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할머니가 운 이유

전혜진 2024. 2. 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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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길 위에서 펑펑 울었다. 그저 택시를 타고 싶었을 뿐인데. '스마트'한 세상이 바보처럼 잊어버린 사람들.
illustrator NA SEUNG JUN

지각 직전이었다. 아메리카노 한 잔 주문하려다 5분 넘게 키오스크에 발이 묶인 상황이었다. 생각해 보면 별로 길지도 않은 기다림에 나도 몰래 한숨이 나오려던 찰나, 직원의 도움을 받아 겨우 주문에 성공한 맨 앞줄 할아버지가 뒤편 젊은이들에게 등을 굽혔다. “아이고, 나 때문에… 미안합니다.”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그는 무엇에 관해 사과한 걸까. 침침해진 눈과 굳은 손가락, 아니면 앱에 미리 가입하지 못한 것? 혹은 자신의 ‘늙음’에 대한 사과일까. 그날 마침 SNS에서 우는 할머니를 태운 택시 기사의 일화가 화제였다. “어떤 승객이 길에서 우는 할머니를 태우자더라고. 모시고 사연을 물었더니 글쎄 한 시간 동안 택시를 못 잡았다고, 세상에 택시가 이렇게나 많은데 타려고만 하면 예약한 사람이 있다는 거야.” MBC청룡 시절부터 LG트윈스 팬이었던 할아버지는 팀이 29년 만에 우승을 목전에 두고 손자에게 그 추억을 선물하기 위해 새벽부터 경기장을 찾았지만, 티켓은 어디에도 없었다. 햄버거 먹고 싶어서 키오스크와 20분을 씨름하다 집으로 돌아왔는데, 너무 서럽고 억울해서 딸에게 하소연했다는 어머니까지. 고향에도 못 간다. 명절에 기차 타는 일은 BTS 콘서트 예매보다 어려운 시대, 어른들은 ‘참전’은커녕 로그인조차 버겁다. 열이 끓는 손자를 업고 소아과로 뛰어가도 이미 예약 앱으로 진료가 마감됐다. 움직일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없고, 문화생활은 구경도 못 하며, 진료조차 힘든 세상. 요즘의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는 알지 못하는, 지금 노인들이 살고 있는 평행세계다.

한국의 스마트폰 보급률은 97%. 2023년 한국갤럽 조사에 따르면 70세 이상 노인 10명 중 8명이 사용한다. 얼핏 디지털 강국처럼 보이지만, 2022년 한국경제연구원 조사에 의하면 한국사회 디지털 양극화는 OECD 내 최고 수준인 1위를 기록했다. 16~24세 디지털 고숙련군 연령 비중은 63.4%로 가장 높지만, 55~65세 숙련군 비중은 겨우 3.9%로 세대 간 디지털 숙련도 격차가 가장 크다는 뜻. 혹자는 노년층이 수용하려는 의지가 없음을 지적하고, 혹자는 젊은이들이 친절하지 못하다며 비난한다. 하지만 누군가의 ‘의지’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젊은이에게 배달 앱이 편하듯, 어른들은 대기 줄에 익숙하다. 인터넷등기소보다 동사무소에 직접 가는 것이 쉽다. 꼭 ‘배우지 못해서’라기보다 그저 손가락보다 다리 쓰는 일에 친숙한 것이다. 그럼에도 무작정 이 세계의 ‘룰’을 따르라는 건 삶의 기본 선택권조차 빼앗는다. 최근 노원구의 한 은행을 이용하던 고령층 주민들은 지점이 통폐합되고 무인형 점포로 전환된다는 결정에 집회를 열었다. 스마트폰과 ‘효도폰’이 함께 나오고, 키오스크 옆에 주문받는 사람이 상주했기에 그간 별다른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던 이들에게 디지털은 이제 ‘투쟁’과 ‘생존’의 문제가 됐다는 방증. 금융거래에서 실수는 다른 차원의 피해를 안긴다. 그럼에도 이들에게는 완충재가 없다. 속도를 따라잡을 일말의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노인들에게 디지털 사용을 비유하자면 80여 년간 한국어를 쓰다 갑자기 네이티브처럼 영어를 쓰라고 강요하는 것에 버금 간다”고 표현한 최문정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의 말이 피부에 와닿는 대목. 더 심각한 건 노인들은 기술 활용이라는 1차적 문제를 넘어 ‘혐오’와 ‘비난’이라는 2차적 ‘관계 문제’까지 직면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호주 RMIT 대학의 한 설문조사에서 70대 노인 과반수 이상이 “가족이 자신에게 디지털 기기 사용법을 알려줄 시간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고 고백했다. 물어보면 돌아오는 바쁘고 귀찮은 내색과 답답해하는 태도에 노인들은 앞서가는 세상과 정지된 듯한 자신의 간극을 크게 느낀다. 따라잡으려는 일말의 의지마저 상실한다. 트라우마급 긴장을 느끼고, 소위 ‘죄인이 된 기분’에 직면하는 것. 이런 신호는 사회 구성원에게 ‘늙음’을 두려워하게 만들고, 결국 자신도 언젠가 쓸모없는 존재가 될 것이라 믿게 한다. 초고령사회 진입을 목전에 둔 세상에서 ‘늙음’이 ‘두려움’이 된다는 건 재앙의 시초나 다름없다. 친절히 알려주면 되지 않느냐고? 내 경우를 돌아보면 집안 어른에게 넷플릭스 로그인부터 배달 앱 주문하는 법까지 매번 꾸준히 반복 설명했다고 자부하지만, 실상 그들이 정말 이해했는지, 실제 사용하고 있는지 확인해 본 적은 없다. 심지어 나와 같은 ‘불친절한’ 자녀마저 없다면? 국내 여러 기관은 디지털 격차를 좁힐 방안을 내놓지만 실효성은 글쎄다. 코레일은 노인 전용 좌석 판매를 확대하고 맞춤형 자료를 배포하지만, 실제 경로 사전 예매율은 3%다. 서울시는 지난해부터 ‘디지털 역량 강화 추진 계획’을 통해 노인들이 자주 찾는 공원과 산책로 등에 찾아가 1:1 교육을 시도했지만, 대부분 일회성에 그쳤다. 심지어 대부분의 정책은 고령자를 장애인, 저소득층, 농어민과 묶어 정보취약계층으로 분류해 실효성이 떨어진다. 노년 내 나이별 · 소득별 디지털 격차가 클 뿐 아니라 노년층 교육은 이 격차에 걸맞게 지속되는 반복성과 연속성이 핵심인데 말이다.

