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냄새 지운 순간, 그가 왔다"…표범 슬픈 표정에 홀린 남자

박진호 2024. 2. 10.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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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순(61) 자연다큐멘터리 감독이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구성포리에 만든 숲속 공간 ‘나는 숲이다(I am the forest)’ 에서 맹수를 찍기 시작한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진호 기자

“철창 앞에 선 표범의 저 슬픈 표정이 나를 이곳으로 부른 것이다.”

1962년 2월 11일 경남 합천 오도산에서 노루 덫에 걸린 표범. 이 표범은 수컷으로 10㎏ 정도였다. 이 표범은 ‘한표’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한표는 1962년 2월 20일 서울 창경원 동물원으로 옮겨졌다. 이후 1973년 8월 19일 순환기 장애로 숨을 거둘 때까지 우리 안에 갇혀있었다. 의료진은 과체중(87㎏)이 이런 질환을 부른 것 같다고 했다. 이렇게 한표는 발견된 지 11년 5개월 만에 숨을 거둔 뒤에야 자연으로 돌아갔다. 이후 한반도에서 표범은 자취를 감췄다. 공식적으로 합천 오도산이 한국 표범의 마지막 서식지가 됐다.

표범ㆍ호랑이를 사랑한 최기순(61) 자연다큐멘터리 감독이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구성포리에 만든 숲속 공간 ‘나는 숲이다(I am the forest)’ 모습. [사진 최기순 감독]


표범 조선총독부에서 해수구제로 급감


한국 표범은 백두산 호랑이와 함께 한반도 전역에 고루 분포돼 개체 수가 많은 편이었다. 하지만 1919~1942년 조선총독부에서 해수구제(해로운 동물 제거)를 명목으로 총기 사냥을 허락하면서 개체 수가 급격히 줄었다. 이어 6·25전쟁으로 먹이 사실이 끊어지고 서식지가 파괴되면서 멸종에 이르렀다.

표범이 한반도에서 사라진 지 30년 가까이 흐른 2002년 겨울 러시아 연해주 남부 하산 지역. 표범이 다니는 길목에 한 남성이 텐트를 치고 카메라를 세팅했다. 표범이 언제 나타날지 기약이 없는 기다림.

영하 30도의 추위와 배고픔·외로움을 견디며 참았다. 그동안 아무도 볼 수 없었던 표범을 만나기 위해 최기순(61) 다큐멘터리 감독은 사람 냄새마저 지워야 했다. 그렇게 꼬박 3개월이 지났을 무렵 표범이 나타났다.

최기순(61) 자연다큐멘터리 감독이 20년 전 처음 찍은 표범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진호 기자


표범 만나기 위해 사람 냄새 지워


최 감독은 “자연과 하나가 됐다고 느낀 순간 표범이 1m 앞으로 다가왔다”며 “아름다운 표범을 보는 동안 시간마저 멈췄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지난 5일 강원 홍천군 화촌면 구성포리 ‘나는 숲이다(I am the forest)’ 표범 갤러리에서 만난 최 감독은 20여 년 전 처음 찍은 표범 사진을 보며 “영하 30도의 맹추위를 버텨낸 지 3개월 만에 처음 만났는데 그 아름다운 움직임에 한동안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것조차 잊고 멍하니 감상했다”며 “표범, 너는 너무 아름다워 죽을 수밖에 없는 슬픈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때부터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나는 숲이다’는 원래 화전민이 일궈 온 콩밭이었다. 30년 전 최 감독이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공간을 만들겠다며 1만6500㎡(5000평)를 매입했다. 이후 이곳에 5000만원을 들여 길을 만들고 자작나무를 심었다. 계곡을 보존하기 시작했고 자작나무를 기둥 삼아 트리하우스와 인디언 텐트를 만들었다. 이후 9900㎡(3000평)를 더 사들여 지금은 2만6400㎡(8000평)가 됐다.

표범ㆍ호랑이를 사랑한 최기순(61) 자연다큐멘터리 감독이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구성포리에 만든 숲속 공간 ‘나는 숲이다(I am the forest)’ 모습. [사진 최기순 감독]
표범ㆍ호랑이를 사랑한 최기순(61) 자연다큐멘터리 감독이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구성포리에 만든 숲속 공간 ‘나는 숲이다(I am the forest)’ 모습. [사진 최기순 감독]


자연 그대로 두자 반딧불이 돌아와


최 감독은 일찍이 자연을 그냥 놔두면 스스로 씨앗이 퍼져서 공존의 공간이 된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자르고 심는 것보다 좀 더 오래 걸리더라도 그게 진정한 숲이라고 생각했다.

씨앗이 바람에 몸을 맡겨 날아가 발아해 자라면서 나무가 되길 기다렸다. 해마다 번성하는 풀과 꽃 종류가 달라졌고 바람의 방향과 기후, 그해 땅이 가진 박테리아나 양분에 따라 변하고, 또 그것을 먹이 삼는 곤충·새·짐승 등 종류와 개체 수가 달라지는 것을 지켜봤다.

그렇게 나무 그늘에 꽃이 피고, 수많은 벌레와 포유류 등 먹이와 집이 되면서 숲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어느덧 30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 사라졌던 반딧불이까지 돌아왔다.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바로 그곳이다.

표범ㆍ호랑이를 사랑한 최기순(61) 자연다큐멘터리 감독이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구성포리에 만든 숲속 공간 ‘나는 숲이다(I am the forest)’ 모습. [사진 최기순 감독]
최기순(61) 자연다큐멘터리 감독이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구성포리에 만든 숲속 공간 ‘나는 숲이다(I am the forest)’ 에선 매년 6월 반딧불이를 볼 수 있다. [사진 최기순 감독]


완전한 숲 되자 사람도 몰려


그러자 사람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야생동물과 환경, 다큐멘터리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 찾아왔다. 입소문이 나면서 온전한 쉼을 원하는 발길이 이어졌다.

