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속 좁은 정책... 쿠르드 난민 소녀의 수난

김상목 2024. 2. 2.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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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마이 스몰 랜드>

[김상목 기자]

 영화 <마이 스몰 랜드> 포스터 이미지
ⓒ 미디어캐슬
 
시커먼 화면에 자막이 떠오른다. '이 영화에는 3개의 언어가 나옵니다. 그들이 살던 곳의 언어,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의 언어, 그리고 그들만의 언어입니다.' 그리고 점점 밝아오는 화면. 나무가 울창한 공터에서 중동 풍으로 보이는 외관과 복색의 한 무리 사람들이 야외 결혼식을 진행하는 중이다. 활짝 웃으며 기뻐하는 일행들. 함께 손뼉을 치고 노래를 부르거나 환성을 울리며 새로운 부부를 축하해주고 있다. 한껏 들뜬 표정에다 요란한 복장이 눈에 확 들어온다. 이곳은 요즘 바람 잘 날 없는 아랍권 중 다행히 평화로운 지방처럼 보인다.

행사를 마친 한 가족이 귀갓길에 오른다. 그런데 갑자기 일본어 안내방송이 들리기 시작한다. '가와구치 미나미 공원'이라는 방송 내용이 분명히 귓가에 남는다. 가족의 주변에는 익숙한 일본사람들이 가득하다. 이곳은 도쿄 북쪽의 수도권 교외지역, 사이타마 현 가와구치 시인 것이다. 대체 이 상황은 무엇일까? 관객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영화 <마이 스몰 랜드>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낯선 땅 일본에 어쩌다 도착했을까 궁금하게 만드는
 
 영화 <마이 스몰 랜드> 스틸 이미지
ⓒ 미디어캐슬
 
'쵸라쿠' 가족은 아빠 '마즈룸'과 '샤라', '아린', '로빈' 3남매로 구성된다. 엄마는 부재한 상태다. 그중 눈에 확 들어오는 인형 같이 예쁜 소녀가 있다. 큰 딸 '샤라'다. 결혼식 때 차려입은 착장으론 전형적인 아랍 여인인데 일본학교 교복을 입고 나니 심심찮게 볼 수 있는 혼혈 쿼터 여학생처럼 보인다. 샤라는 교복을 입고 자전거를 탄 채 등교하고, 수업이 끝나면 편의점에서 점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한다. 일본어가 유창한 이국풍 외모의 소녀에게 손님들은 심심찮게 국적을 묻곤 하지만 학교에선 다들 익숙한지 격의 없이 어울리는 중이다.

샤라는 일상에서 상반된 문화 사이 경계에 서 있는 존재다. 집에선 중동 스타일로 양탄자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식사한다. 식전에 신을 찬양하는 기도는 기본이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인샬라!'를 읊는 것을 보니 이들은 무슬림 가정으로 판단된다. 가족은 자신들의 원래 언어와 일본어를 섞어가며 대화한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구사하는 언어에는 구분선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샤라는 고등학교 2학년이다. 이제 슬슬 대학입시를 준비해야 한다. 단짝 친구들과 장래희망과 현실조건을 이야기하며 미래에 대한 꿈을 꾼다. 한창 그럴 나이다.

그런 샤라는 자신이 다녔던 초등학교를 방문해 은사와 만난다. 정답게 추억을 이야기하던 중 게시판에 부착된 그림 지도를 함께 바라본다. 학급 구성원들이 어느 나라에서 온 것인지 표시한 내용이다. 그가 다닌 학교는 전형적인 다문화 지역 특성을 지닌 듯하다. 정답던 사제관계는 하지만 샤라의 어린 남동생 '로빈' 관련 상담 건으로 이어진다. 아빠 '마즈룸'도 직장 일로 바쁜 와중에 함께 와 있다. 교사는 로빈이 동급생들과 대화를 전혀 하지 않는다며 걱정한다. 샤라는 초등학교 시절에 '이지메'를 당했던 기억을 되새기며 로빈도 왕따를 당하는지 묻지만 그런 상황은 아니라고 한다. 대체 원인이 뭘까 캐묻지만 동생은 묵묵부답이다.

