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몰랐지... 교토에는 고려미술관이 있다

권미숙 2024. 2. 19.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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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본 사업가 정조문 설립, 한국 문화유산 1700여 점 전시 그러나 휴관이 길어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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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미숙 기자]

교토에 가면 정조문이 세운 고려미술관이 있다. 고려미술관은 해외 전시관 중 우리나라 유물만 전시하는 유일한 공간이다. 설립자 정조문은 1989년 통일 조국에 고려미술관을 기증해 달라 유언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25년 후엔 통일이 될 거라는 그의 바람은 2024년 1월 현재, 35년이 지났건만 요원해 뵌다. 과연 고려미술관은 통일되는 그날까지 견뎌낼 수 있을까?

학력이 소학교 3년이 고작인 재일본 한국인 사업가 정조문(1918-1989)은 파친코 사업으로 자수성가하기까지 부두 노동자로 가난과 차별을 겪으며 살았던, 조국이 지켜주지 못한 난민에 불과했다.

그는 정치가도, 철학자도, 예술가도 아니다. 그 무엇도 아닌 그가 '나라와 민족'이 무엇이냐 물으며 울어야 했다. 통일 조국이 있기 전까지는 죽어도 고향에 돌아가지 않겠다 결심하고 1989년 눈을 감기까지 한 번도 조국의 땅을 밟지 않았다. 그의 고향은 경북 예천군 망우리다. 분단 조국이 만들어 낸 슬픈 유랑인이다.
 
▲ 고려미술관1 교토고려미술관 정원입니다.
ⓒ 권미숙
 
지난 1월 24일~28일까지 북원태학(남원의 연수기업)에서 전·현직 교사를 상대로 일본 속 한국 문화와 역사를 주제로 여행을 다녀왔다.  일본 여행을 앞두고 영화 <정조문과 항아리>를 봤다. 영상을 보며 그가 만든 고려미술관에 꼭 가보고 싶었다.
고려미술관은 정조문이 평생 수집한 한국 문화유산 1,700여 점을 전시한 공간이다. 1988년, 그는 그가 살았던 자택에 미술관을 설립하고, 그가 소장하고 있는 문화유산 1,700여 점을 담아 공익 재단 법인 고려미술관을 개관했다. 유랑인으로 살았던 그처럼 일본에서 유랑해야 했던 한국 문화유산이 비로소 쉼터를 찾은 셈이다. 그 고려미술관은 올해로 개관 35주년을 맞았다. 그가 고려미술관이라 명명한 까닭은 이랬다.
 
일본에 건너 온 지 63년간 한 번도 고향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육신의 형제가 분단된 38도선 남과 북 양쪽에 살아 있어서 제가 고향인 남쪽으로 가면 북조선에 갈 수 없고, 북쪽으로 가면 남쪽으로 갈 수 없고 이런 부조리한 현실이 정말 너무 슬픕니다. 그래서 나는 어느 쪽에도 안 돌아가고 작은 미술관에서 조국을 찾아 통일된 좋은 시대 고려를 비유해서 뻔뻔스럽지만 고려미술관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 영화 <정조문과 항아리> 중 정조문의 인터뷰
▲ 고려미술관 담장 기와 명문 고려 ▶ 고려미술관 담장의 명문기와 高麗는 정조문의 글씨다. 통일 염원을 담은 그의 글 앞에서 고개 숙였다. 여전히 멀리 있는 통일은 그저 꿈일는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운 순간이었다.
ⓒ 권미숙
 
고려는 남과 북이 통일된 나라의 이름이라 좋았다는 그이의 소박함이 나는 좋았다. 정조문에게 고려미술관은 남과 북이 하나 된 고향을 꿈꾸며 채워간 고향, 통일 조국이란다. 그는 고려미술관을 언젠가 고향땅을 밟을 자신에게 축하 선물로 줬다 했다.
그는 고려미술관을 통일된 정부에 기증해달라 유언하셨다 했다. 그는 25년이면 족할 것이라 했다는데... 통일이 될 때까지 잘 관리해서 통일 조국의 품에 안겨달라 당부했다는데... 35년이 지난 이 시간, 통일은 더 멀리 도망가 버리는 모양새다.
 
