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부짖은 일본인 "왜 이리 조선학교 학생을 괴롭히나" [민병래의 사수만보]

민병래 2024. 2. 3.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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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수만보] 10년간 조선학교 차별과 재일동포 아픔 카메라에 담은 김지운 감독②

사수만보는 '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의 줄임말입니다. <편집자말>

[글쓴이: 민병래(작가)]

- 1편 <"조선학교 접촉했다고 경위서를 쓰랍니다">(https://omn.kr/278t3)에서 이어집니다.

김지운은 담배 연기를 벗 삼아 꾸역꾸역 통일부에 보낼 초안을 써나갔다. 마지막 문장만 쓰면 끝이다. 김지운이 내뿜는 담배 연기 탓에 그의 작업실 '이스크라'는 공기가 눅눅하다.

힘들었지만 차별을 촬영하는 3년 동안 기쁜 순간도 많았다. 특히 오사카지방법원 1심에서 승소했을 때의 감격은 잊을 수가 없다. 유일한 승소였던 1심 결과를 알리기 위해 일본의 두 변호사는 재판정에서 동포들이 기다리는 법원 정문까지 달려왔다. 환하게 웃으며 '승소'라는 팻말을 펼쳤다. 박수와 웃음, 뜨거운 포옹이 이어졌다. 동포 한 분은 일본 사회에서 살면서 처음으로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고 말했다. 영화 <귀향>의 주연배우이며 재일 3세인 강하나는 이날 "우리 존재가 비로소 인정받는구나"하며 기뻐했다.

세상에 '조선학교'만큼 기구한 존재가 있을까? 일본을 실질적으로 지배했던 GHQ(주일연합군사령부)의 사령관 맥아더는 1946년, 47년을 거치며 냉전의 막이 오르자 일본공산당을 견제하면서 공산당의 가장 큰 기반인 재일조선인을 억압했다. 가장 상징적인 게 1948년 1월 조선인학교에 내려진 폐쇄령이었다.

해방 후 동포사회는 조국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600여 개의 국어강습소를 만들어 재일 2세, 3세 아이에게 우리 말과 글을 가르쳤다. 10전짜리, 1원짜리 동전을 모아 땅을 사고 맨몸을 던져 교실을 지었다. 학교는 동포에게 얼이고 꿈이었다. 변변한 동포회관조차 없었던 조선인사회에서 학교는 고향마을의 당산나무고 어머니 품이었다. "맥아더 원수님 우리 학교를 빼앗지 말아 주세요"라고 어린 학생이 보낸 편지는 미군의 군홧발에 짓밟혔다. 미군과 일본 경찰은 중무장을 하고 곤봉을 휘두르며 아이들을 교실에서 들어내고 교실에 대못을 박았다.
 
▲ 조선학교 폐쇄령에 따라 교실에 들려나오는 학생들 1949년 10월 19일 제2차 조선학교 폐쇄령에 따라 아이들을 조선학교에서 끌어내는 아이치현 경찰들.
ⓒ 재일한인역사자료관
  
재일조선인은 저항했다. 목숨 같은 조선학교, 생명 같은 민족교육을 지키려고 도쿄, 오사카, 효고 등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다. 1948년 4월 24일 1만 5천 명의 효고현 동포가 현청을 에워싸고 체포된 동포의 석방과 '학교 폐쇄령' 철회를 요구했다. 이날 주일연합국사령부는 고베시 전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1973명의 동포를 붙잡아갔다.

이틀 후 오사카 공원에서는 더욱 거센 투쟁이 벌어졌다. 일본 경찰은 평화시위인데도 총까지 쏘아댔다. 급기야 김태일이란 열여섯 소년이 오사카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이름하여 4·24 한신교육투쟁, 100만 명의 동포가 참여하고 2900명이 체포되었으며 군사법정에서 유기징역을 받은 형기가 116년에 달하는 빛나는 투쟁, 처절한 싸움이었다.

이들이 고통을 겪을 때 해방조국은 전혀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없었다. 맥아더 사령관과 일본 정부에 어떠한 항의도 하지 못했다. 식민지 백성이 되어 낯선 땅에 끌려왔건만 해방이 되고서도 여전히 재일조선인은 식민지 백성처럼 자기 말과 자기 글을 쓰지 못하게 박해받은 것이다.