아빠와 누나의 거듭된 설득에 로빈은 뒤늦게 말문을 연다. 학교에 입학한 직후에 외모가 튀는 그를 동기들이 '외계인'이라며 놀렸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자 로빈은 '거짓말쟁이'로 전락했다. 그 다음부터 동생은 대화를 포기하고 스스로 단절된 것이다. 진실을 알게 된 아빠는 로빈이 길을 걷다 발로 굴리던 조약돌을 언급하며 그저 돌은 돌일 뿐이라 말한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여기에 있다고, 마음속에 있다고 기운을 북돋워준다.

쿠르드 공동체와 일본 사회 사이에 낀 경계인의 딜레마

이들 이방인 가족은 대체 어느 나라 출신인 걸까? 사랴는 자기가 일하는 편의점에서 스스로를 독일에서 왔다고 말하지만 진실이 아니란 것쯤은 그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같이 일하다 친해지게 된 편의점 동료 '사토'에게만 살짝 들려준 '독일' 사칭의 사연은 이랬다. 월드컵 당시 독일과 일본이 맞붙은 시합에서 일본 팀을 응원하고 싶었지만 주변에서 이상하게 볼까봐 독일을 응원한다고 답한 뒤부터 어느새 사람들이 독일인으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결혼식 다녀와서 아르바이트를 바로 간 날, 상사가 행사 때문에 빨갛게 물들인 손바닥을 보고 위생 문제로 얼른 지우라 할 때엔 토마토를 많이 먹어서 그렇다며 반 농담으로 사토에게 말한다. 물론 양쪽 다 진지하게 여길 리 없다. 둘은 점점 가까워진다. 마침내 사랴는 사토에게 자신이 '쿠르드' 사람이라 말한다. 하지만 사토는 쿠르드에 대해 알지 못한다.

사랴는 꽤 먼 거리를 자전거로 왕복하며 아르바이트에 매진한다. 아빠는 동생들 돌볼 겸 만리타국에서 가족들이 함께 모이는 저녁식사를 중시한다. 늦게 귀가하지 말라는 타박이 이어진다. 아무래도 아르바이트를 몰래 하는 모양이다. 학교에서도 체육특기생이 될 수 있다며 부 활동을 그만둔 걸 담당교사가 아쉬워하고, 편의점 일도 성실히 수행한다. '노력은 반드시 보답을 받는다'고 사랴를 좋게 보는 교사는 격려해준다. 하지만 사랴가 수행해야 할 일은 더 많다. 일본어가 유창하다 보니 주변 쿠르드 이웃들의 통번역 업무가 몽땅 사랴 몫이다. 어릴 적 일본에 도착해 착실히 배웠다 보니 주변에서 어학능력이 가장 뛰어나기 때문이다.

사랴의 임무는 실로 다종다양하다. 집의 식탁 옆 벽면에는 자신에게 떨어진 통역 과제가 적힌 메모지가 가득 붙어 있다. 00네 수도국 점검전화도 받아줘야 되고, 00네 아이 일본어교실 수업도 입회해야 된다. 이웃집 아이 시력이 나빠져 안과 테스트를 가야 하는데 가족이 모두 공장 일로 바빠서 사랴가 데려가야 한다. 세 들어 사는 집 아래층 빨래방 이용 유의사항 안내문도 번역해서 부착해야 한다. 아빠는 딸을 자랑스러워하면서 동포 공동체 일에 신경 쓰라고 부담을 준다. 동생 '아린'은 사서 고생한다며, 언니가 그렇게 매번 도와주니 다른 쿠르드 사람들이 일본어가 늘지 않는다고 강 건너 불구경한다. 미운 시누이가 따로 없다. 사랴도 꿈 많은 10대 소녀 라이프 대신에 쿠르드 공동체 실무 간사 역할을 떠맡은 게 편치 않다.

