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비 걷었던 효종... 신하들이 '바둑'을 극혐한 이유

김종성 2024. 2. 9.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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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tvN <세작, 매혹된 자들>

[김종성 기자]

가상의 인물들을 내세워 조선 후기 병자호란 이후를 다루는 tvN 사극 <세작, 매혹된 자딀>에 기대령(棋待令)이라는 생소한 관직명이 나온다. 임금인 이인(조정석 분)이 바둑을 두자고 할 때까지 대기해야 하는 이 관직에 임명된 인물은 남장여인인 강희수(신세경 분)다. 강희수는 당대의 고수들을 여유 있게 꺾고 기대령으로 선발돼 부러움을 한 몸에 샀다.

드라마 속의 기대령은 무관직이나 문관직이 아닌 잡직이다. 그래서 고위직은 아니지만, 강희수는 조정 신료들은 물론이고 왕실의 주목까지 받는다. 바둑을 좋아하는 임금과 지근거리에 있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다들 그의 환심을 사고 싶어 한다.
 
 <세작, 매혹된 자들>의 한 장면.
ⓒ tvN
 

이웃나라도 즐겼던 바둑

기대령과 명칭이 유사한 기대조(棋待詔)가 중국 당나라 때 있었다. 당나라 현종(당현종, 재위 712~756) 때 정식으로 설치된 관직이다.

이 관직에 임명된 신라인이 박구(朴球)다. 당시의 당나라 황제는 희종(재위 876~888)이었다. 박구가 신라로 돌아올 때 장교(張喬)가 써준 송별시가 훗날 송태종(재위 976~997)의 명령으로 이방(李昉) 등이 편찬한 <문원영화(文苑英華)>에 수록돼 있다. "바다 동쪽에서 누가 적수가 될 수 있으리오. 돌아가게 되면 바둑은 외로우리라"라는 구절이 담긴 작품이다.

일본 위정자들도 바둑을 즐겼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에 막부 쇼군이 되어 무신정권을 이끈 도쿠가와 이에야스(1542~1616)는 바둑 고수들에게 기소(棋所)라는 타이틀을 부여했다. 이 제도를 기반으로 성장한 것이 본인방(혼인보) 같은 바둑 명문가들이다.

바둑을 좋아하는 군주들은 조선왕조에도 있었다. 광해군이 그중 하나다. 음력으로 광해군 2년 12월 27일자(양력 1611.2.9) <광해군일기>는 광해군이 즉위 얼마 뒤부터 직무에 대한 염증을 느껴 바둑 두는 일이 많아졌다고 말한다.

광해군은 여성 궁인들에게 업무를 맡기는 일이 많았다. 일처리를 잘하는 궁녀나 후궁을 특별히 가까이했다. 상궁 김개시가 대표적이다. 후궁 정소용(소용 정씨)도 그런 경우다. 광해군 5년 12월 30일자(1614.2.8) <광해군일기>는 정소용과 관련해 "일에 능숙했다"며 "들어오고 나가는 문서를 관리하고 왕을 대신해 재가를 내리니, 왕이 갑절로 신임했다"고 말한다.

광해군이 직무에 염증을 느꼈다는 소문이 퍼진 것은 이런 업무 시스템 때문일 수도 있다. 광해군이 가까이하는 여성들이 직무를 대행하는 일이 많다 보니 그렇게 비쳐지기 쉬웠다.

광해군이 궁인들에게 업무를 맡긴 뒤에 두었을 것으로 보이는 바둑은 내기 바둑이었던 모양이다. 위 날짜 실록에는 사관의 논평이 이렇게 첨부돼 있다.

"바깥 사람들은 주상이 날마다 궁인들과 함께 바둑을 둬서 승부를 겨뤄 내기하는 것을 낙으로 삼는다고 말한다."

광해군이 내기 바둑을 한다는 이야기는 광해군 2년 11월 16일자(1610.12.30) <광해군일기>에도 나온다. 그가 바둑을 좋아했던 것은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조선의 임금들은 바둑을 아무리 좋아할지라도 기대조나 기소 같은 것을 설치하기는 힘들었다. 임금이 그런 데에 관심을 쏟으면 신하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눈을 부릅뜨고 오로지 국정에만 전념하는 군주는 이 시대 신하들도 탐탁해 하지 않았다. 이 시대 사람들도 그런 군주를 피곤해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신하들의 간청

이 점에서, 성리학적 교양을 가진 사대부 신하들은 독특했다. 이들은 임금이 음주나 유흥에 빠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임금을 그런 길로 유도하는 간신배들은 아니었다.

