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식사

정소진 2024. 2. 14.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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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명의 미식가가 말하는, 오랜 추억이 담긴 식당에 관한 이야기. 사라진 곳에는 경의를, 굳건한 곳에는 애정을.
「 치기 어린 그날에, 토속촌 」
재능이 없음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나는 재능을 스무 살 여름에 알았고, 스물여섯에 할 수 있는 게 이것뿐임을 인정했다. 두 학번 위의 선배도 비슷했다. 그도 글쓰기를 포기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와 형의 차이는 그가 더 똑똑하고, 노력했다는 정도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어쨌든 형은 글로 무언가를 이뤘다. 작가가 됐고, 나는 청계천 24시간 카페에서 밤새 작업했다. 후진 노트북으로 꾸역꾸역 포토숍을 했는데, 사진 용량이 크면 프로그램이 먹통이 되곤 했다. 형은 노트북에 패배한 나를 보러 가끔 광화문 카페에 왔고, 저녁을 사줬다. 형은 나보다 잘살지도, 더 벌이가 나은 것도 아니었다. 나는 형처럼 되고 싶었다. 형처럼 작가로 인정받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걸 인정하면 정말 지는 것 같으니까. 동생들에게 작은 저녁이라도 먹이는 그런 인간이 되고 싶었다. 형의 등단을 축하하던 날, 형은 나를 경복궁 앞 삼계탕집에 데려갔다. 세종로의 찬 바람을 뚫고 걷는 동안 우리는 말이 없었다. 진즉 형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으니 성의 표시는 했다. 그저 나는 코트 깃으로 가는 목을 가리고 삼계탕집의 웅크린 닭보다 더 비루한 자세로 식당에 들어갔을 뿐이다. 기쁨을 나누기엔 내 20대는 몸과 마음 모두 가난했다. 당시 대통령의 맛집으로 명성을 얻은 ‘토속촌’은 손님이 붐볐고, 형은 삼계탕 두 개를 시켰다. 애피타이저로 나온 인삼주를 마셨다. 형은 절반을, 나는 원샷을 했다. 그날은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인삼 향도, 물에 빠뜨린 닭의 형상도 반갑지 않았다. 하지만 뜨거운 닭 국물은 식도를 타고 내려가 마법처럼 어깨를 느슨하게 만들었고, 굳은 손가락이 부드러워지며 눈가까지 열이 올랐다. 그냥 고맙다고 했으면 됐는데, 동정이든 동지애든 이런 나를 먹여줘서 고맙다고 했으면 됐는데, 질투심을 인삼주와 삼계탕에 담그고 갔다. 지금도 토속촌 삼계탕 국물을 마시면 나도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고, 내게도 약간의 재능은 있다고 치기 어린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조진혁(프리랜스 에디터)