이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하면서 마스크를 벗을 곳을 찾는 이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인디언 텐트 형태의 ‘불멍 존’을 만들고 국내 최초로 라면과 마시멜로 등으로 구성된 ‘불멍세트’를 팔았다. 여기에 반딧불이를 보러오는 관광객까지 몰렸다. 당시 연간 8000여명이 찾아 연 매출 3억원 정도 기록했다. 코로나19가 잦아들 때쯤 최 감독이 그리던 숙소(펜션 동)가 속속 완성됐다. 최 감독은 이곳에 자작나무와 황토로 만든 ‘까르돈’이란 이름의 숙소를 지었다. 까르돈은 러시아 자연보호구역 안에 있는 집을 뜻한다.

현재 이 곳엔 펜션 6동이 있는데 주말이면 예약이 어려운 상황이다. 펜션 동은 최 감독이 러시아 시베리아 숲에서 생활한 경험을 바탕으로 치유와 쉼의 집이라는 생각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바로 옆 까르돈갤러리하우스에는 러시아 유네스코가 지정한 생명의 땅 캄차카반도 크로노츠키 생물권보존지역을 오가며 찍은 사진이 전시돼 있다.

현재 '나는 숲이다'는 카페와 갤러리 4개동, 불멍 존, 펜션 동, 자작나무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관람객들은 "20여 분 걸리는 자작나무 산책길을 걷다 보면 진정한 쉼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최기순(61) 자연다큐멘터리 감독이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구성포리에 만든 숲속 공간 ‘나는 숲이다(I am the forest)’ 모습. [사진 최기순 감독]
최기순(61) 자연다큐멘터리 감독이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구성포리에 만든 숲속 공간 ‘나는 숲이다(I am the forest)’ 모습. [사진 최기순 감독]


겨울 풍경 더 멋진 곳


나는 숲이다는 겨울철 풍경이 더 멋진 곳이다. 자작나무 숲을 지나면 표범 갤러리가 나온다. 이곳에선 자연다큐멘터리스트 최 감독이 걸어온 삶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2002년 3월 러시아 연해주 남부 하산 지역에서 처음 찍은 표범부터 호랑이와 불곰까지 30여년간 찍어온 야생동물 모습이 전시돼 있다. 최 감독은 앞으로 더 많은 야생동물 사진을 갤러리에 전시하고 입장료도 받는다는 계획이다. 입장료 수익은 한반도에서 사라진 야생동물을 알리고, 갤러리를 운영하는데 쓸 예정이다.

최 감독은 “두만강에서 연해주로 가는 길에 작은 푯말이 하나 있는데 ‘우리 얼마 안 남았어’라고 쓰여 있다”며 “이 공간을 찾는 사람이 한 번쯤 자연의 일부가 되는 경험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는 20년 전부터 러시아연방 극동남부 변방에 위치한 하산지역에서 표범을 관찰하고 있다. 두만강을 중심으로 북한 러시아 중국 3개 국경 지역이다. 현재 이곳엔 아무르표범 100여 마리가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최기순(61) 자연다큐멘터리 감독의 작업실 모습. 박진호 기자
최기순(61) 자연다큐멘터리 감독이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구성포리에 만든 숲속 공간 ‘나는 숲이다(I am the forest)’ 모습. [사진 최기순 감독]


최 감독 러시아 초청받아 표범 촬영


이런 노력 덕분에 2019년 11월 러시아 국립공원 초청으로 표범의 땅이라 불리는 서식지에서 특별한 촬영을 하기도 했다.
러시아 정부는 이미 100년 전 야생 표범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지역을 생물권보존지역으로 지정했다. 20년 전까지만 해도 30마리 정도였던 표범은 현재 100마리가 넘는다고 한다.

최 감독은 “표범은 물을 싫어하기 때문에 두만강이 얼면 국경을 넘어 얼음 강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올 것이라 생각된다”며 “한반도에서 사라진 야생동물에 관심을 갖고 알린다면 언젠가 표범·호랑이·반달곰과 같은 야생동물이 돌아올 날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러기 위해선 야생동물이 왜 한반도에서 사라졌는지 자연은 어떻게 보존해야 하는지 등을 알려주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기순(61) 자연다큐멘터리 감독이 맹수를 찍기 위해 나무 위에 만든 숙소. [사진 최기순 감독]


시베리아 호랑이 촬영으로 상 휩쓸어


최 감독은 영국의 BBC나 미국의 내셔널 지오그래픽도 담아내지 못한 호랑이를 촬영해 1997년 7부작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최 감독은 이 타큐멘터리로 이듬해 한국방송대상 작품상, 백상예술대상 작품상, 한국방송촬영 대상을 휩쓸었다. 이후 ‘잃어버린 한국 야생동물을 찾아서’, ‘불곰의 땅, 캄차카’, ‘하산 계곡의 포효, 한국 표범’ 등을 잇달아 내놓았다.

나는 숲이다엔 작은 영화관도 있다. 영화관에선 최 감독의 여정을 담은 자연다큐멘터리 영화 ‘나는 숲이다’가 3월 초부터 상영될 예정이다. 100분짜리 영화를 통해 20년 전 처음 만난 표범 가족과 최 감독 가족의 이야기가 공개된다.

홍천=박진호 기자 park.ji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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