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세계 교회 역사]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신상목 2024. 2. 26. 0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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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더미션 독자분들께서는 모두 이런 질문, 던지면서 살아가시지요. 살아가면서 누구나 무엇을 선택하거나 판단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이라면 생각이나 판단도 기독교적으로 해야겠지요. 그럴 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하고 생각해본다면 훨씬 수월하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성경 전체가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 특히 신약성경 4복음서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들을 잘 살펴보면서 그에 합당한 판단을 해야겠지요. 최근 출판된 ‘하나님 나라 윤리’(비아토르)의 저자들인 미국 기독교윤리학자 데이비드 거쉬와 글렌 스타센은 그 기준을 ‘산상수훈’(마 5~7장)에서 찾으라고 강조합니다.

사실 우리 신앙은 교회당 안에서만의 신앙은 아니지요. 교회 밖에서도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그 이름에 합당한 생각과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 따로, 삶 따로가 되는 ‘이중적 기독교인’이 되겠지요.

이번 주 세계교회 역사 속에서는 이렇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하는 질문을 던져보자고 책을 써서 ‘선데이 크리스천’을 깨웠던 찰스 셀던을 비롯해 4세기에도 그런 질문을 던지며 살았던 ‘황금의 입’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그리고 로마제국 황제로서 기독교를 공인한 황제 등을 만나보시겠습니다. 이번 한 주는 어떤 일을 선택하거나 결정할 때 의식적으로라도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하는 질문을 던져보면 좋겠습니다.

이번 주 금요일은 3·1절입니다. 105년 전 당시 기독교인은 인구 1.5%에 불과한 소수였지만 1919년 6월까지 전국에서 만세 운동으로 투옥된 사람의 22%는 기독교인이었다고 합니다.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인이었고요. 그만큼 한국교회는 민족과 함께했던 것이지요.

어제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은 3·1운동 105주년 기념 예배를 드렸습니다. 한교총은 성명을 발표하고 “한국교회는 이 땅의 소금과 빛으로 선열이 남긴 ‘정의’ ‘인도’ ‘생존’ ‘존영’의 가치에 따라 공공선을 실현하며 이웃과 함께 양극화와 저출산 위기 극복을 위해 헌신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또 “북한에도 자유와 인권과 공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한반도의 통일을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성명에 합당한 기도와 노력들이 이어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풍요에 물든 신자들을 질타한 청빈한 설교자
398년 2월 26일 4세기 대표적 기독교 교부이자 37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최고의 설교자였던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가 콘스탄티노플의 주교가 됩니다. 그의 설교는 매우 유명해서 ‘황금 입’(크리소스토무스)이란 별명을 얻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주교 자리는 그의 뛰어난 설교만 쏟아내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악의 세력에 대항한 전장이었으며 그를 유배와 죽음의 길로 끌고 간 숙명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안디옥에서 로마 군대 장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법학과 수사학, 신학을 공부하고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6년의 수도생활에서 돌아온 그는 안디옥에서 집사, 장로로 임명됐습니다. 그는 집사와 장로 직분으로 설교를 시작, 얼마 후 그의 명성이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교회 전체에 퍼졌습니다. 387년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 즉위 10주년에 군사 원조비 거부 운동으로 일어난 안디옥 폭동이 진압되고 안디옥 전체가 대학살의 위기에 처했을 때 크리소스토무스는 뛰어난 설교로 사람들을 위로하며 평정심을 유지하게 했습니다. 또 안디옥교회 목회 기간 동안 창세기 마태복음 요한복음 로마서 갈라디아서 고린도전·후서 에베소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를 강해했는데, 그의 영적 해석과 실천적 적용은 유명합니다.

397년 콘스탄티노플 감독직이 공석이 되자 황제는 요한을 불러들여 직분을 맡기려 했습니다. 그러나 안디옥에서의 그의 인기는 너무 높아 폭동이 일어날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398년까지 12년 동안 안디옥교회에서 목회하던 그는 그해 강제로 납치돼 콘스탄티노플 감독으로 임명됐습니다.

