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원한 딸 놔두고 서류 수십장 내러... 정말 끔찍이도 싫었다"

복건우 2024. 2. 22.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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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2차가해②] 범죄피해자 괴롭히는 정부 구조금, 금액 적고 절차도 복잡... 제때 안내도 안돼

"국가의 2차가해." <오마이뉴스>가 만난 범죄 피해자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했다. 수사, 재판, 피해 회복 과정에서 피해자들이 국가로부터 입은 상처, 그리고 이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대안을 취재해 네 차례에 걸쳐 보도한다. <편집자말>

[복건우, 김화빈 기자]

 일명 '바리캉 사건' 피해자 부모가 지난 1월 25일 자택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하면서 지난 6개월간 수사·공판 과정에서 모은 서류들을 펼쳐 보여주고 있다.
ⓒ 복건우
   
"혜빈이를 돌봐야 하는 상황에도 우리는 서류 수십 장을 제출하러 이곳저곳 다녀야 했어요."

'서현역 흉기난동' 희생자 김혜빈(20)씨 부모는 딸이 가해자 최원종(22)의 차량에 치여 뇌사 상태에 빠진 지난해 8월 3일부터 28일까지 이른바 '뺑뺑이'를 돌았다. 혜빈씨 어머니는 지난 1월 중순 <오마이뉴스>와 만나 "딸이 입원해 있을 때 병원에서 구조금 서류를 떼기 위해 동사무소를 방문했다가, 다시 수원지검에 직접 가서 신청서를 내야 했다"며 "지원제도가 다 나뉘어져 있어서 신청하기까지 각 기관마다 계속 전화를 돌려야 했다"고 떠올렸다.

범죄피해자보호법에 따르면 범죄피해로 인해 전치 2개월 이상 부상·질병을 입거나 1주 이상 입원치료가 필요한 피해자는 국가로부터 중상해 구조금을 받을 수 있다. 또 검찰은 산하 범죄피해자지원센터를 통해 범죄 피해자와 가족의 피해 회복을 위한 생계비, 장례비, 치료비, 주거이전비 등을 지원한다. 문제는 입원한 딸을 돌봐야 하는 상황에서도 부모가 직접 지원금을 '알아서' 준비하고 신청해야 한다는 점이다.

실제 혜빈씨 부모는 한 달 내내 가족관계증명서와 주민등록표 등본·초본을 떼러 동사무소를 방문하고, '중상해 구조금 신청서'와 '환수 및 대위 확인서'를 직접 내러 수원지검 범죄피해자보호실을 찾아야 했다. 딸이 세상을 떠난 뒤 내야 하는 서류는 더 늘었다. 범죄 피해자가 사망하면 '중상해 구조금'이 '유족 구조금'으로 변경되는데 '범죄 피해로 인한 사망'을 확인할 수 있는 공소장(판결문), 사망진단서(시체검안서), 범죄 피해 직전 피해자의 3개월 월급명세서 등을 내야 한다. 산더미 같은 서류를 준비하는 것도 진이 빠지지만, 그마저도 다른 지원금과 중복되면 받을 수 없다.

"딸 입원했는데 서류 수십 장 들고 여기저기"

혜빈씨가 입원한 지 열흘이 넘어서야 담당 검사가 병원을 찾아왔다. 입원 엿새 만에 1300만 원의 치료비가 나온 사실이 언론에 알려진 뒤였다. 검찰은 혜빈씨 부모에게 '국민건강보험공단(건보공단)에서 치료비를 우선 지급하고 추후 가해자 최씨에게 구상권을 청구하겠다'고 약속했다. 대검찰청 '범죄피해자에 대한 경제적 지원 업무처리지침'에 따르면 치료비는 연간 1500만 원(최대 5000만 원)까지 지원할 수 있다.

복잡한 지원제도보다 더 힘든 건 국가로부터 받은 상처였다. 혜빈씨 부모가 건보공단과 통화에서 들은 첫 질문은 "뺑소니 사고인가요?"였다. 범죄 피해자 가족에겐 '이상동기 범죄'를 단순 '교통사고'로 치부하는 듯한 발언이었다. 혜빈씨 부모는 정부 기관의 이런 태도가 범죄 피해자의 일상 회복을 더 어렵게 한다고 지적했다.

