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해전, 이순신이 원한 마지막 전투 아니었다

이준목 2024. 2. 8.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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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리뷰] tvN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이준목 기자]

1598년 노량해전(露梁海戰)은, 16세기 동아시아 최대의 국제전쟁이었던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1598) 7년 전쟁의 대미를 장식한 전투이자,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생애 최후의 전투이기도 하다. 이순신과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이 지휘하던 조선-명 연합함대는 한반도에서 철수하던 일본군을 추격하여 노량해협에서 대승을 거두지만, 안타깝게도 이순신은 이 전투에서 전사한다. 최근 개봉한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는 바로 이 당시 이순신과 노량해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노량해전은 이순신의 극적인 최후과 맞물려 이후로도 수많은 추측과 해석을 낳았다. 이미 전쟁을 포기하고 철수하려는 적군을 굳이 추격하다가 벌어진 노량해전은 과연 꼭 일어나야만 했던 전투였을까. 여전히 압도적이었던 양군간의 열세를 극복한 이순신의 전략은 무엇이었을까. 영화와 드라마 등 대중매체에서 묘사되는 이순신과 실제의 이순신은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일까.

7일 방송된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94회에서는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노량은 어떻게 이순신의 바다가 되었나' 편을 통해 이순신의 최후와 노량해전의 진실을 조명했다.

노량해전 약 1년 전,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명랑해전(鳴梁海戰)에서 역사적 대승을 거두고 일본군의 서해안 진출을 좌절시키며 제해권을 회복했다. 큰 고비를 넘긴 이순신은 전남 보화도에 새로운 수군 사령부를 건설하고 그해 겨울 내내 칠천량해전의 패전으로 큰 타격을 입었던 조선 수군의 재건에 전력을 기울였다.

1598년 2월, 이순신은 수군사령부를 고금도로 옮긴다. 불과 40km 인근에는 일본군의 주요 거점이던 예교의 순천왜성이 있었고, 일본의 선봉장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일본군을 압박하고 유사시 언제든 출전할 수 있도록 고니시의 코 앞에서 무력시위를 벌인 것이다.

여기에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陳璘)이 이끄는 함대가 고금도에 합류한다. 조선은 임진왜란이 발발한후 명나라에 구원군을 요청했다. 진린의 함대는 정유재란 이후 이루어진 2차 파병으로 조선 수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가세한 병력이었고, 진린 역시 여러 전장에서 많은 공훈을 세운 경험많은 무장이었다. 이순신으로서는 명나라 수군의 합류로 전쟁을 끝낼 수 있게 되었다는 기대감에 부풀었을 것이다.

하지만 진린은 포악한 독불장군같은 성격으로 조선에까지 알려졌을만큼 악명이 높았다. 당시 조선의 재상이었던 류성룡이 집필한 <징비록>에 따르면, 진린은 조선 하급관리인 찰방 이상규라는 인물이 사소한 실수를 했다는 이유로 피 투성이가 되도록 폭행하고 목에 새끼줄을 매어 끌고다니게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여기에 이순신은 설사 상관이라고 할지라도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고 바른 말을 하다가 미운 털이 박힌 일화가 있을만큼 꼿꼿한 성격으로 유명했다. 조선 조정에서는 물과 불같은 이순신과 진린이 서로 화합하지 못할 것을 우려했다. 심지어 류성룡은 '이순신의 부대가 장차 패전하겠구나'라고 예상하며 불안감을 감추지못했다고 한다.

1598년 7월 24일, 진린이 고금도에 도착한지 8일만에 조명 연합수군은 일본군과 첫 전투에서 일본 함선 6척을 격파하고 수급 69개를 거두는 승전을 달성한다. 하지만 명나라 수군은 거센 풍랑에 적응하지못하여 제대로 싸워보지못하여 실질적으로는 조선 수군 단독의 승전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를 알게된 진린은 격분했다. 당시 전쟁에서 적의 수급이란 공훈과 포상을 인정받을수 있는 증명이었다. 진린은 명나라 수군이 수급을 하나도 베어오지못하자 체면이 깎였다고 생각하여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것이다.

그런데 이순신은 놀랍게도 조선 수군이 취한 수급을 모두 진린에게 바치며 "이곳에서의 승리는 모두 대인의 승리"라고 전공을 양보했다. 진린은 조선 최고의 명장으로 이름을 떨치던 이순신이 자신에게 극진한 대우를 하는데 매우 기뻐하며 호감을 품게 됐다.