그저 자기 시간 빼앗기는 것 때문만은 아니다. 쿠르드 공동체에 얽매일수록 자신이 일본에서 성장하면서 지니게 된 정체성과 충돌하고 침범 당하는 영역이 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토군과 로맨스& 우정 경계를 넘나들지만 쿠르드 전통대로라면 예비신랑이 이미 정해져 있다. 사랴는 그렇게 구속되는 처지가 불만족스럽다. 쿠르드 혈통이지만 일본에서의 삶과 방식이 더 익숙해진 지 오래다. 사토와의 만남을 우려하는 아빠에게 마침내 사랴는 사춘기 반항심을 폭발시킨다. 사연은 많지만 비교적 평화롭게 흘러가던 가족 앞에 폭풍이 몰아칠 전조다.

생존의 조건이 서류 한 장에 좌우되는 난민 잔혹사
 
 영화 <마이 스몰 랜드> 스틸 이미지
ⓒ 미디어캐슬
 
등하교는 물론 거리가 꽤 먼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위해 필수인 자전거가 갑자기 보이지 않는다. 사랴는 어리둥절해 자전거를 찾아 나선다. 아빠는 일하던 철거현장 주변을 방문한 경찰에게 신분증 제시를 요구받지만 얼마 전 난민신청이 불인정되면서 가족 전부가 체류카드 무효상태다. 불법 취업으로 아빠는 입국관리국에 강제 수용된다. 사실상 구금상태가 된 것이다. 아빠는 감옥에 갇힌 셈이고 3남매는 보호자도 없이 외톨이가 된다. 그들의 신분이 일순간에 족쇄로 변신한 것이다.

가족에게 난민신청 판정 대기 중에는 허용되던 모든 게 박탈된다. 취업도 금지, 현재 머물고 있는 사이타마 현 경계 밖으로 거주지도 이탈 제한이다. 쿠르드인들의 난민신청을 지원하는 인권변호사는 건강에 유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시설에 갇힌 아빠가 아니라 사랴를 비롯해 바깥에 있는 가족들에게 말이다. 이들에겐 국민건강보험도 적용되지 않기에 감기로 병원에 가도 전액 자비, 1만 엔은 감수해야 한다.

동생들은 아직 자신들이 처한 전락을 체감하지 못하지만 사랴에겐 생존의 위기가 가슴에 철렁 내려앉는 중이다. 열심히 일하던 아르바이트도 그만둬야 한다. 편의점이 도쿄 도 행정구역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 멀지도 않건만 경계를 넘는 건 금지된다. 친구들과 종종 가던 도쿄 하라주쿠 번화가도, 사토와 타코야키 먹으러 가자던 오사카도 사랴에겐 갈 수 없는 땅이 된다. 사랴의 불안정한 신분 때문에 그와의 교제가 상처가 될까봐 사토의 가족은 사랴가 그만 만나주길 요청한다. 이제 아빠도 친구도 다 강제로 이별하고 생계도 막막해지는 지경이다.

쿠르드 이웃들이 먹을 것도 가져오고 돈도 걷어 주지만 태부족이다. 가장이 부재한 가운데 원래 형편이 넉넉할 리 없던 쵸라쿠 가족에게 한계는 순식간에 찾아든다. 한푼 두푼 아끼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밀린 월세에 한여름 무더위 냉방도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쿠르드 공동체 실무는 감당해야 한다. 쿠르드 정체성이 약한 여동생 아린은 언니의 부담을 아는지 모르는지 밉상스럽게 툭툭 던지기만 한다.

사랴는 그렇다고 그와의 혼인을 꿈꾸는 쿠르드 청년의 도움은 받을 수 없다. 도움을 받는 것과 동시에 마음의 빚이 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활고를 해결할 뾰족한 수는 없다. 급기야 (수위가 낮지만) 원조교제 비슷한 일까지 고민할 지경이다. 사랴는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 그 와중에도 계속 일어나는 사고들, 그리고 아빠는 자녀들을 위해 모종의 결단을 내리기에 이른다.