조선학교 학생은 재일1세, 2세 선대가 식민지와 분단으로 겪은 고통을 잘 알고 본인들도 이 아픔을 겪고 있기에 진정 조국의 통일과 평화 공존을 염원한다. 지금 격랑에 처한 남북 관계를 보면 아득하고 꿈같은 일로 여겨지지만 불과 6년 전인 2018년 4월 27일, 문재인과 김정은은 판문점 회담을 열었고 10월에는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하며 '공동 번영'을 다짐했다. 이 역사적인 상봉을 조선학교 학생들은 학교에서 함께 지켜보며 박수치고 환호했다. 통일이 되면 판문점에서 평양냉면과 서울냉면을 먹을 거라면서

조선학교 학생들은 북을 조국이라 하고 남을 고향이라 한다. 1982년부터 조선고급학교 졸업반 학생은 북으로 수학여행을 오간다. 평양과 금강산을 다녀와 조국에 대한 사랑을 되새긴다. 그런가 하면 빅뱅과 BTS의 노래를 들으면서 남쪽 고향의 문화를 동경한다. 조선대학교(조선학교는 초급부터 대학교까지 있다) 학생은 사상교육을 받는 한편 기숙사 방마다 블랙핑크와 뉴진스의 브로마이드를 걸어놓고 신라면을 끓여먹으며 한국 드라마를 즐긴다.

지금 조선학교 학생의 국적을 보면 조선적을 유지하는 경우는 소수이고 80%가 넘는 학생이 한국 국적과 일본 국적을 갖고 있다. 1955년 재일조선인총연합(조총련) 결성을 계기로 조선학교가 부활했지만 학교는 이렇게 시대 변화를 선선히 받아들이고 있다. 2010년 한국의 법무부는 조선적 동포를 우리 재외동포라고 유권해석을 한 바도 있다.

그럼에도 조선학교를 북을 지지하는 교육기관이라고만 보는 것은 낡고 편향된 시각이다. 조선학교는 탄생 이래 민족교육에 충실했다. 조국에 돌아갈 준비를 위해 우리말과 우리 글을 익혔고 지금은 "일본 땅에서 당당히 조선민족으로서 살아감"을 교육의 이념으로 하고 있을 뿐이다.

조선학교 학생은 남북을 균형 있게 바라보고 양쪽의 문화를 존중하며 일본 사회에 대한 이해가 깊다. 마치 조선족이 남북을 폭넓게 볼 줄 알고 중국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린 것처럼. 재일동포나 조선족은 기회가 주어지면 한반도의 평화 공존과 공동 번영을 위해서 큰 몫을 할 수 있는 존재다. 한반도를 넘어 동북아의 평화와 연대를 위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자산인 것이다.
  
▲ 거리 공연중인 히로시마 조선중고급학교 학생들 2018년 5월 이들은 히로시마 시내에서 고교무상화 차별 철회를 요구했다.
ⓒ 김지운 제공
 
사정이 이러한데 한국 정부가 조선학교와 교류했다는 이유만으로 죄인 취급을 하는 것은 너무나 시대착오적이다. 만약 통일부의 논리대로 조총련과 조선학교 인사 접촉을 문제 삼는다면 지금 한국 국적을 갖고 일본에서 살아가는 수십만 동포는 통일부에 매일 접촉 신고를 내고 허가를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동포사회의 동창회나 동아리, 각종 행사에서 늘 조총련 관계자와 조선학교 인사를 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반도와 달리 일본 사회에선 마음의 거리는 있어도 분단의 철조망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수십만 장의 접촉 신청서가 하루가 멀다고 들어온다면 통일부의 업무는 마비되지 않을까?

