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린 클라크의 문화산책] 디지털 시대의 향수

2024. 2. 22.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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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린 클라크 배재대 동양학 교수

고향 알래스카에서 겨울 동면 휴가를 보내고 최근에야 한국에 돌아왔다. 알래스카에 도착해 18시간의 시차에 적응하고 늦은 오전의 일출 시간에 맞춰 일어나게 되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밤낮으로 쉬지 않고 내리던 눈은 12일째에 겨우 멈췄고, 거의 200㎝가 쌓이는 신기록을 달성했다. 제설작업 후 한 줄로 줄어든 도로 위에 스쿨버스가 다시 나타났다. 3m 높이의 갓길 위로 빼꼼히 튀어나온 버스의 주황색 지붕이 꼭 망고 빙수 같았다. 재택근무를 하던 친구들은 사무실로 복귀했고, 기온이 조금 올라가고, 눈더미도 서서히 줄어들었다. 그리고 2월 1일, 한 떼의 뭉게구름이 산자락을 타고 올라오더니 기온은 영하로 떨어지고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해 3일 만에 50㎝가 쌓였다. 고등학생 조카와 친구들은 동네의 지붕 및 자동차에 쌓인 눈 치우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을 두둑히 벌었고, 다른 가족들은 중세 시대로 돌아간 듯 하늘을 두려워하며 지내게 되었다.

「 예술적 영감 원천이던 그리움
디지털 기술로 느낄 틈 없어져
언제 어디든 접하는 고향 뉴스
전통 탐구 의욕마저 줄어들어

김지윤 기자

기후 변화로 인해 최근 ‘이상 현상’이 계속되었던 터라, 처음에는 눈이 내리는 풍경을 보면서 이런 날씨가 매우 ‘정상적’인 알래스카 날씨라고 생각했다. 지난 몇 년간 엘니뇨로 무겁고 축축한 진눈깨비만 내렸는데 이번에는 새하얗고 포슬포슬한 눈이었다. 어릴 적에 이런 눈이 내리면 여동생과 나는 집 차고 지붕으로 올라가 폭신하게 쌓인 눈 위로 뛰어들곤 했다. 여러 모로 반가운 눈이었다. 게다가 어찌나 많이 내리던지 우리 지역의 빙하가 다시 자라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몇 년 동안 따뜻한 겨울을 보냈던 탓인지, 예전에는 능숙하게 눈을 치우던 주민들과 대비가 잘 되어 있던 시 당국의 제설 부서 모두 이번 사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나 역시 보도 없는 길로 다니며 하루에도 몇 번씩 집 앞의 눈을 치워야 하는 일상이 솔직히 즐겁지는 않았다. 게다가 빙판에서 넘어져 발목을 심하게 삐는 바람에, 휠체어에 의지해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향수병이라는 게 이렇다. 시간이 흐르면서 발생하는 필연적인 변화가 우리의 왜곡된 기억과 공모해, 그리워하던 과거의 재현을 불가능하게 한다. 우리가 원하는 줄 알았던 것은 우리가 생각하던 것과 전혀 다르다.

향수(鄕愁)를 뜻하는 ‘nostalgia’는 그리스어 ‘nóstos’(귀향)와 ‘algia’(고통)의 합성어로, 17세기 후반에 어느 스위스 의사가 해외에서 활동하는 용병들이 특히 걸리기 쉬운 ‘질병’이라고 정의하면서 처음으로 탄생한 용어다. 향수병을 예방하려는 시도 중 하나로는 고향에서 즐겨 부르는 노래들을 연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음악이 우리의 정서에 영향을 미치고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힘을 은연중에 인식한 듯하다. ‘향수’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았지만 고향을 그리워하는 정서에서 착안한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 같은 고전 인물들도 있다. 동양의 경우 ‘오디세이아’보다도 더 오래된 ‘해하가’(垓下歌)에 비슷한 주제가 나타난다. 이 노래에는 유방이 병사들을 시켜 초나라 노래를 부르게 하고, 이를 들은 초나라 병사들이 고향 땅이 한나라에 정복당했다고 착각해 사기가 꺾여 탈영했다는 비화가 있다.

현대 기술이 향수병을 예방하는 효과적인 백신이라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국제 교환학생으로 나갔던 나는 현지 언어를 배워야 했고, 지금도 그 1년 사이에 미국에서 발생한 사건과 대중문화에 대한 지식에는 공백이 있다. 오늘날 유학생이나 파병 군인은 데이터만 충분히 확보하면 가족의 저녁 식사 자리나 애인의 침실을 소환할 수 있다. 고향 뉴스는 모국어로 24시간 시청 가능하다. 젊었을 때 듣던 음악이 그리우면? 음성 명령 한 마디로 듣고 싶은 노래를 곧바로 검색할 수 있다. 이렇게 디지털 문화는 그리움을 느낄 여지를 대폭 축소한다. 우리는 사색적인 ‘한(恨)의 시대’가 아닌 주의 산만(注意 散漫)한 ‘흥의 시대’에 살고 있다. 향수병을 극복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은 노년층뿐, 우리는 향수병과 씨름할 일이 거의 없다.

우리가 유지하려 하는 음악·의례·언어·가족적 전통 중 많은 부분이 향수에서 힘을 얻는다(그리고 지지층을 찾는다). 오늘날 전 세계의 젊은 세대가 전반적으로 전통 음악에 대한 관심이 적은 이유 중 하나는 옛날 형식의 음악을 듣고 싶을 때 언제든지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음원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 나라의 중요한 음악적 전통이라는 영역에 진입하기 위해 전통 악기를 배우고 공동체의 일원이 될 필요가 없다. 이런 전통들은 세대가 바뀔수록 사람의 손길을 점점 잃어버리고, 기기에 디지털화하고 저장되는 빈도 자체도 케이팝에 훨씬 못 미친다.

폭설을 그리워하면서도 막상 집 앞마당에 눈이 쌓이면 더 이상 그것을 치울 만한 힘이 없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젊은이들도 언젠가는 자기 나라의 오랜 전통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전통을 탐구할 의욕이 들었을 때는 이미 허리가 너무 약해져 삽을 들 힘조차 없을 수도 있다. 다행이라면 그들이 핸드폰도 들지 못할 정도로 늙는 일은 절대 없다는 것이다.

조세린 클라크 배재대 동양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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