게 쓰이는지 개인정보보호위원회에서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도 조사에 나선 상황이다. 위원회 관계자는 이날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현재 조사팀에서 생체 인식정보를 수집하고 처리하는 과정에서 위법한 부분은 없었는지 들여다보고 있다”며 “해외 업체라고 하더라도 국내에서 홍채 인증 기계를 도입해 개인 정보를 수집하는 행위를 내국인 대상으로 벌였기 때문에 국내법 적용에 어려움이 없을 거로 보인다”고 말했다.
개정된 개인정보보호법에 따라 이미 국외로 반출된 개인정보에 대해 폐기 처분이 내려질 가능성도 있다. 개인정보보호위 위원을 맡고 있는 김진욱 변호사는 “지난해 개인정보보호법이 개정되면서 내국인의 개인 정보가 해외로 유출되는 경우 이를 금지하거나 폐기하도록 강제하는 조치를 할 수 있게 됐다”며 “민감한 생체 정보가 해외에 대량 유출되는 사례는 이번이 처음인 만큼 개인정보보호위원회도 더 면밀하게 살펴볼 걸로 보인다”고 말했다.
신혜연 기자 shin.hye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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