사실 남북교류협력법 본문이나 시행령 어디에도 조선학교 인사를 접촉할 때 신고해야 한다는 명문 규정이 없다. 통일부가 임의로 내린 해석일 뿐이다. 이를 근거로 김지운에게 경위서를 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부당하다. 통일부는 김지운에게만이 아니라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의 권해효 대표·김명준 사무총장 그리고 '우리학교와 아이들을 지키는 시민모임' 손미희 대표, 영화 <나는 조선 사람입니다>를 만든 조은성 PD에게도 마찬가지 요구를 하고 있다. 지난해 9월에는 도쿄의 요코아미초 공원에서 열린 '관동조선인대학살 100주년 추도식'에 참석해 조총련 인사와 조우했다고 윤미향 의원에게까지 경위서를 요구했으니 통일부는 역사적 소명을 거꾸로 인식하고 있는 게 아닐까?

역사와 인권의 상징이 된 조선학교

김지운이 답신의 마지막 문장을 쓸 즈음 창밖에는 푸른 밤기운이 몰려왔다. 바람도 강해져 세차게 제 몸을 부딪쳤다 멀어져가곤 한다. 김지운은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려다 멈칫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밭은기침이 나온 탓이다.

방송사에서 던져주는 일감만 바라보던 생활을 그만두고 다큐 작품을 만든 세월이 벌써 십 년이 넘는다. 언제나 돈이 문제였다. 프로덕션 때도 일은 꾸준히 들어왔지만 월급 주고 나면 빈털터리, 집안 살림에는 찬 바람이 불었다.

다큐에 매진하고부터는 더더욱 그랬다. 첫 장편 <항로>는 모금도, 지원도 없이 100% 자체 제작을 했다. 김도희 감독과 짝을 이뤄 3년 정도 공을 들였다. 일본을 80여 회나 오가고 100시간이 넘는 촬영 테이프가 쌓였다. 결산을 해보니 1억 원이 넘는 제작비가 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항로>는 2015년 발표했으나 극장 상영은 못 하고 공동체 상영만 이루어졌다. 영화를 본 사람은 많은 격려를 해 주었지만 노력에 비해 반향이 별로 없었다. 영화를 함께 만들다시피 한 김민수, 김철의 등 출연진에게 미안해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문재인 정부 들어 조선적 재일동포의 한국 방문이 자유롭게 허용된 것이다. <항로> 덕분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역사는 화해와 협력으로 가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차별>을 만드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오사카조선고급학교 학생들이 낸 1차 소송의 판결 날짜가 2017년 7월 28일로 잡혔을 때 김지운은 <항로> 이후 차기작에 대한 구상을 세우지도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일본으로 떠났다. 열흘 전에 히로시마에서 패소 판결이 있던 터라 오사카법원의 판결은 큰 관심사였다. 기획도 없고 촬영구성안도 없으나 판결이 내려지는 역사의 현장을 외면할 수 없었다. 김지운은 다큐작업을 하면서 잘 찍건 못 찍건 현장에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늘 지키려 했다.

그날부터 3년간 김지운은 김도희 감독과 번갈아 100여 차례 가까이 일본을 드나들었다. 비행기 값만 수천만 원, 잠은 3만 원 안팎 하는 캡슐호텔에서 식사는 거의 우동으로 때웠다. '항로' 때와 달리 펀딩도 하고 일부 제작 지원도 받았지만 녹록지 않았다.  
   
▲ 오사카법원 2심 패소 결과를 알리는 일본의 변호사 2018년 9월 27일 1심과 달리 오사카법원 무상화 배제 철회 소송에서 패소를 당했다.
ⓒ 김지운
 
▲ 오사카 법원 2심 패소 판결에 눈물 흘리는 조선학교 학생들 고교무상화 배제 철회 소송에서 1심과 달리 2심에서 패소했다.
ⓒ 김지운
 
더군다나 이 촬영 작업은 앞날을 계획할 수 없었다. 민사소송이니 1심에 이어 2심 그리고 3심까지 심리에서 판결까지 정해진 기한이 없었다. 다행인 걸까? 2020년 코로나가 발생하면서 일본 출입이 막혔다. 그 후 2020년 9월 3일 아이치현의 판결을 시작으로 2021년 7월 27일 히로시마시의 판결까지 일본최고재판소는 각 지방법원에서 올라온 상고를 기각해 조선학교 학생에게 "너희는 패배했다"라고 도장을 찍었다.