▲ 고려미술관2 교토고려미술관 간판입니다.
ⓒ 권미숙
 
정조문이 백자 항아리와 만난 것은 1955년이란다. 교토 기온가 고미술품 상점에 진열된 백자 항아리가 마음에 들어 2000만 원을 주고 월부로 샀단다. 당시 2000만 원이면 집 한 채 값이었다니 진짜 좋아하지 않는다면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어떻게 이렇게 사랑할 수 있을까? 그의 생전 인터뷰를 보며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조선은 슬픈 민족이라 도자기에도 쓸쓸한 면이 있다고 말하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고 봐요. 외세의 침략을 수없이 많이 받았지만 조선은 그때마다 일어서서 싸웠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런 문화를 가질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얼마나 씩씩하고 당찹니까? 일본 도자기에도, 중국 도자기에도 없는 조선 도자기만의 특징입니다. 그것이 제가 조선 도자기를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보세요. 형태가 얼마나 투박해 보입니까? 이쁘장하게 만들려는 마음이 도공에게 없었던 것이 아닐까요? 이것은 돛단배입니다. 배 위에 큰 물고기가 있고, 선두에는 사람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데 아주 만족한 표정을 하고 있습니다. 배를 보면 돛대가 배 바닥을 뚫고 나왔습니다. 세계 어디에도 이런 항아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조선을 대표하는 항아리라고 생각합니다. 항아리 중에서 이것을 제일 좋아합니다. 조선 최고의 항아리라고 자신합니다. - 영화 <정조문과 항아리> 중에서

그가 도자기를 보는 방식이다. 흔히들 도자기를 보면 문양과 쓰임, 제작 기법을 들어 이름부터 짓기 바쁜 어설픈 애호가보다 그가 훨씬 예리하다. 그는 도자기와 교감하며 도자기를 볼 줄 안목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 그의 안목이 있었기에 일본에서 유랑하는 한국의 문화재들이 고려미술관에 안착할 수 있었던 게다. 일본 내 한국 문화재 6만 5천여 점 중 1,700을 보유할 수 있었던 게다.
 
▲ 휴관 안내 휴관 안내
ⓒ 권미숙
 
그러나 우리 기행단이 교토 고려박물관을 찾은 1월 26일, 고려미술관은 휴관 중이었다(3월까지). 아쉬웠지만 현재 고려미술관 관장을 맡고 있는 정희두씨를 우연히라도 만날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에게 고려미술관 정원을 지키고 서 있는 5층 석탑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고려 시대 탑으로 추정됩니다. 고베에서 사 왔어요. 고베는 조선에서 오는 배가 들어오는 항구입니다. 물건을 많이 실으면 배가 흔들리기 때문에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배 밑바닥에 많이 싣고 와서 그냥 버렸나 봅니다. 이 탑도 밭에 버려져 있었다고 해요. 해체된 채로… 우리 아버지(정조문)가 이 탑을 사 오는데 30년 걸렸습니다. 소유자의 아버지가 팔지 않아 그분이 돌아가시고 난 다음 그 아들을 설득해서 사 왔습니다."
 
▲ 고려미술관장 정희두 고려미술관 관장 정희두는 현재 고려미술관을 맡아 운영하고 있다.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기 위한 그의 노력은 처절했다. 사투를 벌인다는 말이 저런 것일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있을까?
ⓒ 권미숙
 
돈도 돈이지만 그 정성이 얼마나 갸륵한가? 문인석, 무인석, 망주석, 동자석 등 대부분이 무덤에 세우는 석물들인데 팔려고 하지 않으면 때로는 무덤에 세우는 석물들이라 집에 두면 좋지 않다고 으름장을 놓아 매입하기도 했다는 후일담도 들었다.
 
