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지게 지고가다가... 억울한 부역혐의 받은 이들은 이렇게 죽었다 [박만순의 기억전쟁2]

박만순 2024. 2. 20. 10: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유도 모르게 연행된 이들, 충북 청주 가덕면의 비극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여보 얼른 숨으세요"라는 아내의 숨넘어가는 소리에 김인제는 잔뜩 긴장했다. 갑자기 터진 난리에 지주와 공무원들은 사방팔방으로 피난하기에 바빴다. 인민군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벌인다는 인민재판에 지주와 공무원, 우익단체 간부들이 반동으로 몰려 고초를 받는다는 소문이 쫙 퍼진 터였다.

그런데 행정초등학교 교감인 김인제는 피난 갈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 29세였던 그가 처자식만 있다면 홀가분하게 피난길에 올랐겠지만 부모와 어린 동생들, 그리고 큰집 식구들까지 18명이 이웃해 살고 있었다. 그러니 열여덟 식구가 정처 없는 피난길에 오른다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청원군 가덕면 부역혐의자 100명이 구금됐던 곳
ⓒ 박만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인민군은 1950년 7월 13일 충북 청주에 입성했다. 청주시를 계란 흰자처럼 둘러싼 충북 청원군의 남부지역에 속하는 가덕면 행정리에 인민군이 들이닥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김인제는 부모와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창고 씨나락 독으로 들어갔다. 씨나락 독은 해마다 추수한 벼 중 다음 해에 종자로 쓰기 위한 볍씨를 저장하는 독을 말한다. 쌀농사를 짓는 대부분의 농가에 씨나락 독이 있는데, 김인제 교감의 형 집은 농사 규모가 커, 씨나락 독이 벼 세 가마가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다. 마침 모내기를 한 뒤라 씨나락 독은 비어 있었다.

김인제가 씨나락 독에 들어가자 그의 아버지는 독 위에 나무판자를 올려놓고, 그곳에 농기구를 올려놓았다. 김인제만이 몸을 피한 것은 아니다. 그의 동생 김학제(당시 15세) 역시 인공시절 친구 집 골방에 숨어 있어야 했다. 본의 아니게 인민군의 심부름을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김인제 어머니는 두 아들의 밥을 두 달 반 동안 매일 날라야 했다.

국군 환영대회 나갔다가...

하루 종일 듣는 소리가 어머니의 "얘야 밥 먹어라"는 소리와 창고에서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 쥐들의 '찍찍' 소리였는데, 갑자기 인기척이 들리니 기겁했다. 인공시절 김인제 교감처럼 집 안에 숨어 있던 행정초등학교 조재천 선생이 찾아왔다.

김인제가 숨을 죽이고 있자 조재천은 재차 "선생님 얼른 나오세요"라고 재촉했다. 행정초등학교 동료 교사인 조재천의 목소리를 확인한 김인제는 금방 잠에서 깬 듯한 부스스한 머리를 한 채 씨나락 독에서 나왔다.

"국군이 진주한답니다. 국군 환영대회를 열어야지요." 오늘 죽을까, 내일 죽을까 하던 차에 낙동강으로 밀려갔던 국군이 수복한다니 뛸 듯이 기뻤다. 그 시간부로 김인제 교감의 두 달 반 동안의 씨나락 독 생활은 마감됐다(민간인학살 충북대책위원회, <기억여행>, 2006).

김인제와 조재천은 행정초등학교 부근 마을을 각각 돌아다니며 학생들을 소집했다. 학생들을 동원해 초등학교에서 '국군 환영대회'를 열기 위해서였다. 조재천이 행정리 한말(한촌) 어귀에 들어섰을 때이다.

"야 이리 와"라고 대뜸 반말 지거리를 하는 이는 총을 든 군인이었다. "아! 반갑습니다. 군인 양반"하는 환영 인사치레에 돌아온 군인의 대꾸는 "이 새X가"라는 욕설과 구타였다. 조재천은 더 이상의 대꾸도 하지 못한 채로 가덕면 병암리에 있는 가덕초등학교로 끌려갔다.