「 맛의 절반은 추억, 칠선산장 」
박찬일 셰프가 쓴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라는 제목의 에세이집도 있지만 맛의 절반이야말로 추억이다. 음식에 대한 특별한 추억이 평범한 맛에 양념을 더해주기도 하니까. ‘노포(老鋪)’의 음식에는 시간이 쌓이고, 테이블마다 켜켜이 사람들의 이야기가 쌓인다. 부산의 유명한 노포 ‘마라톤집’의 이름과 메뉴명이 시대의 이야기를 담은 것처럼 말이다. 유명하든 그렇지 않든 누구나 자신만의 이야기가 쌓인 음식 또는 식당이 있고, 그곳이 늘 그 자리에 있어주기를 기대하는 법. 나는 식도락가 아버지를 둔 덕에 어릴 때부터 전국 노포를 섭렵하고 다녔는데, 지금도 지방으로 출장 가면 아버지를 따라 들락거렸던 그 식당들을 찾곤 한다. 지금은 맛이 달라졌을지라도 그때의 모습과 냄새, 맛이 떠올라 다른 이들이 느끼는 맛과는 다른, 추억 한 스푼 더한 한 끼를 즐길 수 있다. 지리산에 갈 때면 길을 돌아가는 일이 있어도 들르고 싶은 곳이 있는데, 그중 한 곳이 함양 칠선계곡에 있는 ‘칠선산장’이다.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을 때부터 다녔으니 30년은 훌쩍 넘은 추억을 간직한 곳으로,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집이다. 그 시절의 할머니는 계시지 않지만 며느님이 그 맛을 이어 지리산이 내어주는 각양각색의 나물과 야생석이버섯볶음을 맛볼 수 있다. 이곳 맛의 핵심은 청명한 계곡을 느끼며 먹는 손바닥만 한 석이버섯 향에 있다. 자연을 벗삼아 즐기는 야생 향은 어린 나에게 지리산 그 자체로 기억되는 강렬함으로 남아 지금까지 가장 좋아하는 맛으로 손꼽는다. 특히 석이버섯은 어떤 식재료에서도 느끼기 힘든 독특한 식감과 시원한 미네랄 향을 품어 이 식재료가 온 곳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다. 지난봄, 오랜만에 칠선산장을 찾았더니 메뉴가 많이 단출해졌더라. 이제는 찾아오는 사람도 적어지고 힘에 부쳐 언제까지 계속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소리가 예사로 들리지 않는다. 더 부지런히 이곳을 찾고, 이 맛을 사랑하는 누군가 부디 계속 이어주길 바라는 수밖에.

장민영(지속가능미식연구소 ‘아워플래닛’ 대표)

「 영혼의 음식, 화목순대국 1호점 」
소울푸드의 정의를 묻는다면 나는 공허한 마음을 채워주는 음식이라고 말한다. 내 소울푸드는 순댓국이다. 차가운 바람이 불면 마음이 헛헛해져서 단골 순댓국집을 열심히 투어하며 연료를 채운다. 그중에서 발길이 자주 닿는 노포 국밥집이 있다. 내 순댓국 인생의 전환점, 여의도에 본점을 둔 광화문의 ‘화목순대국 1호점’이다. 신입사원 시절 조금은 외롭고 눈치 보는 하루를 마친 퇴근 길, 그대로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혼자 맛있는 저녁이라도 먹자며 회사 근처 맛집으로 알려진 화목순대국으로 향했다. 구석에 자리 잡고 앉아 순댓국을 주문했다. 금방 나온 팔팔 끓는 순댓국은 당황스러웠다. 생각했던 비주얼이 아니었다. 뽀얀 국물이 아닌, 대창이 듬뿍 들어 있는 빨간 국물이었고, 밥을 토렴한 국밥이었다. 건더기가 가득 든 국물을 뒤적이자 조금 낯설게 느껴지는 돼지고기 냄새가 났다. 약간 긴장되는 마음으로 처음 먹어본 화목순대국은 어른의 맛이었다. 고소한 풍미의 대창과 찹쌀순대에 진득하고 얼큰한 국물이었다. 국물을 한 입 먹자마자 금세 속이 푸근해졌다. 혼자 순댓국 먹는 게 언제 민망했냐는 듯 “소주 하나 주세요!”를 외쳤다. 소주 한 잔, 순댓국 한 입, 다시 소주 한 잔. 정신없이 먹다가 고개를 들고 둘러보니 정장 입은 직장인들이 듬성듬성 혼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순댓국 그릇을 소주와 함께 묵묵히 비우고 있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고 각자 식사하고 있지만 어쩐지 동질감이 느껴졌다. 어리숙한 미생인 나도 광화문 직장인의 구성원이 된 듯했다. 그렇게 화목은 화목의 방식으로 광화문 직장인을 돌보고 있었다. ‘혼밥’ 하면서 이렇게 든든하고 충만한 적은 처음이었다. 그 뒤에도 나는 점심이고 저녁이고 무수히 화목을 방문했지만, 언제나 처음의 경험은 선명한 법이다. 나에게 또 외로운 순간이 찾아올 때면 고민하지 않고 화목으로 갈 것이다. 조용하지만 뜨끈한 위로를 기대하며.

