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까지 총을 든 조선의용대와 김원봉

김삼웅 2024. 2. 6.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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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인물 100선 79] 사실상 조선민족전선연맹 소속의 항일독립군부대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밀양독립운동기념관 뜰에 있는 약산 김원봉 선생 흉상.
ⓒ 윤성효
 
김원봉(金元鳳, 1898~1958)은 호는 약산(若山), 밀양출신이다. 그는 1919년 1월 중국 길림에서 조직한 조선의열단 단장으로 일제와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독립운동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에 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조선의용대'에 대해서는 비교적 덜 알려진 편이다. 여기서는 이 부문에 초점을 맞췄다.

조선의용대(군)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진영에서 가장 치열하게, 가장 나중까지 조국광복을 위해 싸우다가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내고도 해방 후 남쪽에서는 좌파로 몰려 소외되고 북쪽에서는 연안파로 몰려 숙청당한 비운의 독립군부대이다.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10일 중국 한구(漢口)에서 창립되었다. 모체는 1935년 7월 중국에서 결성된 민족혁명당이다. 민족혁명당 대표 김원봉은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난징에서 한인청년 83명을 모아 장시성(江西省) 싱즈시엔에 있는 중국육군군관학교 특별훈련반에 입소시켜 정치ㆍ군사훈련을 받게 하였다.

6개월 간의 훈련을 마친 이들은 후베이성 우한(武漢)으로 이동하여 조선의용대 창설의 기간요원이 되었다. 이 무렵 민족혁명당이 조선민족해방동맹(대표 김성숙), 조선혁명자연맹(대표 유자명)과 함께 조선민족전선연맹(이사장 김원봉)을 결성하면서 조선의용대를 산하 부대로 창설한 것이다. 

한인청년 100여 명으로 구성된 조선의용대는 김원봉을 대장, 제1구대장 박효삼, 제2구대장 이익성으로 하여 중국군사위원회(위원장 장제스) 정치부의 지휘를 받도록 되었으나 사실상 조선민족전선연맹 소속의 항일독립군부대였다.
 
▲ 1938년 10월 10일 중국 임시수도 한커우에서 창설된 조선의용대 기념사진 조선의용대는 중국 관내에 최초로 창설된 한인군사조직이다. 임시정부 산하 한국광복군보다 무려 2년 앞서 창설되었다. 조선의용대 깃발 가운데 있는 인물이 약산 김원봉이다.
ⓒ 독립기념관 소장
 
조선의용대는 창립초기 3대 목표를 제시하였다.

첫째, 중국경내에 있는 모든 조선혁명역량을 총동원하여 중국 항일전쟁에 참가시킬 것.

둘째, 일본의 광범한 군민을 쟁취하고 동방의 각 약소민족을 발동하여 공동으로 일본군벌을 타도할 것.

셋째, 조선혁명운동을 추진시켜 조선민족의 자유와 해방을 쟁취할 것. 

중국정부로부터 무기와 물적 자원을 지원받은 관계로 '중국 항일전' 참여를 제시하였지만 중국과 한국은 일제의 침략을 받고 있는 공동운명체였기에 사실은 우리 독립운동이 목적이었다. 

조선의용대는 일본군의 우한 공격 직전인 1938년 10월 하순에 이 지역을 빠져나와 광시성 퀘이린(桂林)과 후난성으로 분산, 이동하여 항일 선전전을 비롯하여 치열하게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성립 당초 조선의용대 대원은 대부분 중국군관학교 교육을 받은 24~25세의 '열혈청년'들이었고 일본어에 능해서 일본어로 항일선전표어와 전단 등을 만들어 살포하고 중국군사령부에서 일본군 포로취조를 통역하거나 몇 대의 방송기를 가지고 전쟁터에서 일본군에 대한 선전방송을 했다."(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2)])

조선의용대는 중국의 전세의 변화에 따라 부대 편성이 변하거나 전투이동 지역이 바뀌었다. 그러던 중 1940년 말에서 이듬해 봄에 걸쳐 대부분의 병력이 장제스의 국부군 지역을 벗어나 공산당 근거지인 화북지방 타이항산 근처로 이동하여 명칭도 조선의용군으로 바뀌고 진용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하였다. 이 지역은 중국공산군 팔로군의 관할이었다. 상대는 일제 관동군이었다. 