398년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에 추대되었지만 그는 교회 정치에는 어두웠습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늘 청빈하고 검소한 삶을 강조한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부유한 시민들이 복음과 향락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교회 역시 일부 성직자들이 부와 재산을 축적하고 있었고 교인들은 거의 돌봄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감독의 저택을 치장한 장식품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위해 식량을 공급했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도 교회 문을 열도록 명령했습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 교회는 부자들이 편리한 시간에 교회 문을 개방했다고 합니다. 그는 평신도들에게도 복음의 명령에 따라 살라고 촉구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설교가 유명합니다.

“여러분이 타는 말의 입에 물린 금 재갈과 노예의 손목에 둘린 금팔찌와 신발에 달린 금수술은 곧 여러분이 고아의 것을 도둑질하고 과부들을 굶주리게 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후 여러분의 거대한 저택을 바라보는 통행인들은 ‘저 저택을 짓기 위해 얼마나 많은 눈물들이 뿌려졌는가. 얼마나 많은 고아들이 헐벗었는가. 얼마나 많은 과부들이 약탈을 당했는가.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의 임금이 착취되었는가’ 하고 말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죽음을 통해서도 이러한 고발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자 동로마 황제 데오도시우스의 황후 유독시아는 이런 설교가 불편했고 미워했습니다. 결국 크리소스토무스는 403년 칼케돈의 ‘떡갈나무(oak) 회의’에서 불경죄와 이단으로 몰려 비두니아로 유배되었습니다. 이에 시민들이 ‘감독을 돌려달라’고 시위하자 귀향 조치됐으나 407년 다시 흑해 지방 폰투스에 유배되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의 유해는 438년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와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명예가 회복되었습니다.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 때 십자군들이 콘스탄티노플에서 그의 유해를 로마로 가져갔고 800년 후인 2004년 11월 27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그의 유해를 다시 콘스탄티노플로 이장했습니다. 크리소스토무스는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 성공회에서 모두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미국의 목회자이자 사회복음주의운동 지도자였던 찰스 셀던 역시 무감각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경종을 울렸습니다. 1857년 2월 26일 태어난 그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기독교 신앙 소설을 썼습니다. 그는 당시 기독교 문명권의 많은 사람들이 명목상 크리스천(선데이 크리스천)으로 아무 변화 없이 사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이 책을 썼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상황 속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묻고 그 대답대로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찰스 셀던은 목사이며 작가입니다. 미국 뉴욕주 웰스빌에서 태어나 브라운 대학과 안도버신학교를 졸업하고 회중교회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버몬트와 캔자스에서 목회생활을 했습니다.

사회사업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실직한 인쇄공으로 가장해 여러 사람을 만나는 와중에 크리스천들의 무관심과 차별에 큰 충격을 받게 되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In His Steps)를 집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기독교를 공인한 로마 황제
274년 2월 27일 기독교로 개종한 최초의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출생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전장에서 환상을 본 후였다는 주장)의 진위 여부에 의문을 제기하지만 황제는 313년 밀라노칙령으로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다양한 종교 중 하나로 인정하면서 기독교인을 향한 박해를 종식했습니다. 325년 니케아공의회를 소집해 교회의 논쟁을 해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본명은 플라비우스 발레리우스 콘스탄티누스(Flavius Valerius Constantinus)로, 황실 가문의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와 하녀 출신의 기독교인 헬레나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혼란한 로마 제국을 네 영역으로 나누고 왕들을 임명하여 나라를 다스리게 했습니다. 네 영토는 동부에 리키니우스 막시미누스, 서부에 막센티우스 콘스탄티우스가 각각 다스렸습니다. 이는 당시로선 상당한 효과가 있었으나 왕들 사이에 분쟁이 생긴다면 해결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왕들의 자식을 볼모로 삼았습니다. 콘스탄티누스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도 역시 제국의 네 영토 중 하나를 다스리는 통치자였기에 콘스탄티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게 볼모로 와 있었습니다.