유랑민족 쿠르드의 비극적 운명과 원인 제공자들

주인공 가족은 쿠르드 난민이다. 십자군 전쟁 시절 이슬람의 영웅 '살라흐 앗 딘(살라딘)'이 아마 가장 유명한 쿠르드 계통 인물일 테다. 튀르키예와 이라크, 시리아, 이란 등 중동 주요 국가에 골고루 퍼져 사는 이 쿠르드 민족은 3000만이 넘는 숫자를 자랑한다. 독자적인 독립국가를 갖지 못한 민족 집단 중 전 세계 최대 규모인 셈이다. 원래 이란 계열 산간 유목민 부족들이 중세를 지나며 이합집산을 거듭한 끝에 근대에 들어 민족 정체성을 갖춘 존재인 이들은 규모가 너무 큰 데다 주요 거주지가 하필 유전지대인 터라 신규로 독립하기 힘든 악조건에 처한 불운한 민족이다. 

물론 쿠르드인들은 20세기 들어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벌이는 중이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과 중동에서 대결하던 영국과 프랑스는 제국 치하의 여러 민족에게 독립을 약속하며 반란을 부추긴다. 이때 아랍 민족을 선동하던 인사가 '아라비아의 로렌스'다. 하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뒤 영국을 위시한 서구열강은 약속을 저버렸다. 이때 쿠르드인들에게도 비슷한 거래가 제시되었지만 역시나 헌신짝처럼 뒤집혔다. 그리고 대제국의 잔재에서 새롭게 독립한 중동의 신흥국가들은 쿠르드인들을 탄압하며 신생국 영역을 사수하고자 했다. 가장 큰 규모의 집단이 존재하는 '쿠르디스탄(쿠르드 인의 땅)' 지명을 가진 나라들, 터키와 시리아, 이라크, 이란 모두 일치했다.

하지만 주류 민족에게 소외된 이들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거듭 독립을 시도한다. 그 결과는 참혹한 학살과 민족문화 및 언어 말살 정책이었다. 강대국의 원조를 꾀하던 쿠르드인들은 (정작 그들의 독립운동을 배신한 주범인) 서구 열강에게 의지하지만 반대급부로 요구한 것들을 충실히 수행했음에도 또다시 버림받는 운명에 처한다. 

특히나 미국이 수행한 1990년대 이후 중동 무력개입에는 거의 모두 쿠르드 세력의 참전이 있었지만 약속은 지켜진 적이 없다. 그렇게 튀르키예나 이라크, 시리아 등 정부에게 미운털 박힌 쿠르드인들은 탄압에 직면해 난민으로 세계를 떠돌기 시작했다. 유럽으로 간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갈 곳을 찾던 이들 일부는 부유한 아시아의 섬나라를 찾는다. 왜 뜬금없이 쿠르드 난민들이 일본에 상륙했는지에 대한 답신인 셈이다.

쿠르드 난민 문제, 영화로 표현되기 시작하다
 
 영화 <마이 스몰 랜드> 스틸 이미지
ⓒ 미디어캐슬
 
왜 이렇게 일본에 쿠르드 난민이 많은 걸까? 역설적으로 가장 많은 쿠르드인이 사는 튀르키예와 일본 관계가 긴밀하기 때문이다. 몇 해 전 제주도에 예멘 난민이 대거 입국한 것도 관광특수를 꾀하던 제주특별자치도 입국 문턱이 육지보다 낮았기에 가능했던 것처럼, 일본-튀르키예 관계도 흡사했던 것. 주인공 가족도 튀르키예에서 온 쿠르드인이다.

