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답게 살기 위해서..." 화가로 돌아온 박신양의 고백

이준목 2024. 2. 22. 17:3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TV 리뷰] tvN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

[이준목 기자]

"저한테 네 죄가 뭐냐고 물으신다면, 연기를 너무 열심히하고 지금은 그림을 너무 열심히 그리는 거라고 할수 있을 것 같다." 
"멋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다워지기 위해서, 내가 생각하는 사람다워지기 위해서 다른 분들도 그렇듯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배우에서 화가로, 항상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하며 달려온 박신양의 인생 이야기가 시청자들의 공감을 자아냈다. 21일 방송된 tvN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럭> 232회에서는 7년 만에 예능에 출연한 박신양이 화가로서의 제2의 인생과 전설로 남은 출연작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전했다.

박신양은 "10년 동안 그림에만 몰두했다"는 근황을 전했다. 박신양은 2019년 <동네 변호사 조들호2>를 끝으로 연기 활동을 중단하고 돌연 화가로 변신했다. 이전에는 그림을 전혀 그려본 적이 없었다는 박신양은, 10년 만에 어느덧 자신의 이름을 내건 전시회를 열고 책도 집필할 만큼 어엿한 화가로 자리잡았다.

박신양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계기가 러시아 유학 시절에 만난 키릴이라는 친구때문이라고 밝혔다. 당시 키릴의 모친이 돌아가셨을 때 돈이 없어서 울고 있는 친구를 위하여 비행기 값을 대준 것이 박신양이었다고. 이후 이번에는 박신양이 학비가 없어서 학교를 그만둬야 할 위기에 처하자, 키릴이 학생들의 서명을 모아 탄원서를 내주면서 서로에게 큰 힘이 되어줬다.

키릴은 현재 러시아에서 유명한 배우가 됐고 지금도 SNS를 통해 박신양과 가끔식 연락을 주고받는다고. 박신양은 처음엔 키릴을 그리워하며 그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 그리움이라는 게 정체가 뭘까, 나를 지배적으로 감싸고 있는 이런 그리움의 정서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고. 친구를 만나면 그리움은 해결되는 걸까. 그게 아닌 것 같다는 게 박신양의 결론이었다.

'그림보다 철학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 박신양은 그때부터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만학도가 되어 대학원까지 진학했다. "나는 무엇인가, 무엇을 그려야 되는가"라는 의문의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면서 박신양은 점점 그림과 철학의 세계로 빠져들게 됐다.

박신양은 친구 키릴의 얼굴, 사과, 당나귀 등을 소재로 10여 년간 작업해온 그림들 일부를 공개했다. 박신양은 오랜 세월에 걸쳐 동일한 소재로 그림을 다시 그린 경우가 많았다. 그림 실력이 발전하면서, 초기에는 사물의 원형을 있는 그대로 그리던 것을 넘어서 점차 자신만의 시각을 담아 새롭게 표현하고 해석하는 것으로 진화하는 박신양의 그림세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에 귀화한 원로 가톨릭 사제인 두봉 주교와의 인연도 털어놨다. 평소 두봉 주교를 존경했던 박신양은 그와 친분이 생겨 함께 전주에 다녀오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주교는 헤어지는 길에 박신양에게 사과 두 알을 선물했다. 차마 먹을 수 없었던 박신양은 시간이 지나 조금씩 썩어가는 사과를 보면서 "그분의 기억을 더 연장하고 싶어서 사과 그림을 그리게 된 게 어느덧 20개가 넘었다"고 설명했다.

