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BC '높이'보다 '널리' 보기

최대열 2024. 2. 26.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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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그룹 글로벌비즈니스센터 사업계획 변경
최고 105층 고집 않고 55층짜리 나눠짓기로
안전·안보·민원 해결 전망…신기술 상징 기대

미국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짓고 난 후 오랜 기간 공실이 상당했다. 당시 불어닥친 세계대공황 여파가 컸다. 세계 최고층 건물 두바이의 부르즈 할리파는 공사 당시 두바이가 모라토리엄(채무상환 유예)을 선언한 탓에 주변 토후국 아부다비의 도움을 받아 다 지었다.

고층 빌딩이 겪어야 했던 시련은 국내 사정도 비슷했다. 국내 최고층 롯데월드타워가 올라가던 중 롯데그룹과 오너 일가를 겨냥해 당국에선 고강도 수사를 펼쳤다. 해운대 엘시티는 게이트라 불릴 정도로 부정적인 이슈에 휩싸였고 여의도 파크원 역시 건축주를 둘러싼 송사로 공사를 멈추기도 했다.

마천루의 저주는 호황기에 고층빌딩 높이 경쟁을 해 건물이 올라갈 경우 다 짓고 나면 경제위기가 찾아온다는 속설이다. 일정한 사이클을 띤 경기순환을 빗댄 표현으로도 본다. 공교롭게 과거부터 국내외 고층 빌딩이 올라가는 과정에서 겪은 일도 순탄치 않았다.

"명분보다 실리"…105층 고집 버렸다

현대차그룹이 삼성동 한국전력공사 부지에 짓기로 한 글로벌 비즈니스 센터(GBC)가 건물 최고 층수나 높이를 낮추기로 했다. GBC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아버지인 정몽구 명예회장 시절부터 추진한 프로젝트다. 주요 계열사를 한데 모은 그룹 통합사옥을 마련하겠다는 구상으로 2000년대 중반 시작했다.

2014년 한전이 본사를 옮기며 나온 부지를 10조5500억원에 사들인 후 본격적인 첫발을 뗐다. 당초 계획은 100층 넘는 국내 최고(最高) 건물과 호텔·전시장 등 부대시설 4개 동을 짓겠다는 구상이었다. 이달 초 회사는 55층짜리 2개 동 등 6개 동에 나눠 짓겠다고 개발계획 변경안을 시에 제출했다.

그간 현대차그룹 안팎에선 건물 높이를 낮춰야 한다는 얘기가 꾸준히 흘러나왔다. 막대한 비용은 물론 안전, 안보, 주변 민원 등 프로젝트 진행 과정에서 크고 작은 잡음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최고층’이라는 타이틀은 못 가져오지만 따로 얻게 될 부수적 이득은 더 많을 것으로 업계에서는 내다본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사진제공:현대차그룹] [이미지출처=연합뉴스]

당초 설계안을 확정한 2016년까지만 해도 사옥 신축에만 2조5700억원가량 들어갈 것으로 회사 측은 추산했다. 이후 인건비나 자재비가 급증, 현재는 같은 공사를 하더라도 5조원을 훌쩍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건설업계 한 관계자는 "100층 건물의 경우 단순히 50층 빌딩을 짓는 비용의 두 배가 아닌 그 이상이 들어간다"며 "코로나19로 원자재 값이 급격히 올랐고 인력수급 역시 원활치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회사 내부에선 GBC 프로젝트 진행과정에서 리더십이 바뀐 점을 이번 결정의 주요 배경으로 꼽는다. 정의선 회장이 그룹 경영 전반을 총괄하며 실리를 중시하는 기조가 번졌듯, 이번 GBC 역시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는 얘기다. 익명을 원한 업계 관계자는 "전임 회장 시절에도 주요 참모 대부분 초고층 건물에 대해 부정적으로 봤으나 정몽구 회장의 의지가 확고해 직언할 수 없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말했다.

건물 높이가 낮아지면서 군 작전 방해문제도 해결될 전망이다. 당초 500m가 넘는 높이 탓에 공군 레이더 작동에 제한이 있을 수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현대차는 앞서 100층 높이 건물을 구상했을 당시, 군에 새 레이더를 구매해주기로 합의하기도 했다. 인근 봉은사와 불거졌던 일조권 문제도 자연스레 해결됐다. 법원에서 문제가 없다고 결론이 나긴 했으나 높이를 낮추면서 주변 민원도 줄어들게 됐다.

서울 양재동 현대자동차 사옥. 사진=강진형 기자aymsdream@

공공기여 그대로…신사업 담을 듯

변경된 계획안의 인허가 키는 서울시가 쥐고 있다. 다만 이번 변경안을 제출하기 전후로 물밑에서 꾸준히 논의했던 것으로 알려진 만큼, 바뀐 계획대로 추진할 가능성이 높다. 통상 건축주 의지에 따라 사업계획을 바꿀 경우 절차상 하자나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받아주는 게 일반적이다. 이번에 사업계획을 바꾸더라도 공공기여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서울시 관계자는 "변경안 수용 여부나 처리 방향과 관련해 구체적으로 결정된 사안은 없으며 어떤 문제가 있는지 종합적으로 살펴보고 결정할 예정"이라며 "다만 변경된 계획안대로 진행한다면 도시계획 변경을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당초 계획대로 초고층 랜드마크를 기대했던 강남구청은 다소 누그러졌다. 강남구는 그간 105층 프로젝트가 원안대로 추진돼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구청 관계자는 "현대차에서 주민을 상대로 바뀐 사업계획에 관한 설명회를 할 텐데, 설명회 후 주민 의견을 모아 시나 회사 측에 전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현대 계동사옥. 1983년 지은 건물로 범현대그룹이 사업을 확장하던 시기 들어섰다.[사진제공:현대건설]

내부적으로는 신규 사옥이 될 건물에 그룹이 추진 중인 미래 사업을 어떻게 담아낼지 고민하고 있다. 자동차를 넘어 첨단항공모빌리티(AAM) 등 미래 이동수단을 구현하는 데 쓸 버티포트(수직이착륙 터미널), 그룹 차원에서 추진 중인 수소사업 전반의 생태계나 친환경 탄소저감 기술 등을 건물 전반에 녹여낼 것으로 예상된다.

업계 관계자는 "상징적인 의미보다는 실용적인 접근이 우선이라고 판단한 셈"이라며 "초고층을 포기한 대신 아낀 비용을 다양한 소프트웨어를 채우는 데 쓸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최대열 기자 dychoi@asiae.co.kr
한진주 기자 truepearl@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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