김정은(푸드 인플루언서 ‘서촌에디터’)

「 그 시절 최대치의 고급, 함지레스토랑 」
돈가스를 좋아한다. 돼지고기튀김이야 시쳇말로 ‘맛없없’의 영역이지만 굳이 따지자면 일본식 ‘돈가쓰’보다 수프로 상징되는 전식과 커피나 아이스크림 같은 후식까지 단출하게 코스로 나오는 ‘경양식 돈가스’파다. 경양식 돈가스는 1990년대 초반 경상도의 한 면 소재지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내 기억 속에서 가장 오래된 외식의 순간이다. 꼬맹이에게도 “밥으로 하시겠어요? 빵으로 하시겠어요?”를 묻던 웨이터, 지금 생각하면 그게 뭐 중요할까 싶지만 나이프를 오른손에 쥐느냐 왼손에 쥐느냐로 주위를 곁눈질했던 일, 실수로 뭘 떨어뜨려도 직접 줍거나 “여기요” 부르지 않고 웨이터가 오기를 기다리는 게 세련된 ‘애티튜드’라 했던가. 경양식 돈가스는 전에 없던 경험이자 어린 날에 누릴 수 있었던 최대치의 고급이었다. 그때의 레스토랑은 사라진 지 오래고, 남아 있다 하더라도 내 기억보다 훨씬 어설픈 모양새일 테지만 어찌 잊을 수 있겠나. 다행이라면 그때를 단숨에 연상시킬 수 있는 노포 몇 곳을 알고 있다는 정도. 그중에서도 첫손에 꼽는 곳은 1980년에 문을 연 경양식 노포, 춘천의 ‘함지레스토랑’이다. 자리를 안내해 주는 매니저도, 서빙 담당 웨이터도, 음료를 전담하는 바텐더도 모두 중노년의 신사들이 맡고 있는 함지레스토랑은 내 그리운 시절은 물론 할아버지 웨이터가 크루아상 가득 담긴 트레이를 가져와 “먹고 싶은 걸로 골라봐” 하고 주문을 받는 파리의 ‘카페 드 플로르’에서 느꼈던 감정까지 몰고 왔으니 얼마나 매력적이야. 혼자 점심때를 넘겨 애매한 시간에 찾은 첫날의 풍경은 더욱 짙게 남아 있다. 조용한 분위기에 “혹시 브레이크 타임인가요?” 묻자 “아니, 그런 거 없어요” 하고 따뜻한 물을 내준 홀 매니저. 클래식 FM 라디오가 흐르는 홀에 손님은 나 하나. 식사를 가져다주고 천천히 맛있게 먹으라던 웨이터가 빈 테이블에 앉아 찬찬히 종이 신문을 넘겨보는데, 그 한갓진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식사를 끝내고도 오래도록 자리를 지켰다. 안 되겠다, 그리워서. 곧 춘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어야지.

서진영(〈또 올게요, 오래가게〉 저자)