강직한 성격의 이순신이 왜 진린에게는 이토록 몸을 낮췄을까. 당시 조명연합수군은 군사적 협력관계이기는 했지만 지휘체계상의 수장은 어디까지나 진린이었다. 이순신은 진린에게 수급을 바치는 것으로 상관에 대한 예우를 보여준 것이다. 더구나 일본군에게 전면적인 반격을 가하기 위해서는 명나라 수군의 전력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만큼 이순신에게 중요한 목표는 오직 일본군을 몰아내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이 마냥 진린에게 저자세로만 일관했던 것은 아니다. 당시 명나라 군대는 조선을 구원하러 왔다는 명목으로 오히려 조선 백성들을 수시로 약탈하는 폐해가 심각했다. 진린의 수군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에 이순신은 주둔지를 허물고 조선 수군과 백성들을 모두 배에 승선시키며 고금도를 떠나 앞으로 단독으로 움직일 것처럼 무력시위를 펼쳤다.

이러한 이순신의 행동은 상관인 진린에 대한 항명이자, 일개 야전지휘관이 국가적 약속이던 조명연합을 파탄내는 위험천만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충무공 행록'에 따르면 소식을 듣고 놀란 진린이 황급히 달려와 이순신을 붙잡으며 애걸하여 간신히 마음을 돌렸다고 한다.

이처럼 이순신이 진린에게 강하게 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조선수군이 떠나면 아쉬워지는 것은 사실 명군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명의 수군은 조선에 비하여 선박의 크기가 작았고, 조선의 복잡한 해안지형에 대한 정보도 부족하였기에 사실상 단독작전은 불가능했다. 전공을 세워야했던 진린에게도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진린이 이순신을 대하는 태도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진린은 이순신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그의 능력과 인품에 차츰 매료됐다.

진린은 모든 일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이순신에게 먼저 자문을 구하는가 하면, 함께 이동할 때는 자신의 가마가 이순신을 앞서가는 일이 없게 할 만큼 그를 예우했다. '이충무공전서'에 따르면 심지어 진린은 "공은 작은 나라의 인물이 아니오. 중국에 가서 벼슬한다면 당연히 천하의 명장이 될텐데 왜 여기서 곤궁하게 지내려 하오"라고 이야기할 만큼 이순신을 극찬했다고 한다.

그렇게 이순신과 진린이 화합해가던 1598년 9월, 4만여 명의 조명연합군은 수로와 육로로 네 방향으로 일본군에게 대대적인 총공세를 펼치는 사로병진작전(四路竝進作戰)을 추진한다. 이는 임진왜란 이후 처음을 펼쳐진 조명연합군의 수륙 합동작전이었고, 성공했다면 조선에 침공한 일본군을 완전히 궤멸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명의 육군도독이었던 유정(劉綎)이 전투에 소극적으로 임하면서 사로병진작전은 실패로 돌아간다. 당시 명군은 오랜 전쟁으로 피로한 상태였고 굳이 큰 손실을 감수해가며 더이상 일본군과 적극적으로 싸우려고 하지 않았다.

사로의 조명연합군 중 중로군이 사천왜성에서 참패하고 동로군마저 후퇴하자 유정이 이끌던 서로군도 순천왜성의 포위를 풀고 후퇴해버린다. 이제 남은 것은 조명연합수군인 수로군 뿐이었다. 그해 10월 5일 작성된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은 '유 제독(유정)이 달아나려 한다고 했다. 통분하고 통분하다'고 기록하며 비통한 심경을 감추지 못했다.

이순신은 육군의 지원 없이 수로군 단독작전만이라도 일본군을 계속 공격하기로 결심한다. 2만 3천여 명 조명연합수군은 퇴각하지 않고 순천왜성 인근에 주둔하며 일본군을 압박한다. 순천왜성에 고립된 고니시는 진린에게 사신을 보내 뇌물을 바치면서 일본으로 퇴각할테니 길을 열어줄 것을 애걸한다.

당시 일본에서는 집권자이자 임진왜란의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했다. 히데요시가 어린 아들이던 히데요리를 위한 정권 기반을 만들어놓지못하고 급사하면서 일본 내부는 혼돈에 빠져있었다. 고니시를 비롯한 일본군은 조선에서의 전쟁을 중단하고 한시바삐 본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던 것이다.