재판에서 졌지만 투쟁 자체는 끝난 게 아니다. 이 길고 긴 싸움은 일본이 식민지배를 반성하고 차별을 시정할 때야 끝나겠지만 최고재판소 판결을 계기로 영화로라도 한 매듭을 지어야 했다. 그때부터 2년여에 걸친 편집 과정이 시작되었다. 촬영본에 담긴 수많은 장면을 작품으로 빚어야 하는 시간이다. 판결을 기다리는 긴장감, 일본 변호인단의 헌신적인 노력, 재일동포의 간절함을 90분으로 응축하려면 힘든 나날을 거쳐야 한다. 그는 100시간의 촬영본을 보고 또 보면서 우선 1차로 3시간 분량의 초본을 만들었다. 보석 같은 장면, 애달픈 장면을 우선 추려냈다.

오사카 1심의 승소가 있고 두 달 후인 2017년 9월 13일 도쿄 재판에서는 패소 판결이 나왔다. 소식이 전해지자 법원 앞에서는 참을 수 없는 분노에 부르짖음이 터져 나왔다. '고교무상화로부터 조선학교 배제를 반대하는 연락회' 활동을 하는 모리모토 타카고는 "일본인으로서 부끄럽다. 조선학교 학생을 왜 이렇게 괴롭히냐"며 울부짖었다.

사실 조선학교에 대한 차별은 고교무상화정책에서 배제된 게 최초가 아니다. 1948년 조선학교를 폐쇄하면서 일본 정부는 일본소학교에 들어가라고 했다. 재일조선인에게 일본 학교는 차별의 소굴이다. 학교에 들어선 순간, 조선 학생은 이지메에 시달리고 매일 두들겨 맞는다. 김치 냄새 나니 가까이 오지 말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살길은 일본식 통명을 쓰며 조선인임을 숨기는 것뿐.

1955년을 기점으로 일본 전역에 조선학교가 다시 세워지면서 민족교육이 시작되었으나 정규 학교로 인정받지 못했다. 일종의 기술학원인 '각종학교'로 지정받아 조선고급학교를 졸업해도 대학수험자격을 얻지 못해 '검정고시'같은 '자격시험'을 봐야했다. 일본 고등학교 체육연맹이 주최하는 일본고교스포츠 공식대회에도 출전 자격을 얻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학교 학생은 일본 학생에게 주어지는 JR통학권 학생 할인을 똑같이 적용받지 못했다. 조선학교 앞에는 '스쿨존'도 설치해 주지 않았다.

조선학교에 대한 차별과 탄압의 사례는 이루 다 나열할 수 없을 정도다. 2009년에는 재특회를 비롯한 일본 극우가 교토 조선제1초급학교를 습격해 조선인은 '바퀴벌레'라고 욕하고 "차별당한다고 생각하면 일본을 떠나라"라고 막말을 늘어놓았다. 조선학교 여학생의 치마저고리는 대낮에 칼질을 당했다. 고교무상화 정책 이후 일본 정부가 내놓은 유치원과 보육 무상화 정책에서도 조선유치반 아이들은 제외되었다. 코로나 때 일본 정부는 모든 유치원에 마스크를 지원하면서 조선 유치원은 쏙 빼놓았다. 참으로 졸렬하고 치사한 차별을 대놓고 정책으로 시행해 온 것이다.

도쿄지방법원의 이날 판결은 세상에 대놓고 조선학교에 대한 모든 차별은 합법이라고 도장을 찍어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에 분노가 클 수밖에 없었다. 

2019년 3월 14일 후쿠오카지방법원에서는 "'무상화'에서 제외되어 발생한 정신적 피해에 대한 위로금 청구 소송 판결"이 있었다. 재판정에서 나온 일본 변호사 키요 타미키는 '패소' 팻말을 들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2012년부터 시작된 이 소송에 규슈지역의 일본 변호사 80여 명이 무료 변론을 하며 동참했다. 키요 타미키는 변호사가 되어 처음 맡은 소송이 이 재판이었다. 그는 법률 지식으로만 이 소송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어 많은 공부를 했다.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이해하면서 이 재판에서 이기는 게 역사의 정의이고 조선인의 손을 들어주는 게 일본이 식민지 지배를 반성하는 최소한의 자세라고 봤다. 그 희망이 좌절되어 흘린 눈물이었다.
  
