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의 대표작 '절규', 100년 만에 밝혀진 진실

이준목 2024. 2. 7.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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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tvN <벌거벗은 세계사>

[이준목 기자]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활동한 노르웨이의 화가이자, 피카소와 함께 현대미술의 모토가 된 '표현주의(Expressionism)'의 창시자로 꼽힌다. 특히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절규(Skrik 혹은 The Scream, 1893)'는 미술을 잘 모르는 사람도 한번쯤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며, 2012년 경매에서 1억 1990만달러(한화 1368억원)에 낙찰되며 세계미술 경매의 역사를 새롭게 바꾸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뭉크는 살아생전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비난과 악평에 시달렸다. 지독한 정신질환으로 일생을 공포와 불안에 시달려야했을 만큼 기구한 삶을 살아야했다. 대체 무엇이 뭉크를 그토록 미치게 만든 것일까. 그리고 그의 대표작 '절규'을 둘러싼 숨겨진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죽음의 화가' 뭉크의 일대기
 
 tvN <벌거벗은 세계사> 관련 이미지.
ⓒ tvN
 
2월 6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37회에서는 '죽음의 화가 뭉크와 절규를 둘러싼 미스터리'를 통하여 뭉크의 일대기를 조명했다. 미술사 전문가인 우정아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뭉크는 1863년 12월 12일 노르웨이의 남동쪽에 위치한 오달스브룩에서 5남매의 둘째로 태어났다. 뭉크의 삶은 어릴때부터 평탄하지 않았다. 불과 5세일 때 사랑하는 어머니를 폐결핵으로 잃어야 했다.

뭉크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상처를 오랜 시간 극복하지 못했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어머니가 죽던 순간을 그림으로 남긴 것이 '죽은 어머니와 아이'라는 작품이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후 아이가 느끼는 고통과 절망을 시각적으로 표현해낸 이 작품에서, 뭉크는 망자보다 남겨진 이들의 감정에 초점을 맞추며 어머니를 잃어야 했던 자신의 감정을 녹여냈다고 평가받았다.

또한 어머니의 죽음이 불러온 나비효과는 아버지의 이상행동으로까지 이어졌다. 뭉크의 아버지는 아내 사후 종교에 의지하다가 광신도가 되었고, 어린 자녀들에게 공포 동화를 읽어주거나 종교를 강요하는 등 육체적-정신적 학대를 일삼았다. 이로 인하여 뭉크는 어린 시절부터 불안장애를 가진 사람으로 성장하게 됐다. 훗날 뭉크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삶과 인간에 대한 끊임없는 공포속에서 살아야 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뭉크 가족의 비극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뭉크가 14세였던 1877년에는 누나 소피에마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난다. 소피에는 의자에 앉은 채로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데 뭉크는 '병실에서의 죽음(1893)'을 통하여 어머니처럼 누나의 마지막 순간도 그림으로 남겼다.

어머니와 누나의 연이은 죽음, 동생 라우라의 정신질환 등 가족의 불행을 지켜봐야했던 뭉크에게 유일한 위안이 되어준 것은 바로 그림이었다. 뭉크는 집안일을 돌봐주며 종종 그림을 그렸던 이모 카렌의 영향을 받아 자연히 그림에 흥미를 갖게됐다. 기술학교를 다니다가 자퇴한 뭉크는 이듬해인 1881년 17세의 나이에 크리스티아니아 왕립미술학교에 입학하며 본격적인 화가의 길에 접어들었다.

청년이 된 뭉크는 장학금을 받고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나면서 새로운 그림세계에 눈을 뜨게 된다. 19세기말 파리는 유럽 예술의 중심에 있었고, 사실적인 묘사를 거부하며 화가 빛과 색을 새롭게 해석하는 '후기 인상주의'와 빈센트 반 고흐의 영향은 뭉크에게 깊은 영감을 줬다. 약 3년여의 파리 유학 생활은 뭉크의 화풍을 정립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 시절로 꼽힌다.

1889년 11월, 25살의 뭉크에게 평생 애증의 대상이었던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난다. 가족들을 연이어 잃은 뭉크는 다시 극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이 시기 뭉크가 남긴 글을 보면 "나는 죽음과 동거한다"라고 독백하며 심각한 자살충동에 시달리기도 했다. 당시 뭉크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공개된 장소에 오래 앉아있지를 못했고, 자신이 생각하기에 모자를 똑바로 썼다고 생각될 때까지 바깥으로 나가지 못할 만큼 강박 증세에 시달렸다고 한다.

한동안 불안과 혼돈의 나날을 보내던 뭉크는 문득 깨달음을 얻고 '내면의 감정을 표현하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1892년 11월에는 뭉크의 이름을 유럽 전역에 알리게 되는 큰 사건이 벌어진다. 뭉크는 베를린에서 개인전을 개최했지만 불과 일주일만에 중단되고 만다. 당시 시대상과는 전혀 맞지 않았던 뭉크의 화풍 때문이었다.