어디에서나 동네북 신세이지만 가장 격하게 독립운동을 벌이고, 그만큼 탄압 강도도 심한 튀르키예 출신들이 난민 신청의 대다수다. 튀르키예 비자로 일단 일본에 입국한 후 난민신청을 진행하면서 행정절차를 처리하기 위해 도쿄 주변에 머물고 싶던 난민들이 중소기업이 많고 도쿄가 소재한 관동 지방에 속하는 사이타마 현에 모여 살게 된 것이다. 대략 3000명 가까운 쿠르드 난민이 일본에 머물고 있으며 이 중 과반수가 사이타마 현에 있다. 그런 실제 배경이 영화의 무대로 기능한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목격되듯 일본 정부는 난민 수용에 있어서 유사한 조건의 국가 중 최악의 비율만 제한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해마다 등감은 있지만 0.2%도 되지 않는다. 신청자격 요건을 갖춘 이들 중에도 이 정도에 불과하니 낙타를 보고 바늘귀 통과하라는 것보다 심하다. 그나마 신청 절차 도중에는 제한적으로 체류자격을 인정하지만 심판에서 탈락하는 순간 사실상 유배에 준하는, 그리고 경제활동과 사회보장에서 배제되는 상태로 전락하고 만다. 입국관리국 담당 직원에게 불인정 통보를 받자 아빠 마스룸이 호소와 분노에 뒤엉켜 외치던 절규, '집이 군대에 불타고 시위하다 감옥에 갇혀 고문을 당해도!' 난민이 될 수 없냐며 절절 매며 쥐구멍 찾는 직원 앞에 보여주던 고문의 흔적에도 불구하고 바뀔 틈이 없다.

그나마 유럽의 경우 난민신청을 허용하지 않아도 청소년의 경우는 성년이 될 때까지 추방을 유예한다거나 워낙 사례가 쌓여 있다 보니 부족하나마 구제책도 생기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안 받는 걸 전제로 한 일본의 난민 정책은 세계적으로도 논란이 많다. 아빠가 수용된 보호소는 사실상 구치소와 다를 바 없다. 변호사와 면회 중 잘 지내냐는 덕담에 마스룸은 신랄하게 말한다. '에어컨은 나오지 않지만 밥은 아주 차갑다'는 것이다. 특히 코로나19 창궐 기간 전후로 면회나 사회적 관심이 제약된 상황에서 인권침해와 학대 사건이 여러 차례 발생해 언론지상에 크게 오르내리기도 했을 정도다. 차라리 교도소라면 형기를 확인할 수라도 있을 텐데 기약 없는 감금에 정신병을 호소하거나 자포자기 상태로 건강을 해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이런 쿠르드 난민 문제는 이 영화와 비슷한 시기에 상당수의 다큐멘터리가 제작되는 배경으로 작용한다. 그중 국내 영화제에서 소개되어 일정한 관심을 가져온 것들도 있다. 저널리스트 출신 휴가 후미아리 감독의 연작이 대표적인 사례인데, 그는 2018년에 <도쿄의 쿠르드 청년>이라는 중편을, 2021년에는 전작을 확장한 형태의 장편 <도쿄의 쿠르드 족>을 완성해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와 전주국제영화제 등을 통해 국내 관객과 만난 바 있다. 해당 다큐멘터리들은 <마이 스몰 랜드>의 실사 버전이라 해도 좋을 만큼 큰 틀에서 동일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두 편의 기록영화에선 공통적으로 이제 성년을 앞둔 쿠르드 청소년들이 고민하는 불투명한 미래, 불법취업 단속을 피해 건설 일용직을 전전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사랴처럼 외모가 빼어난 쿠르드 소년은 모델이나 연예인을 지망하지만 그의 신분상 위치 때문에 번번이 미끄러지고 대학 진학도 여의치 않다. 

난민 문제에 대한 전향적 접근을 안내하는 영화의 매력
 
 영화 <마이 스몰 랜드> 스틸 이미지
ⓒ 미디어캐슬
 
그렇게 국내에는 생소하기 그지없지만 일본 내에선 사회문제로 대두된 지 오래인 쿠르드 난민 문제이지만 <마이 스몰 랜드>의 의미와 가치는 절대로 작지 않다. 다큐멘터리가 소재와 배경에 관심을 가진 관객을 찾는 방식이라면 로맨스/멜로물의 외피를 지닌 이 드라마는 난민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던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빠져들게 만드는 보편성 측면에서 강점이 뚜렷한 작업이다. 복잡한 국제정세에 넌더리를 내며 질색하다가도 기본적으로 청춘 성장영화 구조를 갖춘 영화의 전개를 따라가다 보면 어렵지 않게 시민의 상식선에서 색안경 없이 해당 사안을 관조할 수 있게 해준다.

