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림택권 (18) 건강 나빠진 아내 위해 날씨 좋은 美서부로 이주

임보혁 2024. 2. 8.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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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목회 환경은 무척 힘들었다.

이미 유학 오기 전 한국에서도 교회를 개척해봤지만 이민 목회는 상황이 아주 달랐다.

1978년 2월 정기 제직회에서 교회 성전 건물 마련을 위한 건축위원회가 구성됐다.

마침 후임 사역자는 한국 정원교회 주일학교 전도사로 사역을 도왔던 박도원 목사님으로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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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예배 출석 성도 수 늘어 안정되자
자체 교회당 마련하려 건축위원회 구성
후임으로 정원교회 박도원 목사 결정
림택권(왼쪽) 목사가 미국 필라델피아연합교회에서 목회할 당시 만난 현봉학(1922~2007) 장로. ‘한국의 쉰들러’라고도 불리는 현 장로는 6·25전쟁 당시 미군의 흥남철수작전에 따라 북한을 탈출하려는 피난민들을 군함에 태워달라며 미 10군단장에게 요청한 인물이다.


이민 목회 환경은 무척 힘들었다. 이미 유학 오기 전 한국에서도 교회를 개척해봤지만 이민 목회는 상황이 아주 달랐다. 몇 년이 지나자 점점 탈진 상태가 됐다. 목회를 집어치우고 미 대륙을 횡단하는 트럭이나 운전하겠다고 하나님께 떼를 썼던 때도 이쯤이었다.

“하나님, 저 이제 그만두렵니다. 더는 못하겠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말씀해주세요.”

투정 부리듯 종종 하나님께 기도했다. 어떤 응답이 들어올까 싶은 마음에 이렇게 기도드리면, 하나님은 늘 “나도 알고 있다”고 대답해주시며 마음을 위로해주셨다.

사실 나도 물론 진짜 속마음은 그만둘 생각까지는 아니었고 그저 하나님께 응석을 부렸던 것 같다. 신자 가정에서 태어난 모태신앙이라고는 했지만, 이후에도 하나님에 대한 내 신앙은 이 정도였던 것 같다. 그래도 계속해서 한 길만 바라고 한 곳만 바라보며 열심히 달렸다. 그러자 점점 예배 출석 성도 수도 늘고, 자체 교회당을 갖자는 열풍도 생겼다. 장로님 세 분을 장립해 당회가 구성됐다. 1978년 2월 정기 제직회에서 교회 성전 건물 마련을 위한 건축위원회가 구성됐다. 그 후 교회에 등록한 78가정 교인들의 기도와 정성으로 건물을 사들일 종잣돈이 마련됐다. 같은 해 10월 22일 1차 건축헌금을 했다.

벧엘교회는 79년 11월 미국 장로교인 PCA(Presbyterian Church in America) 교단에 가입했다. 나는 그 무렵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심사위원 면접을 거쳐 이 교단의 회원이기도 했다. 이듬해 5월 PCA 아센숀노회 가입 예배를 드렸다.

그러던 차에 15년 넘게 미국 중서부에서만 살다 보니 무언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 서부에서도 지내보고 싶었고, 건강이 나빠진 아내를 위해서는 날씨가 좋은 서부가 좋을 것 같았다. 시카고는 마치 미국에서 고향과도 같았던 곳이고 첫 교회를 개척해 함께한 교인들을 떠나기란 퍽 어려웠다. 마침 후임 사역자는 한국 정원교회 주일학교 전도사로 사역을 도왔던 박도원 목사님으로 정해졌다. 박 목사님은 가족들과 미국으로 건너오셨다. 후임자로 박 목사님이 정해진 것 역시 내 앞길을 미리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또다시 경험했던 간증 거리이기도 하다.

나는 후임 박 목사님이 그동안 마련한 교회 건축헌금으로 교회 건물을 구매토록 했다. 그러면서 교회 담임 목사직도 내려놓았다. 이후 벧엘교회는 81년 11월 1일 창립 8주년 예배를 드리며 새 예배당 건물을 헌당했다.

우리 가족이 머물던 스코키 지역 집은 융자로 구입했는데 이를 팔고 융자를 갚고 나니 거의 1만 달러 정도가 남았다. 홀가분했다. 그간 가족과 함께 휴가도 제대로 못 갔으니 많은 곳을 여행해보고 싶었다. 마침 여름방학도 시작돼 홀가분한 마음으로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길’(히 11:8)이라는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서부를 향해 떠났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에는 이것이 믿음이었는지 만용이었는지 잘 모르겠으나 이 일로 네 번째 담임을 맡게 된 임마누엘교회가 이 땅에 생겼으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 세상 누가 미리 내다볼 수 있을까 싶다.

정리=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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