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민족대표 33인 박동완

김삼웅 2024. 2. 24.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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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인물 100선 97] '샘 해지지 않는' 독립운동가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민족대표 박동완
ⓒ 자료사진
 
박동완(朴東完, 1885~1941)은 경기도 포천시 신유리에서 통훈감관을 지낸 아버지 박형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통훈벼슬은 정3품 당하관의 품계로 문관·종친·의빈을 맡은 벼슬아치이다.

할아버지는 평양현감을 지냈고 형 박사규는 1894년 식년 생원시에 합격하는 등 대대로 양반 관료 가문이었다. 박동완의 어릴적 이름은 고봉(高峯)이고, 아호를 무궁화 피는 동산, 근곡(槿谷)이라 지었다.

일찍 개명한 박동완의 부모는 그가 아홉 살이 되기 이전에 서울로 이사하였다. 형이 급제했으나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기되어 출세길이 막히자, 영특한 막내아들에게는 신식 교육을 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12살의 어린 나이에 포천의 명문가 현석운의 차녀 현미 리암하고 혼인식을 올렸다. 조혼풍습이었다. 장인은 중추원 찬의를 지낸 관료였다. 중추원 찬의는 구한말 조정에서 신문·잡지 등 출판물의 관리를 맡은 관청의 박문원 소속 벼슬로서, 나중에 박동완이 장인의 직업에서 영향을 받게 되었다.

박동완은 관립 양사동소학과, 관립고등소학교, 관립협성중학교에 이어 한성외국어 학교 영어과를 졸업하고 다시 23살 때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인 배제학당에 입학했다. 이때 접하게 된 기독교는 평생 그의 삶에서 중심축이 되었다. 여기서 기독교 사상과 서구문명에 접하게 되고, 민족의식에 눈이 떴다. 

23살 때 세례를 받고 공부하는 동안 나라가 망하여 일제 식민지로 전락했다. 민족주의 정신이 왕성했던 배제학당은 폐쇄되고 그는 정동제일교회에서 활동하면서 다시 보성전문학교에 들어가 법률을 공부했다. 졸업과 함께 정동제일교회 전도사로 일하면서 <기독신보> 창간에 참여했다. 이 신문은 당시 유일한 순한글 신문으로 기독교계는 물론 일반인들의 애호를 받았다. 그는 주필과 편집인 등을 역임하면서 다양한 장르의 글을 필명으로 집필하였다. 또한 <신생명>, <별건곤> 등에 기고하여, 일제의 압제에 시달리는 동포들의 아픔을 대변했다.

그는 1919년 33살 때에 자진해서 민족대표 33인으로 독립선언에 서명하였다. '민족대표 33인'과 관련 일부 인사들의 훼절과, 독립선언 행사를 탑골공원이 아닌 태화관으로 옮긴 것과 관련 폄훼가 따르지만, 일제의 무단통치가 극점에 이르던 시기(1919년)에 독립선언은 생명을 담보하는 결기가 없이는 가능하지 않았던 선택이었다. 구한말의 조정대신 등 사회 명사들이 '독립청원'이면 몰라도 '독립선언'에는 참여하지 못하겠다고 발을 뺀 데서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민족대표'에 아무나 참여하거나 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무궁화 피는 동산'이라는 근곡(槿谷)의 아호에서 그의 민족정신이 묻어난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병탄하면서 '대한'이라는 국호와 '무궁화'라는 국화를 사갈시하고 그냥 두지 않았다. 박동완은 저들이 가장 싫어하는 무궁화를 아호로 삼을만큼 강기와 결기가 있었다. 그는 3.1혁명 후 우리가 쓰는 시간이 일본의 표준 시각이기 때문에 그들의 시간에 맞추어 살지 않겠다는 각오로 자신의 시계를 항상 30분 늦추어 놓았다고 한다.

기미년 3·1독립선언 후 총독부 감옥에 구치되어 재판을 받을 때 일인 검사가 "앞으로도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라는 심문에 "물론 그렇다."고 결연히 말하였다. 생과 사, 투옥과 석방의 갈림길에서 강고한 의지를 밝힌 것이다. 그리고 그대로 실행하였다.