영화는 복잡하기 그지없는 국제정치적 고려 없이 가족애와 시민의 연대로 해당 사안을 바라보도록 돕는다. 화면 속 쿠르드 난민 가족은 피부색과 외모는 다를지언정 속내는 일본의 평범한 이웃들과 다를 바 없다. 난민신청 불승인 선고를 받고 낙담한 가족은 기운을 낼 겸 라멘 집을 찾는다. '최후의 만찬'처럼 아이들에게 각자 토핑은 3종까지 허락한다는 아빠의 선심, 그리고 면치기 때 후루룩 소리를 내는 게 맛있나 조용히 먹는 게 맛있나 논쟁을 벌이는 풍경은 중동 난민에게 우리가 가진 편견을 멀리 날려 보낸다. 아이들은 또래 일본 아이들과 함께 아이돌 노래에 맞춰 거리에서 댄스 연습에 몰두하고 건물 철거 일용직으로 일하다 컵라면으로 끼니를 요기하는 건 국적과는 하등 상관없다.

여기에다 영화는 샤라와 소타, 두 청춘 남녀의 풋풋한 감정을 황순원의 <소나기>를 연상케 하는 수채화 같이 아름답고 잔잔한 풍경 속에서 그려낸다. 둘은 끝까지 러브라인과 우정 사이 어딘가에 머물긴 하지만 각자의 꿈을 공유하고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하며 힘을 얻는다. 거기에 가족애라는 동서양 막론하고 공감 가능한 코드가 위력을 발휘한다. 소타 역시 돈 벌기 힘든 미술에 재능이 있어 엄마의 근심걱정 대상이다. 사랴와 함께 설거지를 하던 소타의 엄마는 '부모는 자식이 행복하길 바라니까'라며 부모라면 누구나 공감할 입장을 내비친다. 이를 통해 사랴 또한 갈등이 팽배했던 아빠와의 감정을 돌아보게 된다.

영화는 일본에서 살아가는 쿠르드인이라는, 고정관념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존재의 개성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데에도 노력한다. 서두에서 강조된 것처럼 영화 속에선 다언어가 활용된다. 그냥 쿠르드인들끼리는 쿠르드 어를, 일본인과 대화할 때는 일본어를 구사하는 단순한 구분을 넘어서, 등장인물 각자가 각각의 언어를 어떤 상황에서 누구와 통하는지 따라 캐릭터의 감정과 상황 맥락이 오르내리는 식으로 활용되기에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쿠르드 공동체에 구속되길 부담스러워하던 사랴가 식사시간에 늦어 꾸중하는 아빠와 언쟁하는 순간이 상징적이다. 아빠는 쿠르드어로 딸에게 화를 낸다. 하지만 딸은 굳이 일본어로 아빠의 말 듣기 싫고 강요하지 말라며 외친다. 자신을 이역만리 떨어진 일본에 데려와 살게 했으면 그에 대해 책임을 져야할 것 아니냐는, 자유롭게 풀어놔주길 요구하는 태도다. 그럼에도 쉽게 옷을 갈아입듯 떼어낼 수 없는 쿠르드 문화와 전통의 무게도 깨알같이 튀어나오곤 한다. 사토가 엉겁결에 사랴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체험하는 쿠르드 전통요리나 식사예절, 그리고 쿠르드 이웃들이 아빠 없는 사랴 가족에게 챙겨주는 중동 특유의 미트볼 '쾨프테' 같은 장치들이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이목을 잡아끈다.