사대부 신하들은 임금이 국정에는 적당히 신경을 쓰고 가급적이면 '다른 데'에 많이 쏟아붓기기를 원했다. 이들은 임금이 성리학적 의미의 군자가 되기 위한 수행에 전념하기를 희망했다. 그래서 틈만 나면 공자·맹자의 가르침을 주입시켜 임금이 성인군자의 길을 걷도록 유도했다.

유교 원리주의자인 정암 조광조는 "자세를 똑바로 해서 앉으시라"는 말로 중종 임금을 달달 뽂은 일로 유명하다. 임금을 성인군자로 만들기 위해 자세 교정부터 시켜줬던 것이다.

사대부 신하들은 불교나 도교적 의미의 성인군자가 아닌 유교적 의미의 성인군자가 될 것을 임금에게 촉구했다. 이는 임금을 바른 길로 이끄는 동시에 임금을 자신들과 한 편으로 만드는 방법이었다.

그런 그들이 볼 때 임금이 바둑에 심취하는 것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배치됐다. 유흥에 빠지면 철학이나 수행과는 자연히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임금이 나랏일에 깊이 빠지는 것은 물론이고 바둑 같은 데에 깊이 빠지는 것도 경계해야 했다.

사대부들이 임금과 바둑을 가급적 떼어놓으려 했다는 점은 인조 임금의 아들인 효종에 대한 송시열의 상소문에도 나타난다. 기득권을 가진 서인당의 지도자인 송시열은 효종의 스승이었다. 효종 8년 8월 16일자(1657.9.23) <효종실록>에는 송시열의 준엄한 충고를 담은 상소문이 실려 있다.

상소문에 따르면, 효종이 직접 바둑을 한 것은 아니었다. 후궁과 공주들이 바둑을 두게 한 뒤 '게임 비용'을 거둬 잔치를 열었을 뿐이다. 왕실의 화목을 위한 오락이었던 것이다.

송시열은 그런 오락에 마음을 쏟으면 방탕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아랫사람들 앞에서 권위를 세울 수 없다고 충고했다. 또 경제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백성들의 원망을 자초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임금이 오락에 빠지면 선비들은 임금이 멀리 내다보는 원려지심(遠慮之心)을 잃었다고 생각해 관직에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그런 뒤에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지금부터 이런 종류의 잡희(雜戲)는 유추해보시고 통렬히 끊으소서."

효종은 왕실의 화목을 위해 바둑 경기를 주관하고 참가비를 거뒀다. 그런데도 송시열은 '이런 잡희는 통렬히 끊으소서'라고 충고했다. 분위기가 이러했기 때문에, 당나라의 기대조나 도쿠가와막부의 기소 같은 것은 조선왕조에서는 기대하기 힘들었다.

<맹자> 고자(告子) 편에 "바둑의 수는 작은 수이지만, 마음을 다하지 못하고 뜻을 다하지 않으면 터득하지 못한다"는 구절이 있다. 마음과 뜻을 다해야만 바둑의 도를 터득할 수 있다는 이야기지만, 바둑을 낮춰 보는 맹자의 시선도 함께 묻어 있다. 이런 시선이 조선시대 사대부들에게도 당연히 영향을 줬다. 바둑은 잡희라는 송시열의 상소문에도 그것이 묻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사대부들이 바둑을 두지 않은 것은 아니다. 공식적이거나 공공연한 장소에서 바둑에 대한 인식을 그렇게 표출했을 뿐이다.

그들은 군주에 대해서는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다. 군주가 내기 바둑을 두거나 바둑 자체에 관심을 많이 보이면 송시열처럼 '태클'을 걸곤 했다. 군주가 바둑 두는 모습이 조광조 같은 선비의 눈에 띄였다면 "자세를 똑바로 해서 앉으시라"보다 훨씬 심한 질책이 나올 수도 있었다.

<세작, 매혹된 자들>의 신하들은 임금이 바둑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기보다는 임금의 바둑 친구와 어떻게든 가까워지려 애쓴다. 광해군과 효종이 좋아했을 법한 상황이 실제 역사가 아닌 이 사극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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