당시 가덕면 국전리에 살던 김인제는 국전리의 중심마을인 양지말을 다니며 학생들에게 초등학교로 모일 것을 알렸다. 하지만 그 역시 조재천처럼 잠시 후에 군인에게 붙잡혔다. "왜 이러십니까? 우리는 여러분 환영대회를 준비하는 중이었습니다"라는 항변을 했지만, 군인의 총 개머리판이 김인제의 어깨를 찍어 눌렀을 뿐이다.

똥지게를 지고 가던 청년도 연행

군인들에 의해 가덕초등학교에 연행된 이들은 인민군 진주 직전 피난길에 오르지 못한 공무원만이 아니었다. 똥지게를 지고 가던 젊은이도 막무가내로 연행됐다. 똥장군이 깨져 청년의 옷에 똥이 튀어 구린내가 진동을 해, 주변 사람들이 코를 감싸 쥐었다.

평범한 농사꾼에 불과하던 행정리 오영식(당시 34세)과 인차리 김준호 역시 영문도 모른 채 집과 마을에서 연행됐다. 심지어 청원군 남일면 문주리 사람도 끌려왔다. 당시 가덕국민학교 교사였던 박희봉(24세)은 그의 사촌 동생이 인공시절 가덕면 인민위원장을 했다는 이유로 가덕초등학교로 연행됐다.

사실 박희봉은 특정 사상에 경도된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가 살던 마을인 남일면 문주리는 좌우익 갈등이 없었던 평온한 마을이었다. 그런데 단지 그의 사촌 동생이 가덕면 인민위원장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끌려왔다.

그렇다면 박희봉은 왜 남일면 소재지인 효촌리로 연행되지 않고 가덕면 소재지인 병암리에 있는 가덕초등학교로 끌려갔을까. 사실 문주리는 가덕면 병암리에 인접해 있는 마을로 생활권이 가덕면에 속했던 곳이다. 그런 이유로 문주리에서는 박희봉뿐만 아니라 이장을 맡고 있던 노철우(당시 50세)와 의용군에 끌려갔다 온 전흥수(당시 18세)가 가덕초등학교로 연행됐다.

가덕면 일대와 남일면 문주리에서 소위 '부역혐의'라는 혐의를 쓴 청장년들이 무차별적으로 연행되었다. 연행된 이 중에는 인공시절 감투를 쓴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 평범한 농사꾼으로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았다. 이러저런 이유로 가덕초등학교에 구금된 이들은 31개 마을 약 100명이었다. 충북 청원군 가덕면 일대가 막 수복한 대한민국 군인에 의해 인간 사냥터가 된 것은 1950년 9월 29일이었다(진실화해위원회, <충북지역 군경에 의한 사건>, 2010).

자식 떠나보낸 아버지, 결국 총살

"남학희 나와" "누군데 초면에 반말이십니까?" 자식뻘밖에 되지 않는 군인들이 다짜고짜 반말지거리를 하자 기분이 상한 남학희는 '철없는 아이 타이르듯' 대꾸했다. 그러자 군인은 "이 노인네가 미쳤나, 어디서 말대꾸를 해"라며 수염을 잡아당겼다. 다락방에 숨어 있다가 마당에서 아버지가 곤욕을 치르는 소리를 들은 남상열이 뛰어나왔다. "당신들은 댁에 아버지도 없습니까"라며 항의했다.

"이런 빨갱이 새끼가"라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군 장교의 권총에서 불이 뿜어졌다. 인공시절 인민위원회 감투를 썼다가 군인들이 수복한다는 소식에 다락방에 숨어 있던 남상열이 자신의 앞마당에서 너무도 허무하게 총살당한 상황이었다.

행정리 인민위원장을 맡았던 남상열의 아버지 남학희는 마당에서 자식의 허망한 죽음을 고스란히 보아야만 했다. 자식을 먼저 보내는 것만큼 커다란 마음의 상처가 있겠는가. 하지만 남학희 역시 가덕초등학교에 연행되어 그날 밤 불귀의 객이 되었다. 마을 인민위원장이라는 것은 기껏 이장에 불과한 것이다. 누군가는 맡아야 할 감투를 썼다는 이유로 재판도 없이 죽임을 당했다. 그것도 자식을 먼저 보내고 불과 몇 시간 후에 벌어진 일이다.