영화 속 사례와 우리는 얼마나 다를까

영화는 현실의 냉혹함을 부정하고 판타지로 치닫지 않는다. 잔인한 세상을 굳이 극단적으로 보여주려 하지는 않지만 대책 없는 낙관도 경계한다. 아빠의 결심과 사랴의 각오, 그리고 의지할 곳 드문 땅에서 이들 가족 앞에 예정된 미래는 장밋빛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그럼에도 잠시나마 주인공과 식구들에게 차가운 현실을 잊게 만드는 데에는 몇 안 되는 시민들의 연민과 함께 지방 소도시의 여유로운 풍광, 그리고 (소타를 촉매로 활성화되는) 미술의 힘이 결코 작지 않게 작용한다. 그런 섬세한 구성과 함께 상투적 악역은 존재하지 않는 설정이 은근한 매력을 발휘한다. 이 영화 속에선 누구도 혐한 부류처럼 타인에 대해 원초적으로 악의를 가진 이가 없다. 그 덕분에 관객은 오히려 그릇되고 냉엄한 제도 탓에 두려움과 경계심, 차별이 양산되는 시스템 문제를 질문하고 돌아보게 된다.

민감한 난민 쟁점을 다룬 영화이기에 기본정보만 보고 쌍심지를 켜며 0점 별점을 매기거나 악성 댓글을 달려는 이들이 제법 있을 법하다. 이미 외부에서 이식된 편견을 고정하고 눈과 귀를 가린다면 답이 없지만, <마이 스몰 랜드>를 직접 목격하고 스스로의 판단을 교정해보라고 영화의 제작진은 친절히, 때로는 간절하게 호소하려는 태도를 유지한다. 부드럽고 섬세한 표현력과 함께 누구나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는 톤&매너를 고수하지만 결코 대충 쟁점에 관해 미지근하게 다룰 뜻은 전혀 없는 '부드러운 직선' 같은 영화다. 감독의 이름이 낯설지만 제작자와 제작회사를 확인하면 의문은 대부분 눈 녹듯 사라질 법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설립한 영화사 '분보쿠' 멤버인 감독은 오랜 기간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스태프로 일하면서 준비한 첫 장편을 쿠르드 난민 소재로 세상에 선보인 것이다.

영화는 일본의 속 좁은 난민정책 폐단을 한 가족의 수난사 드라마라는 절제되고 정돈된 형태로 관객에게 권한다. 하지만 시야를 바로 옆 나라 한국으로 옮긴다면 <마이 스몰 랜드> 속에서 주인공과 식구들이 처한 고초가 동일한 처지의 국내 난민 신청자들이나 하등 다를 바 없다. 1세계 선진국 반열에 호명되는 나라들 중 난민신청 인정비율 박하기로는 쌍벽을 이루는 일본과 한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 그래도 미운털 박힌 옆 나라 정책의 파탄 사례를 보던 우리나라 관객들이 '그렇다면 한국은 어떤가?' 돌아보기 시작하면 부끄러워질 수밖에 없다. 그런 민망함 속에 천천히 펼쳐지는 측은지심을 느낀다면 영화를 만든 이들의 진의는 별 누수 없이 온전하게 전해진 거라 봐도 무방할 테다.

마지막으로, 영화의 제목을 직역하면 '나의 작은 나라'란 뜻에 가깝다. 과연 난민 가족이 상상하는 '작은 나라'가 작품 속에서 어떤 이미지로 드러날지 궁금함을 풀기 위해 극장을 찾아볼 법하다. 그리고 그 대가는 후회 없는 선택으로 보상받을 게다. 반드시 참고 기다린 만큼 아름답고 뭉클한 결과를 확인하게 될 테니 말이다.
 
<작품정보>
마이 스몰 랜드 My Small Land
2022|일본, 프랑스|드라마/가족
2024.02.01. 개봉|115분|12세 관람가
감독/각본 가와와다 엠마
주연 아라시 리나(사랴 역), 오쿠다이라 다이켄(소타 역)
출연 후지이 타카시, 이케와키 치즈루, 히라이즈미 세이, 칸 하나에.
요시다 우롱타, 이타바시 슌야, 타무라 켄타로,이케다 료,
신타니 유즈미, 오구라 이치로
제작 고레에다 히로카즈
수입/배급 미디어캐슬
 
2022 72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공식초청
2022 28회 부산국제영화제 공식초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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