또한 박신양은 당나귀 그림들을 소개하면서 "제가 전생이 있었으면 당나귀였을 것 같다"고 털어놓으며 "짐을 한없이 지는, 짐이 없으면 찾아가서라도 짐을 지는 스타일"이라고 표현했다. 박신양은 당나귀를 그리며 "짐은 과연 짐인가, 벗어던져야 할 짐이 아니라, 짐 속에서 뭔가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철학적 고민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화가로서는 10년 차지만 배우로서는 어느덧 28년 차를 맞이한 박신양은, 동국대 86학번으로 선배인 최민식(81학번), 한석규(82학번)와 함께 연극영화과 '전설의 3인방'으로 불리던 한 시대의 명배우였다.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박신양 역시 대학생활 내내 열심히 연기 연습에만 매진했다고.

박신양은 연기에 대한 열정 때문에 러시아의 전통 국립연극대학인 세프킨 대학으로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박신양이 유학했던 1990년대 초반은 당시 구 소련이 해체되던 혼돈의 시대였다. 박신양은 "무너지는 소련 속에서 예술가들은 무슨 생각을 할 것이냐"라는 궁금증이 생겨서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연기에 대한 갈망으로 힘들고 배고픈 시기를 묵묵히 견뎌낸 박신양은,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1996년 주연 데뷔작인 영화 <유리>를 통해 배우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기 시작한다.

박신양은 1990년대 후반 들어 멜로 영화 <편지><약속>을 연이어 대히트 시키면서 충무로의 '로맨티스트 전문 배우'로 급부상했다. 특히 고 최진실과 부부로 호흡을 맞춘 <편지>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내에게 미리 남겨놓은 영상편지 신은 단연 압권이었다. 무려 10여 분에 달하는 긴 장면을 그는 놀랍게도 NG 없이 원테이크로 소화했다.

박신양은 "두 번을 찍고 탈진을 했다. 나중에 보니까 대사를 이만큼 빼먹고 했더라. 보시는 분들이 괜찮다고 판단하고 그대로 영화에 들어갔다"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전했다. 스태프들조차 박신양의 연기를 보다가 감정에 북받쳐서 눈시울을 붉혔고, 실제로 눈물을 삼키는 소리가 영화 장면에 그대로 삽입되기도 했다.

또한 <약속>에서는 여의사(전도연)을 사랑한 조폭 역할을 맡아서 또 하나의 명연기를 펼쳐보였다. 성당에서의 마지막 고해 신에 나온 "저한테 네 죄가 뭐냐고 물으신다면, 이 여자를 만나고 사랑하고 혼자 두고 떠나는 것이 가장 큰 죄일 것입니다"라는 명대사는 이후로 수많은 방송에서 패러디 소재가 되기도 했다. 영화의 OST로 사용된 제시카의 'Good bye'도 해당 장면에서 사용되며 당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박신양의 대표작으로 2004년 방영된 드라마 <파리의 연인>을 빼놓을 수 없다. 평범한 여자와 재벌 2세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파리의 연인>은 진부한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당시 신인이었던 김은숙 작가 특유의 낭만적인 명대사, 박신양, 김정은, 이동건 등 배우들의 열연을 앞세워 최고 시청률 57.6%를 기록하는 초대박을 터뜨렸다.

특히 까칠하고 도도하지만 내 연인 앞에서 한없이 순정파가 되는 매력적인 한기주 캐릭터를 정립한 박신양의 연기는 "애기야 가자", "저 남자가 내 애인이다, 왜 말을 못해" 등 수많은 명대사, 명장면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정작 박신양에게는 연기하기가 난감했던 순간이었다고. 처음 "애기야, 가자"라는 대사를 처음 봤을 때 "어색했다. 이게 뭐지? 이걸 간지러워서 어떻게 한단 말이지 싶었다. 이걸 했을 때 사람들이 과연 나를 제 정신으로 보겠나 걱정됐다. 낯부끄러웠다"는 심경을 솔직히 고백하며 웃음을 자아냈다.