화북지대의 조선의용군은 1941년 11월부터 무장투쟁과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는 다음 4가지 방법에서 활동이 전개되었다.

첫째, 좌담회ㆍ연환회ㆍ군중집회 등을 개최하여 중국 민중에 대한 선전활동을 전개하였고,

둘째 일본군을 상대로 전단 살포, 표어 부착 등의 문자선전과 함화(喊話) 같은 구두선전을 전개하였다.

셋째, 동포한인들을 대상으로 선전을 전개하였다. 일본군에 복무하고 있던 한인통역에게 편지를 써서 민족의식을 고취했는가 하면 조선의용대 활동을 중국공산당이 발행하는 신문에 크게 실어 적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동포들에게 조선의용대의 활약상을 널리 알려 그들의 항일정서를 고양시켰다.

넷째, 일본군과 직접 전투를 전개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전투가 호가장(胡家莊)전투인데, 1941년 12월 12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제2대 대원 23명은 일본군의 기습공격에 맞서 처절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대원 4명이 전사하고 1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수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한편 조선의용대는 1942년 5월 중국공산당의 반소탕전(조선의용대 5월 반소탕전)에 참전하였는데 이때 조선의용대 간부 진광화(陳光華)와 윤세주가 전사하였다.(염인호, [조선의용대]) 
 1939년 조선의용대는 본부를 광시성 구이린(桂林)으로 이동하였고, 이곳에서 1주년을 기념하였다.(1939.10.10.)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의용군은 일제와 싸우면서 많은 희생자를 냈다. 조선의용군으로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일본군에  포로가 되었던 김학철이 작사한 <조선의용군 추도가>이다.

         조선의용군 추도가

 사나운 비바람이 치는 길가에
 다 못가고 쓰러지는 너의 뜻을
 이어서 이룰 것을 맹세하노니
 진리의 그늘 밑에 길이길이 잠들어라
 불멸의 영령.

조선의용대는 1940년 다수가 화북으로 이동하여 타이항산과 옌안을 근거지로 삼아 항일투쟁을 계속하고, 김원봉 대장이 이끈 일부는 충칭으로 옮겨 1942년 4월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 창설의 주력이 되었다. 김원봉은 광복군부사령과 제1지대장을 맡았다. 조선의용대(군)가 갈라진 배경을 북한의 한 자료는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1938년 6월 우한에 집결한 조선민족혁명당 내에는 항일투쟁 전략방침을 둘러싸고 두 가지 같지 않은 의견이 존재하였다. 하나는 조선청년전위동맹 출신들을 중심으로 한 신진청년들은 한결같이 북상항일을 주장하였고, 다른 하나는 조선민족혁명당의 골간분자들로서 국민당의 지휘 밑에 항일투쟁에 참가하자는 견해였다.(………)

이 두 가지 첨예한 대립을 이룬 의견은 서로 한 걸음도 양보하지 않고 격렬한 변론을 진행하였다. 대변론 가운데서 지하조직으로 있던 조선청년전위동맹의 정체가 폭로되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전위동맹 성원들은 북상항일을 주장하던 진보적 청년들까지 합쳐 조선민족혁명당에서 나와 정식으로 조선청년전위동맹의 조직을 공개적으로 선포하고 한구(漢口)에 자리잡고 활동하였다.([조선족 백년사회])

안타까운 것은 해방 후 충칭에 있던 김원봉 등 조선의용대 출신들은 남한으로 귀국하고, 옌안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군의 일부는 귀국길이 막히자 만주로 이동하여 중국공산당에 협력, 국공내전에 참가했다가 사망하거나 북한으로 들어왔다가 옌안파 숙청 때 희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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