진린은 고니시와의 협상에서 수급 2천개를 받는 조건으로 일본군을 보내주기로 결정한다. 진린 역시 일본군이 스스로 퇴각하겠다는 상황에서 다 끝난 전쟁에 굳이 무리하게 전투를 게속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진린은 이순신에게도 이 사실을 알리며 설득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진린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순신은 어차피 고니시가 바치는 수급이 일본군이 아닌 조선 백성이 될 것임을 간파하고 있었다. 조선인의 입장에서 이순신으로서는 7년간이나 조선 땅을 제멋대로 짓밟고 피바다로 만든 일본군을 결코 용서할수 없었다.

봉쇄가 풀리지않자 고니시는 이번엔 이순신에게도 뇌물을 보내 구슬리려고 했지만, 이순신은 "원수의 심부름꾼이 여기는 무엇하려 찾아온단 말이냐"라고 질책하며 단칼에 내쳤다고 한다.

다급해진 고니시는 이번엔 연락선을 파견하여 다른 지역에 있던 일본군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왜성 해역 인근은 조명연합수군에 봉쇄되어 있었지만, 뇌물을 받은 진린의 묵인으로 일본군의 연락선은 제지없이 포위망을 빠져나가 그대로 해역을 통과하고 만다.

이 사실을 알게된 이순신은 일본의 지원군이 도착하면 조명연합수군이 오히려 포위되어 협공당할 위기에 놓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순신은 병력을 이동하여 일본의 지원군에게 선제공격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가 전장으로 택한 곳이 바로 노량해협이었다.

이순신은 왜 하필 노량을 선택했을까. 그는 일본군의 항로가 반드시 노량을 지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노량은 주변에 섬이 많고 지형이 복잡하여 아군의 함선을 매복시키기도 적합했다.

시마즈 요시히로 등이 이끌던 일본의 지원군은 이순신의 예상대로 노량해협에 집결한다. 그 규모는 함선 약 500여 척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조명연합수군은 300여 척 정도였지만, 명군의 선박은 해상전투에는 부적합하여 실질적인 전력은 조선의 판옥선 100여 척 정도에 불과했다. 이순신은 전력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하여 기습을 통한 선제공격을 했다.

1598년 11월 18일,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고니시의 눈을 피해 시마즈의 구원함대를 요격하기 위해 순천 앞바다를 떠나 야간에 몰래 출정한다. 일본군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이순신은 명령을 내려서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배 위의 북을 모두 눕히고 군사들의 입에는 재갈을 물게 했다고 한다. 전투에 소극적이었던 진린의 명군 역시 이순신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결국 참전한다.

출정 4시간 만인 11월 19일 새벽 2시, 일본 함대가 조명연합수군이 매복해있던 노량해협에 나타난다. 이순신은 발포를 명령한다. 임진왜란 최대의 해상전투인 노량해전의 시작이었다.

조선 수군은 화살에 화약통을 달아 파괴력을 높인 새로운 형태의 불화살인 화전(火箭)을 활용한 화공전술을 구사했다. 이순신은 화전의 단점인 짧은 사거리와 낮은 명중률을 보완하기 위하여 노량의 좁은 해협에 적의 함선들을 밀집시키게 만들고 바람의 순방향을 활용하여 사거리를 늘렸다. 일본 함대는 조선군의 화공에 당하여 삽시간에 불이 번지며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더이상 돌아갈 곳이 없었던 일본군도 죽기살기도 맞설 수밖에 없었다. 근접전에 능한 일본군은 월선을 통한 백병전을 시도했다. 새벽에 시작된 양군의 전투는 날이 밝을 때까지 계속됐다.

이순신은 치열한 전투가 진행되는 가운데 직접 북을 치며 "단 한 놈도 살려보내지 말라"고 병사들을 독려했다고 한다. 이는 이순신을 주인공으로 다룬 드라마 <임진왜란>이나 <불멸의 이순신>,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 등에서도 빠짐없이 등장하는 명장면이다. 

그런데 실제 전장에서 대장이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대놓고 적의 표적으로 노출되기 쉬운 위험한 행동이다. 실제로 노량해전에 참전했던 이순신의 조카 이분(李芬)이 작성한 '행록'에 따르면 이순신이 북을 쳤다는 내용은 등장하지 않는다. 당시 전장에서 북을 치는 행위는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한 응원의 의미가 있었다. 이순신이 실제로 북을 쳤다기보다는 그만큼 전투에 앞장서서 의지를 다졌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던 가운데, 돌연 빗발치는 탄환중 하나가 이순신의 가슴에 명중한다. '이충무공행록'에 따르면 이순신은 중상을 입은 상황에서도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내지말라"고 마지막 명령이자 유언을 남긴뒤 숨을 거뒀다고 한다.

