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청각'은 한국 근현대사의 아픈 이야기
[이윤옥 기자]
지난 14일 낮 12시, 서울 서대문에 있는 순국선열유족회(회장 이동일) 강당에서는 아주 조촐한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이날의 주인공은 <나는 임청각의 아들이다>(디플랜네트워크 출판)라는 책을 쓴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 1858-1932) 선생의 증손자인 이항증씨였다. 밖의 날씨는 다소 풀렸지만, 출판기념회가 열리는 지하 강당은 온기가 없어 축하하러 온 삼십여 명의 어르신들의 체온으로 지탱했다.
▲ 이항증 《나는 임청각의 아들이다》 저자 이항증 선생이 출판기념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 이윤옥 |
"경북 안동에 있는 <임청각(臨淸閣)>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500년이 된 고성 이씨의 종택이다. 이곳은 임시정부 수반이었던 국무령 석주 이상룡 선생의 생가이자, 선생의 형제와 아들 손자 등 독립운동가 11명을 배출하는 등 4대에 걸쳐서 독립운동을 한 독립운동의 산실이다. 어찌 이뿐인가. 사위와 처가 쪽에서도 40여 명의 독립운동가가 나왔기에, 임청각은 존경이라는 말조차 정녕 부족하다. 한 집안에서 나라를 이끌어갈 독립운동가를 이렇게 많이 배출한 것은 세계사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이다. 임청각(보물 제182호)은 마크 어빙의 저서,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건축 1001>에 실렸다. 이곳은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적인 건물이자, 꽃보다 진한 사람의 향기, '의로운 기상'이 넘치고 살아있는 곳이다."
이는 어제 출판기념회의 책 <나는 임청각의 아들이다>에서 '임청각'이란 곳이 어떤 곳인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는 부분이다. 이쯤 되면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산실, 존경이란 말 조자 정녕 부족한 곳'인 임청각의 아들이 쓴 책의 내용이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석주 이상룡 선생의 증손은 왜 이 책을 썼는가를 알 수 있는 출판기념회였기에 기자도 참석했다.
출판기념회의 첫 순서는 저자인 이항증 선생의 인사말을 듣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A4용지 한 장을 들고나온 저자는 감회가 깊은 듯, 조용조용한 어조로 이 책을 쓰게 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1939년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위로 형님 네 분이 계셨는데 모두 요절하였고, 부친 서거 후에 여동생과 세칭 99간 임청각을 두고 보육원에 보내졌다. 해방된 조국에서 임청각의 아들이 돈이 없어서 공부를 못 할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보육원에서 나오니 상속 재산 한 푼이 없었다. 아버지 없는 조카가 9명이나 되어 혼주석에 8번이나 앉았다. 한숨과 눈물을 숨기느라고 이를 악물고 살아온 이야기가 바로 이 책의 내용이다."
독립운동을 말할 때 안동의 임청각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임청각이 독립운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이곳의 '아들'이 집도 절도 없이 보육원에 보내졌으니 그 회한이 어떠했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나는 임청각의 아들이다>를 개인사로 지레짐작해서는 안 된다.
▲ 출판기념회 축사 최용규 전 국립인천대학교 이사장, 조세현(조경환 의병장 손자), 이동일 순국선열유족회 회장,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국회의원), 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관장 (왼쪽부터) |
ⓒ 이윤옥 |
▲ 출판기념회 출판기념회 모습 |
ⓒ 이윤옥 |
"유언은 보통 재산을 물려주기 위한 것인데, 나는 물려줄 재산이 없어 미안하구나. 광복 후의 기간은 5천년 역사보다 더 많이 변했다. 내가 11살 때 어깨너머로 <명심보감>을 배울 적에 '사마온공은 많은 돈을 자손에게 남겨두어도 자손이 다 지킬 수가 없고, 책을 남겨 놓아도 다 읽을 수 없으니 음덕을 쌓는 것이 좋겠다'라고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는 재산이 있는 줄 몰라서 직접 피해는 없었다. 나는 숙고하다가 장기기증등록(번호 10936, 96.8.26)을 했고 등록증을 항시 소지하고 다닌다. 장기기증도 하나의 문화다. 나는 훌륭한 사람이 아니다. 본받으려 하지 말라. 묘도 쓰지 말고 석주 할아버지 자손 외에는 부고도 하지 말라. 믿는다."
▲ 나는 임청각의 아들이다 《나는 임청각의 아들이다》 책 표지 (표지그림 윤희철 대진대교수.임청각 펜담채화) |
ⓒ 디플랜네트워크 |
"나는 그 집, 임청각에 들어서면 '음수사원(飮水思源)' 곧 '물을 마실 때 그 우물을 판 사람의 공을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 떠오른다. 오백여 년 전 처음으로 임청각을 지었던 분들, 임청각에서 일제의 마수를 미리 알고 국운을 염려하여 가문의 명예보다 나라의 명예를 되찾고자 조상의 신주(神主, 사당에 모셔 두는 죽은 사람의 위패)를 땅에 묻고 만주로 떠났던 분들, 끓어오르는 피를 조국 독립에 오롯이 바쳤던 걸출한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임청각은 그래서 그냥 '고택 답사'처럼 둘러봐서는 안 되는 집이다." 이는 기자가 임청각에 관한 기사를 쓸 때마다 잊지 않고 쓰는 말이다.
어제 기자가 임청각의 주인인 이항증 선생이 쓴 책 <나는 임청각의 아들이다> 출판기념회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갔던 것은 그의 '파란만장한 삶'이 책 속에 어떻게 녹아있을까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참에, 한가지 밝혀 둘 것이 있다.
사실 기자는 1년 전인 2023년 4월 11일, 최진홍 선생(월간 순국 편집위원)으로부터 "이항증 선생이 쓴 일대기를 교정 중인데 한번 읽어 봐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다. 이 일로 독자의 한 사람으로 누구보다 먼저 이항증 선생의 피땀어린 원고를 읽을 기회를 가졌다. 그러면서 이 책이 나오기까지 음지에서 묵묵히 원고와 씨름하며 오랜 시간 작업해 온 최진홍 선생의 노고가 있었음을 알리고 싶어졌다.
"오늘 이 자리에 발걸음을 옮겨 책 출간을 축하해 주러 오신 분들 덕에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출판기념회를 마무리하는 시간까지 이항증 선생은 언제나 변함없는 '겸손한 모습'으로 참석자들께 일일이 인사를 건넸다. 크고 화려한 화한은 없었지만, 국난의 시기에 순국의 길을 걸었던 선열들을 추모하는 순국선열유족회 지하 강당에서는 소박하고 조촐한 근래 보기 드문 매우 뜻깊은 출판기념회의 시간을 가졌다.
*<나는 임청각의 아들이다> 이항증 지음, 디플랜네트워크 출판, 정가 18,000원.
덧붙이는 글 | 우리문화신문에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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