▲ 규슈 소송에서 패소 결과를 알리는 일본의 변호사  왼쪽이 키요 타미키 변호사다.
ⓒ 김지운
   
▲ 규슈 법원에서 패소 소식을 듣고 눈물 흘리는 조선학교 학생들 이 소송은 무상화 배제에 따른 정신적 피해에 대한 위로금 청구 소송이었다.
ⓒ 김지운
 
김지운 감독은 이런 애달프고 보석 같은 장면을 추려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 많은 날을 세웠다. 물론 그의 옆에는 깡통 재떨이가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편집을 마무리해 1시간 30분의 작품을 만들었다. 100시간 정도의 촬영분에서 90시간 가까이 덜어내는 건 자식과 생이별을 해야 하는 아픔이다.

이렇게 만든 <차별>을 2021년 DMZ 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에 출품해 '아시아발전재단상'을 받았다. 그리고 2023년 극장 개봉에 올렸다. 500여 회 상영 기회가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배정된 시간은 조조 아니면 밤늦은 시간, 겨우 2258명이 상영관을 찾았다. 너무 초라한 성적, 그동안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듯했다.

조선학교 학생은 일본 정부와 일본최고재판소에서 차별받아도 되는 존재라고 낙인찍혔는데 고국에서마저 외면받는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그동안 오사카 1심 재판을 제외한 모든 지역의 1, 2심에서 패소할 때 김지운은 정들었던 학생들이 흘리는 눈물을 보면서 큰 좌절감을 느꼈다. 이 슬픔 앞에서 나의 카메라가 무슨 소용이 있나? 아무리 기록하고 이 아픔을 영상으로 담은들 현실이 바뀔까 하는 회의에 빠졌다. 그런데 한국 관객에게까지 외면받으니 가슴 한쪽이 베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반전이 일어났다. 영화가 개봉관에서 내려오고 나서 공동체 상영이 밀려들었다. 충남 보령에서는 극장 하나를 빌려 150명이나 되는 시민이 감상했고 부산의 한 초등학교에서는 영화를 본 선생님의 제안으로 전교생이 관람했다. 국내만이 아니라 미국, 독일, 네덜란드, 덴마크에서도 상영이 이루어졌다. 일본에서는 오사카 씨네누보극장에서 6주간, 오사카 씨어터세븐극장에서 2주간, 후쿠시마 극장에서 1주간이나 상영되었다. 자주상영(한국의 공동체상영)은 일본 전역에서 이제까지 60여 회나 진행되었고 3월 초까지 여섯 군데의 일정이 잡혔다.

영화를 본 관람객의 목소리는 따듯했다. "조선학교를 잘 몰랐다, 알게 해줘서 고맙고, 함께하고 싶다"는 평이 많았다. 일본에서도 조선학교를 전혀 모르던 이들이 <차별>을 보고 상영회를 추진하고, 조선학교를 지원하는 모임을 만들고 있다. 멀리 독일에서도 '재독조선학교후원회'가 조직되었으니 다큐 감독으로서 이만한 기쁨이 또 있겠는가?
  
▲ <소리여 모여라> 작품 제작회의에서 김지운 김지운은 박영이 감독의 차기작 <소리여 모여라>에 PD로 참여한다.
ⓒ 민병래
 
김지운은 오래 붙잡고 있던 답신을 마무리하고 몸을 일으켰다. 눅진한 담배 연기를 내보내려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밤하늘 멀리 금싸라기 같은 별빛이 돋아난다. 멀리 부산항에서 들려오는 것일까, 가느다란 뱃고동 소리가 별무리 사이로 꼬리를 늘어놓는다. 그는 가슴을 열고 심호흡을 크게 했다. 김지운의 등 뒤 모니터에는 통일부에 보내는 답신의 마지막 문장이 깜박거린다.
 
이제는 대한민국도 조총련 특히 조선학교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가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조선학교를 단순히 북을 지지하는 교육기관이 아닌 매일매일 일상에서의 작은 통일이 일어나는 곳, 일본 사회에서 역사와 인권의 상징이 되어가고 있는 곳, 나아가 동북아 평화의 마중물이 될 곳으로 인식해 주시기를 이번 기회를 통해 간곡히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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