「 짜릿한 첫 경험, 을지면옥 」
언젠가 한 선배는 내게 ‘노포’에 대해 격렬하게 설명했다. 몇 대에 걸쳐 운영되는 일본의 노포와 달리 재개발로 순식간에 사라지는 한국 노포의 현실에 아쉬움을 표했다. 그 사람은 서울이 고향이라 서울 지역의 오랜 노포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었고, 하나둘 사라져가는 현실이 슬퍼 보였다. 고향이 마산인 나에게 낯선 서울 땅에서 각별한 애정을 쏟은 식당이 있었나? 각별함도, 애정도 아니지만 특별한 기억을 안겨준 곳은 있다. 사회생활 2년 차에 접어들 때의 일이다. 골목에 숨은 술집을 취재했던 한여름날. 그날의 뙤약볕은 유독 뜨거웠다. 사진가와 나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30분 안에 ‘후루룩’ 먹을 수 있는 면 가게를 찾기 위해 을지로 일대를 돌아다녔다. 분명 내 몸보다 무거운 촬영 장비를 들고. “아마 여기 유명할 걸요?”라는 사진가의 말과 동시에 짐을 내려놓고 간판을 올려봤다. 투박하지만 정갈하게 페인트로 쓴 붓글씨. ‘을지면옥’. 마침 손님이 적당히 많아 우리는 엉겁결에 그곳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첫 경험은 항상 생생한 기억으로 남는다. 을지면옥은 평양냉면 입문을 도와준 노포다. 일말의 기대 없이 먹은 첫 입은 이상하고 맛있는 세계를 열어주었다. 너무 차지 않은 온도에 슴슴한 맛이지만 중독적인 국물, 적당히 삶아 부드러운 면발, 적당히 달큰한 맛. 다 식어 빠져서 더 맛있는 고깃국을 먹는 기분이었다. 그만큼 고기 향이 짙게 배어 있었다. 무엇이든 ‘적당히’ 하는 건 어렵다. 을지면옥의 평양냉면은 모든 면에서 적당했다. 〈올드보이〉의 ‘오대수’처럼 15년 동안 을지면옥의 평양냉면만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진가와 나는 평양냉면이 안겨준 황홀감에 압도당해 방금까지 땀 흘렸던 고생이 전생처럼 느껴진다는 대화를 나눴다. 맛있는 음식으로 고생을 씻어내리는 일. 이것이 진정한 사회생활인가 보다. 2022년 6월, 을지면옥은 영업을 종료했다. 새로운 곳에서 재개한다는 소문이 들리지만 아직은 알 수 없다. 첫 평양냉면의 경험을 아주 대단한 식당에서 했다는 자부심을 고이 간직한 채 을지면옥을 기다린다.

정소진(〈엘르〉 피처 에디터)

「 그때는 못했고 지금은 할 수 있는 것, 원조짜장떡볶이 」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 근처 ‘원조짜장 떡볶이’ 이야기다. 언제 문을 여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녁 8시 반이면 닫는다는 기억은 확실하다. 가끔 평소보다 빨리 닫기도 했다. 이곳에 가려면 작은 골목길을 따라 가다 오른쪽 코너로 꺾어야 한다. 골목길 끝자락에 있어 예상보다 빨리 불 꺼진 가게와 만나면 마음 한구석이 서늘했다. 이곳 짜장 소스에 담긴 군만두를 좋아했다. 알아서 골고루 넣어주는 튀김 중 군만두를 먼저 한 입 가득 음미한다. 떡볶이 소스는 짜장 맛보다 단맛이 강했다. 평소보다 단맛이 잘 느껴지는 날에는 고춧가루를 뿌리면 된다. 달착지근한 소스와 말랑한 떡, 군만두의 조화는 오래도록 질리지 않았다. 가격은 우리 동네에 놀러 온 친구들에게 대접할 만큼 적당했다. 만찬에 초대된 친구들에게 즐겨 쓰는 레퍼토리. 첫째, 순대보다 짜장떡볶이 주문하기. 둘째, 맛보게 한다. 셋째, 여기에 얽힌 내 사연을 들려준다. “여기, 노홍철이 〈무한도전〉에서 추천한 떡볶이집이야. 아무튼 그만큼 맛있다고.” 나는 항상 이렇게 말을 마쳤다. 그럼 친구들은 신나게 먹어줬다. 이렇게 친구를 환대하는 일은 소멸됐다. 이곳에 다른 분식집이 들어선 것이다. 떡볶이와 짜장떡볶이를 판매하지만, 내 어린 시절의 그곳과는 다르다. 그 떡볶이집이 싫거나 맛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내 추억을 책임진 곳이 더 이상 없다는 의미다. 원조짜장떡볶이집이 사라진 이유와 그 이후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 난 예전처럼 말없이 돈만 내밀던 숫기 없는 어린애가 아닌데. 어제는 왜 일찍 닫았냐, 서운하다고 너스레를 떨 줄 아는데. 맛있다며 거창한 칭찬도 건넬 줄 아는데. 당시엔 왜 그리 수줍었을까. 애정 가는 노포를 하나 더 갖게 된다면 그때는 아낌없이 사랑해 줘야지.