"혜빈이한테 집중할 수 없게 만드는 지원제도들, 그게 끔찍이 싫었어요. 딸을 돌봐야 하는 상황에도 우리는 왜 서류 수십 장을 제출하러 다녀야 했을까요. 겨우 돈 몇 푼 더 받겠다고 그렇게 시간을 낭비한 게 정말 후회돼요. 국가가 먼저 나서서 피해자에게 배상하고 남은 가족을 위로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렇게 받은 돈은 3개월 치 생계비 300만 원, 긴급생계비 240만 원이 전부였다. 그보다 더한 고역은 딸의 '목숨값'과도 같았던 장례비였다. 혜빈씨 부모가 지원받은 장례비는 총 400만 원로 전체 장례비(1300만 원)의 절반도 안 되는 액수였다.

관할 검찰청은 차액 지급을 위해 최씨 쪽 자동차 보험사에서 나오는 장례비(사망보험금)를 얘기했으나, 혜빈씨 부모는 "사망보험금은 민사소송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받을 수 있고, 재판이 진행 중이라 최씨 쪽에서 합의금을 받았다고 걸고 넘어질 수도 있다"며 전부 거절했다.
 
 '서현역 흉기난동' 희생자 고 김혜빈씨 부모가 지난 1월 18일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마치고 사건 현장 인근을 걸어가고 있다.
ⓒ 복건우
  
"우리가 묻기 전에 국가가 다가와줬으면"
 
 
지난해 7월 경기 구리시 한 오피스텔에 감금돼 4박 5일간 성폭행을 당하고 바리캉으로 머리카락을 잘린 딸 박예진(21·가명)씨. 가해자는 박씨의 전 남자친구(26)였다. 일명 '바리캉 사건'으로 평범했던 가족의 삶은 산산조각이 났다. 박씨의 부모는 "지난 6개월 동안 경제적 어려움은 두말할 것도 없고 일상이 전부 무너져 내렸다"며 하루하루가 "생지옥"이었다고 했다. 

"부모가 일을 그만두지 않으면 이렇게 못 나서요. 아이를 돌보고, 증거를 찾고, 기자들을 만나고. 당장 굶어 죽을 지경인데도 생계비를 청구할 여유가 없어요. 지금 당장 아이 치료가 우선이니까..."

부모는 생업을 접고 딸의 곁을 지켰다. 아버지가 범죄를 뒷받침할 증거를 찾으러 다니는 사이, 어머니는 박씨의 치료와 회복을 도왔다. 부모는 검찰청 산하 범죄피해자지원센터에 생계비 지원을 신청했다. 그러나 3개월간 손에 쥐어진 금액은 총 360만 원(월 120만 원). 4인 가구의 생계를 유지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또 박씨는 여성가족부 산하 해바라기센터 의료비 지원(500만 원)으로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를 받았는데 예정된 치료 횟수(10회)의 절반도 지나기 전에 지원액이 거의 소진됐다. 

사건 이후 어머니는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아버지가 받은 정신적 충격도 상당했다. 그는 "딸과 아내를 생각해 내색하지 않았지만 대화할 때면 상대방 말을 종종 까먹고 기억이 뚝뚝 끊긴다"고 했다.
 
 이른바 '바리캉 사건' 가해자 A씨의 1심 선고공판이 1월 30일 오후 2시 의정부지법 남양주지원에서 열렸다. A씨는 강간, 성폭력범죄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 특수협박 등 7개 혐의로 구속된 채 재판에 넘겨졌다.
ⓒ 소중한
 
검찰은 지난해 말부터 범죄 피해자에게 1인 가구 기준 월 최대 60만 원의 생계비(2인 가구 100만 원, 3인 가구 130만 원, 4인 가구 160만 원)를 최장 3개월간 지급하고 있다. 바리캉 사건 때보다 1인 지원액이 10만 원씩 늘었다. 하지만 트라우마로 사실상 생계를 꾸리기 어려운 이들이 경제·심리적 피해를 온전히 회복하기엔 여전히 부족한 액수다. 영수증, 진료비 세부내역서 등 서류를 먼저 내야 하는 선증빙 후지급 방식도 불편하다.

"가해자는 자기 가족을 동원해 끝까지 우리에게 보복한다는데 그 사이 집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아나요. 우리가 뭘 궁금해하기 전에 국가가 먼저 다가와서 알려줬으면 해요. 재판이 끝나면 주민등록번호 변경, 개명 신청까지 관심을 가지고 지원해 줬으면 좋겠어요."

