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지구촌의 장벽

2024. 2. 20.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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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일은 유엔이 2007년 지정한 '세계 사회정의의 날'이다.

인종 민족 종교 문화 장애 등의 차별과 빈곤의 장벽을 극복하고 안정적이고 안전하며 공평한 사회를 건설하자는 데 세계가 뜻을 같이한 날이다.

유럽만 두고 보면 1989년 붕괴된 베를린 장벽의 길이가 155㎞에 불과한 데 비해 이후 2021년까지 유럽 국가들이 건설한 장벽의 길이는 도합 1000㎞가 넘는다.

허문 장벽의 6배 길이만큼 새로 벽을 쌓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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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일은 유엔이 2007년 지정한 ‘세계 사회정의의 날’이다. 인종 민족 종교 문화 장애 등의 차별과 빈곤의 장벽을 극복하고 안정적이고 안전하며 공평한 사회를 건설하자는 데 세계가 뜻을 같이한 날이다.

그런데 지금 지구촌에는 담쌓기가 한창이다. 그리스가 튀르키예와의 국경에 철벽을 설치했고 튀르키예는 이란과의 국경에 쌓은 돌벽을 강화했다. 폴란드는 벨라루스와의 국경에 철책을 설치하면서 차후 영구적인 벽을 쌓겠다고 발표했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 주변에 철벽을 설치한 건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제는 이집트 역시 가자지구와 맞닿은 라파 지역에 높이 7m 넘는 콘크리트 벽을 짓고 있다. 유럽만 두고 보면 1989년 붕괴된 베를린 장벽의 길이가 155㎞에 불과한 데 비해 이후 2021년까지 유럽 국가들이 건설한 장벽의 길이는 도합 1000㎞가 넘는다. 허문 장벽의 6배 길이만큼 새로 벽을 쌓은 셈이다.

물론 장벽 쌓기가 새로운 일은 아니다. 고려 초기 북쪽 변경에 우리 민족이 쌓은 천리장성이 있고, 로마가 영국에 건설한 하드리아누스 방벽도 있다. 중국 진나라 시황제 때 축성한 만리장성도 있다. 이들 장벽은 대부분 외부로부터의 군사적 압력에 대응하기 위해 쌓은 것이다.

그러나 최근 갑작스레 부상하는 장벽 쌓기의 추세는 이와는 전혀 다른 이유에서 비롯됐다. 난민의 접근을 막고자 함이다. 이집트는 이스라엘이 군사 작전을 국경 도시 라파까지 확대할 뜻을 최근 밝힘에 따라 자국으로 몰려들지 모를 팔레스타인 난민의 접근을 막고자 벽을 설치하고 있다. 현재 불법 입국 망명 신청자 즉각 추방정책이 종료된 미국의 경우 이주자는 단 몇 발자국이라도 미국 국경을 넘으면 피난 신청을 할 수 있기에 이들은 팔다리가 부러지는 위험을 감수하고서 철책을 넘는다. 이럴수록 국경의 장벽을 다시, 더 높이 쌓아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을 것은 당연하다.

기독교인은 이런 담쌓기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난민과 피난민이 넘쳐나는 시대다. 나라마다 한편으로는 국제사회의 정의를 외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피난민을 밀어낼 벽을 더 높고 길게 쌓고 있다. 이런 현실을 결코 질책만 할 순 없다. 국가 정책은 자국민을 위해 세워져야 하며 국가는 제한된 자원으로 정책을 수행해야 하는 과제가 늘 있기 마련이다.

다만 난민과 피난민을 대함에 있어 기독교인의 생각과 실천은 남달라야 할 부분이 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기독교인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는다. 정책, 경제적 영향, 문화적 차이 등 이주민을 대할 때 고려할 면이 여럿 있는 건 분명하나 이 모든 것에 앞서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이 그분의 은총으로 사는 것임을 안다. 이 지식은 장벽 너머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기다리는 이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됨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방인 룻 이야기가 이 은총의 대표적 사례다. 룻은 자신을 품어준 집안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가를 일으키는 데도 기여했다.

장벽이 우리를 여러 면에서 가를지라도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이들이라는 진실 자체를 가로막을 순 없다. 이 지식을 실천하는 삶이 어떤 모양을 가질지를 두고 애쓰는 행위. 이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대사로 살아가는 기독교인이 갖는 의무이자 특권이다.

박성현(미국 고든콘웰신학대학원 구약학 교수·수석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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