이후 306년 아버지가 병사하자 콘스탄티누스는 왕으로 추대되어 아버지의 영토를 다스렸습니다. 308년 막시미누스가 정계를 은퇴했고 콘스탄티누스는 312년 밀비안 다리에서 정적 막센티우스를 제압, 서부 제국을 통일시켰습니다.

교회사가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이때 콘스탄티누스는 꿈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십자가를 군기로 삼고 방패에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앞의 두 개의 그리스어 철자 X, P를 새겨 넣어 승리했다고 합니다.

323년에는 동부 지역을 다스리던 리키니우스를 2차례의 지상전과 해전에서 격파해 324년 마침내 로마 제국을 통일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후 13년 동안 유일의 황제요 ‘최고의 아우구스투스’로서 로마 제국을 다스렸습니다. 그는 원래 태양신 숭배자였으나 기독교를 믿고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했습니다.

또 319년에는 불법적인 노예 처벌 금지법, 320년에는 죄수 학대 금지법을 제정하고 321년에는 처음으로 일요일을 휴일로 지정했습니다. 또 325년에는 니케아종교회의(Council of Nicaea)를 개최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인하는 아리우스파와의 신학 논쟁을 해결합니다.

330년에는 그리스 도시 비잔티움(훗날 이스탄불)으로 제국의 수도를 옮기고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노플)라고 명명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337년 5월 22일 죽음 직전 세례를 받고 콘스탄티노플의 ‘사도성당’ 열두 사도의 관(유물로 채워진 관) 곁에 안치되었습니다.

그는 선왕 디오클레티아누스와 함께 로마 제국의 재건자로 높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나아가 유럽에서 1000여 년간 지속된 기독교 문화의 초석을 놓았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로도 불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잊힌 종교개혁가, 마르틴 부처
1551년 2월 28일 독일 종교개혁자 마르틴 부처가 영국에서 60세의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수많은 종교개혁가 가운데 마르틴 부처(1491~1551)는 그 업적과 영향력에 비해 잊힌 존재였습니다.

그는 독일에서 태어나 수도사가 됐으나 1518년 하이델베르크 논쟁에 참석해 루터의 영향을 받아 수도원 생활을 청산했습니다. 1523년부터 25년간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목회 사역을 감당하며 종교개혁에 헌신했습니다. 예배 개혁의 변증서 ‘근거와 원인’을 비롯해 여러 주석서와 교리문답서 등을 저술했고 슈트라스부르크 노회장과 개신교 회장직을 맡아 연합활동에도 힘썼습니다. 라틴어 학교들을 통합해 김나지움(현 슈트라스부르크대학교)도 설립했습니다. 1538년에는 ‘참된 목회학’을 저술해 참된 목회가 무엇인지, 또 어떻게 해야 목회 사역을 바르게 감당할 수 있는지 그 방향을 성경적으로 제시했습니다.

부처는 목사 장로 집사 등으로 직제를 개혁했고 미사를 폐지하며 말씀을 강조하는 등 개혁교회 예배의 틀을 세웠습니다. 또 대요리문답과 소요리문답서를 저술해 교리교육에도 힘썼으며 교회 법령을 세웠고 장로제도를 도입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 중국에 첫발을 딛다
1854년 3월 1일 개척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 상하이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해변에 발을 디딘 나의 감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고,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 눈에서 흘러내렸습니다”라고 썼습니다. 테일러는 1865년 중국내지선교회(China Inland Mission)를 설립하고 선교사도 복음 전도를 위해 현지인처럼 생활하고 옷을 입어야 한다는 생각을 널리 알렸습니다.