또한 박신양은 <파리의 연인>을 회고하며 "다른 작품들 만큼 어려웠다. 초반 프랑스 촬영 때부터 허리에 문제가 생겨서 한국으로 돌아와 수술을 하면서 촬영을 진행했다. 목발 짚고 진통제를 먹어가며 끝까지 촬영을 했다"는 뒷이야기를 털어놨다. 박신양은 "가급적 언제 어떤 시간에 내 모습이 보여지더라도 최선을 다하고 진심을 다하자고 생각한다. 그게 보는 분들에게 전달된다면 나는 행복하겠다고. 그게 그림이든 연기든"이라는 자신만의 철학을 밝혔다.

한편으로 박신양은 멜로물만이 아니라 영화 <범죄의 재구성>, 드라마 <쩐의 전쟁> 등 다양한 장르물에도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박신양의 또다른 대표작으로 꼽히는 <싸인>은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 생소하던 법 의학을 소재로 한 데다, 김은희 담당 작가도 아직 신인이던 시절이라 편성에 난항을 겪었다. 박신양의 합류 덕분에 편성 확정되고 흥행에도 성공하면서서 훗날 한국형 장르물의 신기원을 개척한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박신양은 법의학자 캐릭터를 실감나게 연기하기 위하여 실제 법의학자들의 근무를 참관했고 수많은 실제 시신들의 해부를 지켜보며 준비했다. 처참한 시신들과 그 사연들을 접하고 A4 160장 분량에 달하는 일지를 직접 작성해가면서 배역에 몰입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렇게 박신양은 "현장에서 사건을 지켜보며 '죽음'을 진정성있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박신양은 "연기를 할 때 제일 궁금한 건 그 분들이 그 일을 무슨 마음으로 하실까 하는 것이다. 같은 직업이라도 모두 똑같지 않고 디테일이 다르다. 그걸 표현할 수 있어야만 그 사람과 그 이야기가 믿어지는 것이니까"라며 자신만의 연기 철학을 밝혔다. 이후로도 박신양은 예술을 전공하기 위한 장학회를 설립하며 후학 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근황을 전했다.

연기자 생활을 중단한 동안, 박신양은 갑상선항진증으로 투병생활을 했다고 밝혔다. 하루에 30분도 서 있지 못할 때도 있었다고. 처음엔 정신력으로 이겨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박신양은, 어느덧 몇 년의 투병 기간이 흐르면서 "몸이 참 유한하고 허술하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털어놨다. 다행히 지금은 몸이 많이 회복된 상태라고.

박신양은 아픈 와중에도 그림을 놓지 못한 이유에 대하여 "연기를 하면서는 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없었다. 어쩌면 제 생각과 느낌을 이야기할 수 없는 채로 살아온 거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는 화가나 작가는 무조건 자기 이야기를 해야되는 거다. 그래서 나답게 생각해보자 마음 먹었다"고 밝혔다. 박신양에게 그림이란 "멋있게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답게 나답게 살기 위한 수단"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렇다면 '배우 박신양'을 다시 볼 수 있는 기회는 이제 더이상 없는 것일까. 비슷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어떻게 대답할지 고민했다는 박신양은 "지금은 그림을 그려서 충분히 표현하고 있는데, 연기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별로 없다"고 솔직히 고백했다.

하지만 만일 앞으로 팬들이 원하고 좋은 작품이 있다면 "언제든지 적극적으로 검토해볼 수 있을 것 같다"며 여지를 남겨놨다. 또한 박신양은 "미술을 소재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가 있다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는 구체적인 바람도 전했다.

마지막으로 박신양은 "요즘은 세 마디 이상 되는 진지한 이야기들을 사람들이 잘 나누지 않는다. 바쁘고 피곤하고 여유가 없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모든 이야기가 두 마디로 끝나겠나"라고 요즘 세태를 돌아봤다. 이어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은 좀더 본질적인 이야기들이다. '희망에 대한 확신', '사람에 대한 기대'같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있다"는 속내를 털어놓으며 앞으로 "제 그림과 연기를 통해서 누군가 들어주는 것 같은 위안과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다"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