가덕초등학교 교실에 구금되었던 이들은 그날 저녁 초등학교 뒤편 야산과 맞은 편 야산, 두 곳에서 집단학살을 당했다. 그때 죽임을 당한 이중 오영식은 불과 5년 전에 일본에서의 지옥같은 생활을 보내고 고향으로 돌아온 이였다. 즉 일제강점기 말에 강제동원되어 일본으로 끌려간 그가 해방을 맞이해 기쁜 마음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두고 서였다.

김인제가 총살당한 줄도 모르고 있다가 행정초등학교 학부모들이 알려 줘 동생 김학제와 가족들은 병암리 가덕초등학교 맞은편 야산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김인제가 급소에 총을 맞지는 않았지만 시신 주변 땅이 맨들맨들해져 있었다. 살기 위해 발버둥 쳤을 형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김학제는 반백 년 넘게 형 시신 주변의 맨들맨들해진 땅을 잊을 수가 없었다.

선거운동 했다는 이유로...
 
 가덕면 부역혐의자들의 피살 장소
ⓒ 박만순
 
어릴 때 조실부모하고 머슴살이를 하다가 결혼 후 처가살이를 하던 신창우(1907년생)는 아무리 노력해도 살림이 펴지지 않았다. 결국 고향인 충북 청원군(현재의 청주시) 가덕면 상대리로 돌아와 농사를 짓게 되었다. 하루는 친척인 이장이 불러 "일 좀 봐주게"라고 했다. 1948년 초대 국회의원 선거에 같은 집안 사람인 신승휴 선거운동을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금융조합 이사였던 신승휴(1897년생)는 이 선거에서 청원갑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낙선했다. 신창우의 활동은 거기까지였다. 그런데 그는 전쟁이 나고 인민군이 점령하면서 우익으로 찍혔다. 1950년 7월 말 인민군에 끌려간 그는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신창우가 정확히 언제, 어디서 죽임을 당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런데 포수로 유명한 행정리의 신만휴가 인민군에 의해 1950년 7월 20일 가덕면 인차리 모래재에서 죽임을 당한 것으로 보았을 때 신창우도 같이 죽임을 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이 70일 후에 벌어진 부역혐의자 학살 사건과 연관성이 있을까? 단정적으로 얘기할 수는 없겠지만 인공시절의 우익인사 학살 사건이 후일 군경 수복 후의 부역혐의자 학살과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또한 가덕면에서는 인공시절 의용군에 입대한 이도 여럿 있었으며, 일부 우익인사들이 인민군과 지방좌익에 의해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비단 가덕면에서만 있었던 일은 아니다. 그런데 충북에서는 부역혐의자 300여 명이 죽임을 당한 충주 엄정면 다음 규모의 학살이 청원군 가덕면에서 벌어졌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군인들이 수복하는 과정에서 불확실한 정보에 근거해 가덕면 민간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연행 후 학살한 것이다. 즉 국군 1사단 선발대가 보은을 경유해 청원군 가덕면 일대에서 인간사냥을 한 것이다.

엄마에게 총을 겨눈 군인

"남편 어디 갔어?"라고 윽박지르며 김복해에게 총을 겨눈 군인의 눈은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군인에게 끌려가 학살된 가덕면 인차리 김준호의 아내와 딸은 살아 있지만 사는 것(?)이 아니었다.

김준호 아내 김복해는 식모로 이곳저곳을 떠돌아야 했다. 딸 김복희(1947년생)는 큰아버지 집에서 지내야 했다. 다행히 큰아버지는 6.25 전에 김복희의 오빠인 김정남을 양자로 받아들여 건국대학교까지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게다가 김복희를 청주여중까지 다니게 해줬다. 중학교 졸업 후 큰집에서 농사일을 돕던 그녀는 가덕면 소재지인 인차리에서 이발소를 하던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시댁은 청원군 남일면 효촌리였는데, 층층시하로 한 울타리에 12명이 살았다. 새벽에 눈 뜨면서부터 자정에 눈감기까지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남편이 이발소를 접고 효촌리에서 양계장을 할 때 김복희는 광주리에 계란을 담아 여러 마을로 팔러 다녔다. 1985년에 사망한 남편의 역할까지 떠안은 그녀는 집안 식구들 뒷바라지에 어느덧 80세를 앞두고 있다. 그녀의 고단한 삶의 근원에는 아버지의 허망한 죽음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국군 1사단의 충북지역 수복 경로
ⓒ 진실화해위원회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