귀화인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이상했어요. 국가나 호적이 없던 시대에 귀화인이라는 단어는 말이 안 되죠. 귀화인이라는 단어를 쓴 것은 일본서기입니다. 고사기 등의 사서에는 <귀화>라는 단어가 전혀 나오지 않고 <도래>라는 단어가 사용됐어요. 저는 <귀화인>이라는 단어를 <도래인>이라는 단어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 책을 썼습니다. 천황이 언급했듯이 간무 천황의 어머니가 백체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썼습니다. 일본의 고대사를 연구하다 보면 한국에서 온 사람들의 역할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깨닫고 1965년에 <귀화인>이라는 책을 썼는데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도래인>의 역할은 단순한 영향이 아닙니다. <도래인>은 일본 문화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 영화 <정조문과 항아리> 중 우에다 마사아끼 인터뷰

1965년 우에다 마사아끼 교토대학교수는 <귀화인>을 출간했다. 그는 <도래인>이라는 말을 규정하고 보급하는 데 힘 쓴 일본 사학자다. 고대 일본에 건너온 한국인은 귀화인이 아니고 도래인이라는 그의 역사 인식은 정조문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는 김달수(재일본 소설가), 이진희(재일본 역사학자), 시바 료타로(작가) 등과 우에다 마사아끼 교수를 찾아가 친분을 맺어가며 일본 속 조선의 역사를 탐구하는 조선 문화사(朝鮮文化社, 1969)를 설립했다.

계간지 <일본 속의 조선문화>를 50호까지 발간했다. 뿐만 아니라 1972년부터 일본에 거주하는 역사학자들과 일본 각지에 흩어진 조선 문화재를 찾아다니는 답사 여행도 정기적으로 마련했다고 한다. 조선 관련 유적들을 답사하는 활동도 활발하게 진행하며, 답사 여행 후엔 잘못 표기된 정보를 바로잡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그전에는 호류지 미륵반가사유상을 일본에서 만들었다고 쓰여 있었어요. <일본 속의 조선문화> 연구팀이 문제를 제기해 바로잡았습니다. 미륵반가사유상은 적송을 만들어졌는데 일본에는 적송이 없다고 반론을 제기해 수정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고려미술관에 담았던 소망은 재일 조선인 3, 4세의 정체성 문제다. 내가 고려미술관에 가고 싶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고향에) 너무너무 가고 싶습니다. 너무너무 가고 싶지만 분단 때문에 못 가는 서러움을 항상 느끼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재일 조선인 3세, 4세가 태어나고 있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복잡한 남북문제는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여기 놀러와 통일되었던 멋진 시대 고려를 느낄 수 있다면, 그래서 할아버지, 할머니, 옛 선조들이 이런 도구를 쓰며 살았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것입니다. 책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직접 보여 주고 싶습니다. - 광복 70주년 특별기획, 위대한 유산 1부 중
  휴관의 이유가 '혹시 예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현 고려미술관장 정희두 선생님의 설명을 들었을 때 예산 부족으로 운영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조문, 나라가 지켜주지 못한 그가 통일 조국을 위해, 민족을 위해 고려미술관을 만들었다. 고려미술관 개관 4개월 후, 그는 고려미술관 품에서 세상을 떠났다니 고려미술관은 정조문의 목숨이다.
 
"특히 사립 박물관은 힘듭니다. 오사카시가 만든 이곳(오사카 동양 도자기 박물관)도 매년 예산이 점점 줄고 있는데요. 미술관 수입의 대부분은 입장료입니다. 유지 자본이 없으면 어렵습니다." - 영화 <정조문과 항아리> 중에서 오사카 동양 도자기 미술관 명예 관장 이토 이쿠타로의 인터뷰

한국에서 일부러 찾아온 손님을 제때 맞지 못하는 속내도 알 수 있었다. 고려미술관 학예사들도 다 그만둔 상태로 외손녀 수혜씨만 남아 있단다. 연중 5회 열었던 특별전도 1회로 줄었단다. 그리고 이렇게 휴관 기간도 길다.
▲ 고려미술관 위치 ▶교토시 기타구 마을 골목에 자리 잡은 고려미술관/ 고려미술관은 쿄토시 북구 민가가 빼곡한 마을 골목길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관광버스를 교토시립 가모 카와 중학교 앞 노상에 주차하고 고려미술관까지 걸어가야 했다.
ⓒ 권미숙
 
역시 유지 자본의 문제다. 여기! 아래 링크된 고려미술관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유지회원 가입 제도가 있다.

https://www.koryomuseum.or.jp/korean/index.php
高麗美術館 (koryomuseum.or.jp)

1년에 10,000엔. 우리 돈 10만 원이면 1년 유지회원이 될 수 있다. 부디 고려미술관이 유지되어 재일 동포의 정신적 힘이 되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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