남은 장수들은 이순신의 명령에 따라 동요하지 않고 전투를 이끌어갔다. 정오가 되어서야 마감된 전투는 조명연합수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일본군의 함선 중 약 200여 척이 파괴되었고, 100여 척을 노획했다. 대장인 시마즈는 간신히 목숨을 건져 남은 50여 척의 배를 이끌고 본국으로 달아났다. 순천왜성에 있던 고니시도 조명연합수군이 노량해전을 벌이는 틈을 타 달아난다.

전투는 조명연합군의 대승으로 끝났지만, 이순신의 죽음이 알려지면서 장병들은 승전의 기쁨보다 믿고 따르던 대장이자 영웅을 잃었다는 비통함에 잠겨야했다. '이충무공전서'에 따르면 진린은 이순신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놀라 뛰었다가 넘어지기를 세 번이나 반복하면서 땅을 치며 통곡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노량해전의 대승을 끝으로,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은 마침내 그 종결을 고한다.

노량해전의 승리와 이순신의 영화같은 최후는 수많은 뒷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많은 이들은 불패의 명장이던 이순신이 마지막 전투에서 허망하게 전사한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일본의 우익들은 이순신이 철수하는 군대를 상대로 무의미한 전투를 벌였다가 본인이 전사했다고 폄하하기도 한다.

또한 국내에서는 이순신이 전후에 국왕 선조의 질투와 숙청을 근심하여 스스로 사지를 뛰어들었다는 자살설, 이순신이 죽음을 위장하여 신분을 감추고 은거했다는 은둔설 등의 소문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학자들은 이에 대하여 현실성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이순신은 왜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군을 끝까지 섬멸하려고 했을까. 일본은 무단으로 조선을 침공하여 전란을 일으키고도, 전세가 불리해지자 명나라와 협상하며 조선 땅에서 발을 빼려고 했다. 정작 피해자인 조선에게는 '사죄'하거나 '항복'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또한 만일 이대로 일본군을 순순히 돌려보낼 경우 언제든 힘을 추슬러 다시 조선을 침공할수 있다는 가능까지 생각해야했다. 이순신과 조선군에게 일본군을 끝까지 추격하여 섬멸해야한다는 사명이란, 결코 무의미한 전투도, 사적인 감정에 치우친 복수도 아니었다. 그것만이 일본이 조선 땅에 일으킨 온갖 잔혹했던 전쟁범죄를 단죄할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노량해전은 이순신이 구상한 '마지막 전투'가 결코 아니었다. 이순신의 진짜 목적은 일본군의 완전한 궤멸이었고, 노량해전은 고니시를 구원하러온 일본군에게 포위당하기 전에 선제 요격해야했던 전쟁 과정의 일부에 불과했다. 이순신이 만일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지않았다면 이후로도 일본군을 끝까지 추격하여 또다른 전투가 벌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유일한 항전파였던 이순신의 갑작스러운 전사로 인하여 동력을 잃은 조명연합군은 더 이상 일본군을 적극적으로 추격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일본군은 노량해전에서 큰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주요 '전범'이라고 할수 있는 고니시를 비롯한 일본군의 핵심 장수들은 대부분 무사히 본국으로 귀환했다. 누구보다 현실적이고 책임감이 강했던 이순신이 일본군을 모조리 섬멸하겠다는 의지를 다 이루지못한 상황에서 목숨을 내던졌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는 상상이다.

이순신은 비록 사후에도 무장들의 전공이 부각되는 것을 질투한 국왕 선조에 의하여 노골적인 저평가를 당했다. 하지만 민심과 역사는 이순신이 보여준 구국의 활약을 기억하고 있었다. 조선 왕조에서도 후대로 갈수록 이순신에 대한 평가는 높아졌다. 사후 200여년에 흘러 22대 국왕 정조는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며 이순신의 공을 기렸는데, 왕이 신하를 위하여 문집을 만든 것은 전무후무한 사례였다.

임진왜란은 일본의 조선침략인 동시에, 대륙침공을 노렸던 일본의 노력을 조선 땅에서 명나라 연합하여 막아낸 국제전쟁이었다. 이순신의 진정한 업적은 조선을 전란의 위기에서 구해낸 것만이 아니라,동아시아의 평화를 이룩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시대를 초월한 이순신의 활약상은, 현대에 이르러서에도 나라를 위한 구국의 영웅으로 변함없이 한국인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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