1832년 영국 요크셔에서 태어난 그는 약사이자 감리교 평신도 설교자였던 부친에 의해 선교 열정을 교육받습니다. 테일러는 다섯 살이 채 되기도 전에 집에 오는 손님들에게 자신은 언젠가 선교사가 되고 싶으며 중국이 가장 호감 가는 땅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17세가 돼서야 신앙을 고백했으며 이때부터 중국 선교사로서의 꿈을 구체적으로 키워가기 시작합니다.

그는 중국인과 원만한 관계를 맺기 위해 의학을 공부했습니다. 혹독한 자기 부인 훈련도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믿음으로만 살려 애쓰는 것이었습니다. 식사도 검소하게 사과 1파운드와 빵 한 덩어리로 하루를 살았고 침실로 쓰는 다락방은 그간 익숙했던 침구나 가구 하나 없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중국에 가면 누구에게 어떤 것도 요구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뭔가를 요청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그러니 내가 영국을 떠나기 전 기도만으로 하나님을 통해 사람을 움직이는 법을 배워 두는 게 얼마나 중요한가.’

이렇게 해서 그는 1853년 9월 스물한 살의 나이로 중국행 배를 탔습니다. 요크셔 고향집을 떠나본 적 없던 그에게 중국 상하이는 기이하고 흥미진진한 곳이었습니다. 그는 상하이 외국인 거주지에 집을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외로움과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중국 복음화 대신 고향집 생각만 가득했다고 합니다.

이후 그는 상하이를 벗어나 중국 내륙으로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부락을 거의 60곳 정도 들렀습니다. 그러면서 주민들이 자신을 외국인으로만 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중국인 사이로 들어가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중국인 복장과 문화를 채택했습니다. 중국인 복장을 한다는 것은 푸른 눈에 연갈색 머리의 요크셔 태생의 백인에겐 시련이었습니다. 다른 선교사들은 그의 차림새에 거부감을 보였지만 그는 끈덕지게 중국식 복장과 문화를 채택했고 이를 통해 다른 선교사들은 가지 못하는 중국 내지로 더 거침없이 돌아다닐 수 있었습니다.


1865년 출범한 중국내지선교회는 허드슨 테일러라는 사람과 그의 경험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독특한 선교회였습니다. 선교회는 주로 노동자 계층에게 동역을 호소하는 독자적 선교회였습니다. 테일러는 교육 수준이 높고 정식으로 안수받은 사역자들에 의해 중국이 복음화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30년이 지난 1895년에는 640명 이상의 선교사들이 중국을 위해 자신들의 삶을 헌신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의 헌신으로 북미,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독일, 호주, 뉴질랜드에 중국선교회 지부가 설립되었고 한때 중국에 모여든 선교사는 1000명을 넘었습니다.

1900년 5월 ‘의화단 사건’이 중국을 휩쓸었을 때는 135명의 선교사와 53명의 선교사 자녀들이 살해되었는데 대부분 중국내지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이었습니다. 그중에서는 독신 여성 선교사들도 많았습니다. 의화단 사건이 지나가고 1902년 그는 선교회 대표직을 사임했습니다.

이후 그는 중국인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중국의 은인’으로 불렀습니다. 여러 선교 본부를 방문한 후 그는 이전에 배타적인 지방이었던 후난성의 창사에서 73세의 나이로 열정적 전도자의 일생을 마쳤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그리스도만을 위해서 살았고 영혼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전도의 목표를 위해 언어 의학 기도훈련을 철저히 감당했으며, 고난과 시련을 겪으면서도 헌신적인 전도생활을 실천했습니다. 중국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입니다.

그가 설립한 중국내지선교회는 1951년 중국 공산화로 철수하면서 OMF선교회로 단체 이름을 변경했습니다. 동아시아 지역의 복음화를 목표로 설립된 OMF는 싱가포르에 본부를 두고 있고 1980년부터 한국에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참고 서적]
<초대교회사> 후스토 곤잘레스 지음, 엄성옥 옮김, 은성
<선교사 열전> 루스 터커 지음, 복있는사람
<교회용어사전> <위키피디아> 등 참조.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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