'우울' '환상' '여름밤의 신비' 등 음울하고 초현실적인 분위기로 가득했던 뭉크의 그림들은 대중과 언론, 평론가들에게 모두 큰 충격을 안겼다. "악령이 깃들었다" "완전히 미친 사람 하나가 고상한 부르주아 사이에 난입했다" 등의 혹평을 받아야 했다. 당시 이 일은 '뭉크 스캔들'이라고 불릴만큼 미술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미술계는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아카데미 화풍'과 진보적이고 새로운 '모더니즘 화풍'이 충돌하던 시기였고, 그 가운데에 선 뭉크의 그림이 일종의 불쏘시개 같은 역할을 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뭉크도 '노이즈 마케팅'의 수혜자가 됐다. 뭉크는 이모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보다 더 좋은 광고는 바랄 수 없다. 젊은 화가들은 오히려 제 그림을 좋아한다"며 오히려 상황을 반겼다고 한다.

실제로 뭉크 스캔들 이후로 독일의 젊은 화가들이 모여서 전통적인 아카데미 화풍과 제도권 미술에서 분리된 자유로운 예술활동을 추구하는 모임인 '베를린 분리파'를 만들었다. 유명세를 얻게 된 뭉크는 유럽 국가들 순회 전시를 다녔고, 나중에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와 전시회를 열었을 때는 뜨거운 호응을 얻으며 스타 작가로 입지를 굳히게 된다. 

뭉크는 20세기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선구자로 자리잡으며 활발한 작품활동을 이어간다. 1893년부터는 <생의 프리즈>라는 연작 기획을 통하여 사랑의 시작부터 소멸, 삶의 불안과 죽음이라는 4개의 주제로 구성된 시리즈 작품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눈속의 눈' '붉은 담쟁이' '죽음의 열병' 등과 함께, 뭉크의 대표작이자 현대미술사를 대표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꼽히는 '절규'도 이 시기에 탄생했다.

'절규'의 해석을 둘러싸고 오늘날까지 수많은 궁금증과 미스터리가 존재한다. 그림속의 남자는 대체 무엇을 보고 절규하는 것일까? 뭉크는 해질녘에 언덕을 산책하다가 문득 굉장한 불안감을 느꼈던 경험을 토대로 '절규'를 기획하게 되었고 밝힌 바 있다.

뭉크의 설명을 토대로 알 수 있는 것은, 절규하는 주체가 그림 속의 남자가 아닌 '자연'이라는 것이다. 남자는 자연의 비명을 듣고 두 손으로 귀를 막아도 멈추지 않는 비명소리에 괴로워하고 있던 것이다. 실제 뭉크는 자주 두통과 현기증을 호소했는데 이는 불안장애의 일종인 '공황발작'의 전형적인 증상이기도 하다.

'절규'에 숨겨진 비밀
 
 tvN <벌거벗은 세계사> 관련 이미지.
ⓒ tvN
 
또한 '절규'에는 약 100여년간 숨겨져 있던 비밀이 존재했다. '절규'의 노을 속에는 "미친 사람만이 그릴 수 있다" 는 의미심장한 낙서가 작게 쓰여져 있다. 뒤늦게 이를 알게 된 미술계에서는 대체 누가, 언제, 왜 이런 낙서를 했는지를 두고 해석이 분분했다. 뭉크 사후 시간이 한참 지나 2021년에야 필체 대조 결과 밝혀진 낙서의 진범은, 놀랍게도 '뭉크 본인'이었다.

'절규' 역시 처음 선보여졌던 시기에는 미술 평론가와 대중들로부터 악평을 받았다. 진지하게 뭉크의 정신상태를 의심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뭉크 역시 자신이 불안과 강박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고, 낙서를 통하여 스스로를 '미친 사람'이라고 표현하며 자신의 광기를 인정한 것이다.

'절규'는 기구했던 탄생 배경만큼이나 뭉크 사후 몇 차례 도난을 당하기도 했다. 결국 범인을 검거하고 결국 작품을 환수하기는 했지만, 그 반환 과정을 둘러싼 논란은 지금까지도 의혹으로 남아있다.

한편으로 뭉크의 삶과 화풍에 영향을 미친 또다른 화두는 사랑이었다. '흡혈귀' '마돈나' '마라의 죽음' 등 뭉크의 또다른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들은 모두 뭉크가 실제로 사랑했던 세 여인들을 모델로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애석하게도 뭉크는 연애운도 최악이었다. 여인들은 오히려 뭉크의 광기를 더욱 부채질하는데 악영향을 미쳤다. 모델이 된 여성들을 주로 음울하고 괴기스러운 분위기로 묘사한 작품들을 통해서, 뭉크는 사랑을 갈구하지만 한편으로는 여성을 두려워하는 모순되고 복잡한 내면을 드러냈다.

뭉크의 첫사랑인 밀리 타울로브는 이미 남편이 있는 유부녀였다. 뭉크는 밀리가 이혼하기를 기다렸지만, 정작 그녀는 남편과 이혼한 후, 뭉크가 아닌 새로운 남자와 재혼해버렸다. 두 번째 연인인 다그니 율은 뭉크의 먼 친척이었고 여러 남성 예술가의 뮤즈로 꼽힌 인기녀였다. 다그니는 뭉크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프시비셰프스키와 '환승연애'에 빠졌고 결혼까지 했다.