편의점 사장님이 내준 치료비 

범죄 유형에 맞는 지원제도를 연계받지 못한 경우도 있다. '편의점 숏컷 폭행 사건' 피해자 이연주(20대·가명)씨는 지난해 11월 4일 진주시 한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도중 20대 남성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했다. 가해자는 "머리가 짧으니 페미니스트"라며 이씨를 바닥에 넘어뜨리고 주먹과 발로 머리를 수차례 때렸다.

여성혐오 범죄가 명백했지만 담당 경찰서는 사건을 여청과가 아닌 형사과로 이관했다. 검찰 공소장에도 상해와 재물손괴만 기재됐다. 이씨는 "수사 단계에서 여성혐오라는 맥락이 다 빠져 있었다. 폭행당한 날 병원 진료과 네 곳을 혼자서 찾아다니며 범죄 피해자라고 밝혔으나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했다"며 "치료비도 편의점 사장님이 선납해 주셔서 낼 수 있었다"고 했다.

이씨는 뒤늦게 연결된 진주성폭력피해상담소를 통해 '상해 피해자'로서 범죄피해자지원센터 생계비와 지자체 긴급복지를 알아봤지만, 둘을 합해도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받은 최저임금에는 미치지 못했다. 심지어 소득이 생기면 복지지원은 중단됐다. 담당 지자체 여성가족과는 '수입이 발생하지 않는 조건'으로 이씨에게 지원금을 준다고 했다.

이씨를 지원하는 정윤정 진주성폭력피해상담소장은 "다른 가정폭력, 성폭력, 교제폭력, 스토킹범죄, 디지털성범죄, 권력형성범죄 피해자와 달리 이씨는 1366(여성긴급전화) 등 어떠한 상담원 안내도 받지 못했다"며 "이씨의 경우 언론 보도가 나온 걸 보고 성폭력피해상담소가 직접 경찰에 연락했는데, 처음부터 여성혐오 범죄로 상담소가 연계됐다면 병원 치료는 물론 복지서비스와 심리상담까지 지원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국선변호사 확대, 지원 선지급 필요"
 
 일명 '바리캉 사건' 피해자 아버지가 지난 1월 25일 자택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하면서 '범죄피해자 지원제도 안내' 서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 복건우
 
지난달 <오마이뉴스>가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받은 법무부 '범죄피해자보호기금 2023년 존치평가 보고서'를 보면, 치료비·생계비 지원 예산은 45억 원(2021년), 40억 원(2022년), 35억 원(2023년)으로 해마다 감소 추세다. 법무부의 '최근 5년간 범죄피해구조금(유족·장해·중상해 구조금) 신청 및 지급 건수'를 보더라도 구조금 지급 건수는 305건(2019년), 206건(2020년), 191건(2021년), 189건(2022년), 148건(2023년)으로 줄어들었다.

정윤정 소장은 "국가는 범죄 피해자가 민사 손해배상 소송으로 자신의 경제적 피해를 알아서 해결하도록 내버려 둘 것이 아니라, 이들의 일상 회복을 위해 필요한 지원책을 먼저 찾아 선지급 방식으로 지급하고 추후 피고인에게 구상권을 요구하는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러한 배경에는 사건 초기부터 전담 국선변호사 조력을 받기 어려운 상황도 작용했다. 피해자 전담 국선변호사는 성폭력, 아동학대, 장애인학대, 인신매매 등 범죄 피해자의 법률대리를 돕는 제도다. 그러나 범죄 유형에 따라 국선변호사 선임 대상에서 빠져 있거나(서현역 흉기난동, 진주 숏컷 폭행 사건), 경찰조사가 마무리되는 시점에 선임돼 제대로 지원을 받지 못했다(바리캉 폭행 사건).

한주현 변호사(법무법인 정진)는 "법무부의 행정은 기본적으로 형벌권을 행사할 뿐 경제적 피해 회복은 피해자가 알아서 할 문제로 보는 경향이 있다"며 "앞선 사건들의 경우 수사 초기부터 국선변호사가 붙었다면 범죄피해자보호법에 따라 각종 지원제도 신청을 도울 수 있어 피해자가 권리를 수월하게 행사했을 것"이라고 했다.

또 "국선변호사 지원 범위를 확대하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이 통과돼도 경찰조사 전에 피해자에게 제도를 안내하는 등 실무 개선이 동반돼야 한다"며 "성범죄와 아동학대뿐만 아니라 강력범죄 피해자들에게도 경찰조사 단계에서 '범죄피해자 지원제도 안내서'를 제공하는 등 지원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최소한의 매뉴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국가의 2차가해③>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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