illustrator NA SEUNG JUN

우리 사회가 대대적으로 직면할 이 논의와 해결에 앞서 몇 가지 인식 변화부터 선행돼야 할 것 같다. OECD 국가 중 한국에 이어 디지털 양극화가 심각한 상황인 스웨덴에서는 노인을 소외나 동정의 대상이 아닌, 새로운 ‘소비자’ 층으로 인식한다. 경쟁사들이 주력 소비층인 젊은 세대를 겨냥한 디지털 기기를 출시할 때 노인들을 위한 스마트폰과 태블릿 PC를 만들어온 ‘도로(Doro)’사의 경영 책임 카타리나 바우어는 디지털 격차 심화에 ‘스마트폰 기능이 젊은 층을 기준으로 개발된 것’이 결정적 문제라고 단언했다. 스마트폰 ‘Doro 8200’의 6.1인치 스크린에는 전화와 카메라, 문자메시지, 도움 등 꼭 필요한 앱만 존재한다. 아이콘 크기도 다른 스마트폰보다 두 배가량 크고, ‘응급’ 버튼을 누르면 미리 설정한 지인에게 비상 상황을 알리는 전화가 연결된다. 특정 기능을 사용하다 막히면 전문가를 호출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원격 서비스 ‘팀뷰어’도 갖췄다. 약 40만 원의 이 스마트폰은 지난해 825억 원 매출을 기록했는데, ‘효도폰’이 사라진 한국시장과는 정반대다. 독일의 실버테크 기업 ‘패밀리카드’가 “아무리 뛰어난 기술도 이용자가 사용하기 어려우면 좋은 기술이 아니다”라고 했듯 지금의 ‘스마트’는 세상을 이롭게 하지 못한다. 기술 발전의 본질은 공동체의 편리한 삶을 위한 것이라는 개념의 재정비가 필요한 때다. 젊은 세대만 ‘봉사’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도 좋다. 국내 사례 중 ‘노노(老老) 케어’, 즉 노인이 다른 노인을 돕는다는 뜻의 고령층 ICT 사회 참여 활동 사업은 만 55세 이상의 정보 활용 능력이 우수한 고령층이 스마트폰을 활용하지 못하는 고령층 소수를 대상으로 맞춤형으로 교육하는 시스템. 50+ 세대가 비슷한 연령대를 눈높이에서 교육하니 이해도와 훈련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육체노동 중심의 기존 노인 일자리 사업과 달리 지식과 정보 교환으로 사회 참여 기회를 부여하는 것 또한 일석이조다. 미국 기반의 비영리단체 ‘사이버 시니어’ 프로젝트의 성과도 눈여겨보자. 캐나다와 미국에 걸쳐 한 해 약 1만 명의 노인 가정과 시설에 1500여 명의 학생 자원봉사자가 방문해 1:1 교육을 시행했는데, 기술 전달 차원을 넘어 세대 간 소통과 교감을 대대적으로 활성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인도주의적이다.

이 광경을 일상에서 목격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실 간단하다. 그저 ‘이해’하고 기다릴 것. 다시 카페로 가보자. 어르신의 주문을 성공적으로 끝마친 직원은 자신이 제공한 ‘불편’에 ‘해명’하듯 말했다. “시간은 조금 걸리지만 이렇게 알려드리면 이 동네 어르신 대부분이 저희 카페 단골이 되세요. 몇 날 며칠 반복해서 알려드리다 보면 결국 ‘스마트한 어르신’이 되더라고요. 친구들도 데려와 알려주시죠.”우리는 옆에서 잠시 기다리며 “어렵지만 결국 해내셨는데요?”라고 한 마디 건네면 된다. 얼마나 쉬운가! 우는 할머니를 태웠다던 택시 기사도 이제 ‘앱 고객 대신 현장 고객만 받겠다’고 선언했다고. 서울의 고령층 노인들이 키오스크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 중 17.8%는 ‘뒷사람 눈치가 보여서’라고 한다. 교육은 받으면 되지만 ‘뒷사람의 눈치’는 도리가 없다. 우리는 그 17%의 변화에 희망을 걸어보는 건 어떨까. 꼭 우리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떠올려서가 아니라 미래의 내 얼굴을 떠올리며, 그저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으로 동질감을 가지면서 말이다. ‘스마트한 세상’을 만드는 건 스마트한 ‘인간’임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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