심지어 뭉크의 마지막 세 번째 연인이 된 툴라 라르센은 스토커였다. 툴라는 뭉크가 결혼을 미루며 자신과 거리를 두려고 하자, 그에게 점점 집착하고 스토킹을 일삼기 시작했다. 뭉크와 툴라의 갈등은 점점 깊어졌다. 

급기야 툴라는 결혼해주지 않으면 총으로 자살하겠다고 뭉크를 협박했다. 이를 말리려는 뭉크와 실랑이를 벌이다 탈라가 쏜 총이 그만 손에 맞으며 중상을 입은 뭉크는 결국 손가락을 절단해야 했다. 황당하게도 그토록 뭉크에 집착하던 툴라는 총기사고 후 불과 3주만에 새로운 남자와 사랑에 빠져 뭉크를 떠나버렸다.

거듭된 사랑의 상처는 뭉크의 정신상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일련의 사건 이후 뭉크는 한동안 술에 의존하며 살았고 광장공포증과 피해망상에 시달렸다. 인명피해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총기로 타인을 위협하는 사고만 무려 세 번이나 일으켰다.

자신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인지한 뭉크는 43세의 나이에 덴마크 코펜하겐의 정신병원을 찾아 스스로 입원했다. 의사가 내린 진단은 알코올 중독에 의한 마비성 치매였다. 뭉크는 약 7개월간의 치료를 받으며 몸과 마음의 건강을 어느 정도 회복했다.

이때부터 뭉크는 "불안과 질병이 없었다면 내 인생은 방향을 잃고 떠도는 배와 같았을 것"이라며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평생 자신을 괴롭힌 정신질환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작품활동의 원동력으로 삼은 것이다.

비록 뭉크 개인에게는 힘든 시기였지만 역설적으로 화가로서의 명예는 점점 높아졌다. 뭉크는 모국 노르웨이에서 기사 작위를 받았고 그의 작품들은 국립미술관에 전시됐다. 한때 '악마의 화가'라고까지 비난받던 뭉크가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1916년 오슬로대학 설립 100주년 기념벽화 공모전에 참여한 뭉크는 그의 또다른 걸작인 '태양'을 선보인다. 화려한 색채와 희망적인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당시는 노르웨이가 독립한지 얼마 안 되던 시점이었고, '태양'은 조국이 떠오르는 태양처럼 친란하게 빛나기를 바라는 노르웨이 국민들의 마음을 대변한 것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노르웨이에서는 오히려 뭉크의 대표작으로 '절규'보다 '태양'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은 이유다. 

중년의 뭉크는 이후 오슬로 외곽 에켈리라는 마을에 은둔하며 오로지 작품활동에만 매달렸다. 뭉크는 유화, 판화, 조각 등 약 3만여 점이 넘는 작품을 남긴만큼 다작을 하기도 했다. 

1930년대 노년에 접어든 뭉크에게 일생일대의 위기가 찾아온다.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 독일 정권의 등장이었다. 본래 화가를 꿈꿨던 히틀러는 전통적인 아카데미 화풍을 선호했고 뭉크와 같은 현대미술을 부정하며 탄압했다. 1940년 노르웨이가 나치에게 침공당하면서 뭉크의 작품도 압수당했다. 나치의 탄압대상에 이름을 올린 뭉크는 자필 유서를 통해 자신의 작품 2만8천여 점을 모두 오슬로시에 기증한다.

암울한 시기에도 뭉크는 작품활동을 멈추지는 않았다. 어느덧 노년에 접어든 뭉크는 '침대와 시계 사이의 자화상' 등을 통하여 죽음과 운명 사이에 있는 노년의 자신을 담담하게 관조하는 모습을 보인다. 뭉크는 생전에 "내가 깊은 절망에 빠져있을때도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마음을 진정시키는 평화가 감싸곤 했다. 그림이 없었다면 나는 벌써 죽었을 것"이라며 자신의 삶을 구원해준 그림에 대한 애정과 감사를 표현했다.

애석하게도 뭉크는 나치의 패망을 보지 못하고 1944년 1월 23일, 폐렴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묘하게도 죽는 순간 그의 손에 들려있었던 책의 제목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평생을 절망과 죽음의 공포 속에 시달렸던 뭉크가 정작 80세까지 장수했다는 사실도 아이러니하다.

"나의 예술은 자유로운 고백이자 스스로의 인생관계를 직접 밝히고자하는 시도다."

뭉크가 남긴 스스로의 예술세계에 대한 정의다. 비록 뭉크 본인은 평생을 외롭고 처절한 삶을 살아야 했지만 그를 절망의 늪에서 구원해준 유일한 희망은 바로 그림이었다. 고통을 자양분 삼아 예술가로서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낸 뭉크의 삶과 작품이 후대까지 예술가들의 귀감으로 남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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