김기은(프리랜스 에디터)

「 미미(美味)의 결정체, 서대문원조통술집 」
술을 마시는 행위보다 좋은 사람들과 대화하는 자리를 더 좋아했던 내 음주 초기 시절. 시간이 지날수록 주 8일 술을 마시는 데 익숙해져 갔다. 지금은 아내가 된 당시 여자친구는 술과 맛에 진심이었다. 여자친구를 따라가면 늘 ‘미미(美味)’의 세계가 펼쳐졌다. 다양한 ‘맛’을 경험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음식에 대한 기준이 생겼고, 내가 생각보다 까탈스러운 사람임을 깨달았다. 여러 차례 가는 집은 대부분 노포였다. 믿고 가는 노포의 조건은 세 가지. 하나, 바퀴벌레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K인더스트리얼 감성이지만 손님이 많다. 둘, 혼자 온 손님이 소주 한 병을 시킨다. 셋, 정치 관련 이야기가 계속 들린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저녁, 돼지갈비가 너무 먹고 싶었다. 이날도 여친이 이끄는 곳으로 따라나섰고, 도착한 곳은 ‘서대문원조통술집’이었다. 이곳은 내가 까다롭게 세운 노포의 조건에 완벽히 부합했다. 들어서자 바로 보이는 K인더스트리얼 감성 인테리어, 홀로 소주를 드시는 할아버지, 시끄럽게 들려오는 아저씨들의 정치 이야기. 참 정겹다. 이 집 고기 맛은 또 얼마나 경이로운지. 적당하게 양념이 배어 달지도 않고, 두께가 두툼해 씹는 순간 육즙이 퍼졌다. 건너편에 서서 흡족하게 웃고 있는 사장 할머니의 미소를 보면 맛은 배가됐다. 앞으로 또 올 집이 생겼다는 행복감을 오랜만에 느껴본 순간이었다. 2022년 새해를 맞아 다시 찾은 서대문원조통술집은 어두컴컴했다. 2021년 12월 30일 자로 막을 내린 것. 단골로 추정되는 사람의 글에 의하면 사장 할머니가 몸이 편찮으시단다. 회복되면 다시 장사할 의향이 있다고 했다. ‘또 갈 집’이 사라졌다는 허무함과 다시 재개할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 공존했는데, 시간이 지나 이곳이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는 기사를 읽고 남은 기대감마저 사라졌다. 2년이 지난 지금, 이곳만큼 맛있는 돼지갈비를 아직 찾지 못했다. 서대문원조통술집의 돼지갈비는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정건(홍보대행사 ‘케첨’ 차장)