그는 2년의 옥고를 치르고 만기 출감한 뒤 일제의 감시와 협박, 회유를 견디면서 1927년 '민족단일당 민족협동전선'의 기치 아래 발족한 신간회 창립과 초창기 운영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신간회는 일제강점기 국내에서는 최대 민족운동의 대표적 단체로 강령에서 "우리는 조선민족의 정치적·경제적 해방의 실현을 기함"이라고 내세울 만큼 국내에서 공공연히 항일투쟁을 표방한 단체였다.

알제리아 출신의 프랑스 8대학 교수 자크 랑시에르는 "샘 해지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주목하였다. 우리말의 '기타'는 "그것 밖의 또 다른 것"을 의미한다. '등(等)'도 마찬가지다. 등은 "같은 종류의 사실들이 앞에 열거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말"로 풀이된다. 샘 해지지 않는 조연이나 기타 또는 등으로 배제된 엑스트라는 슬픈 존재들이다. 

존재하지만 실존하지 않는 인물들, 주연 못지 않게 많은 역할을 하고도 묻히거나 잊혀진 분들이 우리 독립운동사에도 적지않았다. '민족대표 33인'의 경우도 그러하다. 

노자의 도덕경 58장 마지막 단락에 '광이불요(光而不耀)'란 대목이 전한다. "빛나되 번쩍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학자나 언론인들은 빛나는 것보다 번쩍이는 사람을 더 찾는다. 

박동완이 일제의 혹독한 탄압과 감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민족운동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어려서부터 접한 기독교정신에 근거하였다. "박동완은 기독교와 민족사의 맞물림과 엇물림의 역사 전환기에 민족운동에 헌신"(박재상·임미선, <근곡 박동완의 생애와 기독교 민족주의 연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굴곡진 시대 참담한 조국의 현실 앞에서 돈독한 신앙심과 옹골찬 역사의식으로 주어진 사명을 다하였다. 재만 동포들이 만주군벌과 일제의 2중 탄압으로 어려움에 빠지자 유지들과 '재만동포옹호동맹'을 결성하여 현장을 찾아 동포들을 위로하고, 귀국하여서는 야만적인 탄압상을 언론에 공개하였다.

신간회 활동이 총독부의 탄압과 내부갈등으로 분열상을 보이고 언론활동·신앙운동 역시 극심한 압제의 대상이 되자 그는 1928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40이 넘은 나이에 망명을 택한 것은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시국이 갈수록 어렵게 되면서 '민족대표'의 위상을 유지하며 지내기가 쉽지 않았다. 유혹과 압박도 그만큼 많았을 것이다. 

또한 <독립선언서>를 썼던 육당 최남선이 자치운동을 주장하면서 일제와 타협하기 시작하고, 1925년에는 총독부 어용단체인 조선사편수회 편수위원이 되어 식민주의 역사학의 한국사왜곡에 동참하는 것이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최남선이 자신과는 동서간이었다. 

하와이에서 와히아와 한인기독교회 담임목사로서 목회활동과 <한인기독교보>를 발행하는 한편 교회 안에 별도의 한글학교를 세우고 우리말 교육을 통해 교포 1세와 2세의 민족의식 고취에 열정을 쏟았다. 하와이는 만주·해삼위에 이어 제3의 독립운동 전진기지가 되었다.

박동완은 활동공간이 어디이든 '민족의 십자가'를 내려놓지 않은 실천적 기독인이었다. 앎과 삶을 일치시키고 늠염한 기상과 고절한 인품으로 힘겨운 골고다를 쉼 없이 걸었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 미주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은 크게 분열되어 있었다. '동지회'와 '국민회'로 나누어 분열상이 심화되자 이를 통합하고 치유하는 데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미쳐 해방을 맞기 전 1941년에 이역에서 56살에 소천했다. 

이런 연고로 그는 업적에 비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채 '샘 해지지 않는' 독립운동가, '기타' '등'으로 배제되고 망각된 33인 민족대표의 일원이다. 근곡 박동완 지사의 이름 앞에 하나의 수식어가 필요하다면 무엇이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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