「 바삭하고 폭신했던 기억, 보데가 」
노량진 근처에 자리 잡고 살아온 지 올해로 10년 넘었다. 이곳은 10년 동안 꾸준하게 맛집이라고는 없는 삭막함을 자랑한다. 하지만 이곳에도 아주 잠깐 반짝임을 자랑하던 식당이 있었다. 허름한 아파트 상가 지하에서 묵묵히 버티던 스페인 타파스 전문점 ‘보데가’가 그 주인공. 2018년 즈음 김치찜과 순댓국집이 즐비하고 오래된 형광등 불빛이 가득한 곳에서 보데가는 8~10석 정도의 바 좌석을 두고 영업하고 있었다. 정말 스페인 시장통 같았다. 어떻게 알고 찾아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지만, 혼자 찾아간 건 확실하다. 판 콘 토마테를 주문했는데, 빵이 놀랍도록 맛있었다. 직접 구운 빵에 올리브오일을 넉넉하게 둘러 바삭하게 지져냈고, ‘누추한 곳에 이렇게 귀한 곳이?’라고 생각하며 감탄했다. 이후에도 친구들과 방문하기도 하고, 언제부턴가 배달 앱으로도 주문할 수 있어서 종종 시켜 먹으며 고단한 마감을 이겨냈다. 너무 붐비지 않아 내가 원할 때는 언제든 갈 수 있는 동네 맛집이 되길 바라며. 하지만 2020년 초반 어느 날 보데가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인스타그램 계정도 증발했다. 찾을 방법이 없었다. 다시는 그 바삭하면서도 폭신한 빵으로 만든 샌드위치를 먹을 수 없다니. 그때 깨달았다. 좋아하는 것을 오래 좋아하기 위해서는 여기저기 떠들어야 한다는 걸. 나만 알고 싶은 동네 맛집을 정말 나만 알고 있으면 매출 부진으로 사라져 더 이상 나조차 즐길 수 없다는 것을. 좋은 곳을 발견한다면 여기저기 추천하고 소개해야 한다. 어쩌면 손님이 늘어서 나조차 자주 갈 수 없게 된다고 해도 아예 없어지는 것보다 30배쯤 낫다.

김나영(푸드 콘텐츠 디렉터)

「 나의 20대를 책임져, 대나무포차 」
구석구석 숨은 맛집은 어딜 가나 많지만, 노포가 밀집한 데다 저녁 약속에 특화된 지역이라면 종로구, 중구, 더 좁히면 종로와 을지로 일대일 것이다. 유서 깊은 노포는 존재감이 커서 사라지더라도 곧바로 돌아오거나 단골손님에게 큰 흔적을 남기는 경우가 많다. ‘산골막국수(산골면옥)’는 자취를 감춘 뒤 동묘와 왕십리에 다시 문을 열었다가 원래 자리로 돌아가기도 했다. ‘명월집’은 서울을 떠나 청평으로, ‘유명국양평해장국’은 신사동을 떠나 광교에 새 터전을 꾸렸다. 이런 경우는 추적해서 찾아가 먹는 재미가 있지만, 서운하게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가게는 공허함과 막막함만 안겨준다. 인사동에 있던 ‘대나무포차’가 그랬다. 특히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에 종로3가를 지나다가 대나무포차가 사라진 걸 알았을 때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풍류의 민족답게 나 역시 자연 속에서 맛있는 음식과 함께 좋은 사람들과 음주가무를 즐겼다. 바닷바람을 쐬며 먹는 회와 소주, 등산 후 계곡에서 먹는 백숙과 막걸리 등. 자연과 함께라면 얼마든지 좋았다. 대나무포차는 종로 도심 한복판에 있지만, 맑고 푸르게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이었다. 건물 사이로 숨겨진 작은 대나무 숲, 그 대나무를 배경으로 넓게 펼쳐진 야장의 테이블들. 청계천 근처의 다른 맛집들과 연계해 2차, 3차 이어가기도 좋은 곳이었다. 대나무포차에 담긴 추억이나 추천 메뉴가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도심을 벗어난 듯 자연 한가운데서 술을 마시는 느낌, 자유로운 분위기, 모자람 없는 안주, 이른 저녁부터 늦은 새벽까지 이어지는 너그러운 영업시간은 이곳의 장점이었다. 무지성으로 소주만 마셨던 20대의 기억이 가득한 이곳을 영원히 지우고 싶지 않다. ‘대포’의 소식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안부를 전해주기를.

황현승(유니버설뮤직코리아 홍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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