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준의 여행만리]동네 개도 만원 물고 다닌 그시절

조용준 2024. 2. 2.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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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 철암마을 까치발 건물을 아시나요
1970~1980년 탄광역사 찾는 시간여행
서울 명동보다 더 화려한 시절의 태백
철암탄광역사촌의 까치발 건물
오늘도 무사히, 출근하는 광부가 가족에게 손을 흔드는 동상

전국의 겨울 여행지로 손꼽으라고 하면 꼭 드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강원도 태백입니다. 만항재의 아름다운 눈꽃과 백두대간의 장엄한 겨울산맥을 조망할 수 있는 함백산과 민족의 정기가 가득한 태백산, 매봉산 바람의 언덕 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여행지가 있습니다. 그뿐인가요. 대형 눈조형물로 유명한 태백 눈꽃축제도 큰 몫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이야기는 겨울 태백의 아름다운 풍경이 아닙니다. 1970~1980년대 서울의 명동거리보다 더 호황을 누렸다 잊혀져간 탄광촌의 풍경을 찾아가는 시간여행입니다. 지나다니는 동네 개들도 만원짜리 지페를 물고 다녔다고 할 정도의 호시절의 태백은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을까요. 얼마남지 않은 겨울, 태백으로 여행을 계획하신다면 탄광시절의 역사를 찾아가는 일정도 꼭 끼워 보시기 바랍니다.

태백 철암역에서 약 170m 거리에 있는 철암탄광역사촌은 옛 탄광촌 주거 시설을 복원·보존한 생활사 박물관이다. 감독이 “액션!”을 외치면 금방이라도 배우들이 열연을 펼칠 듯한 과거 풍경이 그대로 남아 있다. 탄광에서 석탄을 캐던 광부와 연탄을 처음 본 아이가 만나는 곳, 태백이 대한민국 석탄 산업의 중추 역할을 한 그곳으로 떠난다.

탄광촌이 활황이던 1970년대 철암 지역은 광부가 되려는 이들 수만 명이 몰려 서울 명동 거리만큼 붐볐다. 철암연립상가부터 산비탈 판자촌까지 도시가 급속도로 확장된 철암의 ‘리즈 시절’이다. 탄광촌에서는 개도 1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닐 만큼 경기가 좋았다는데, 철암 동네 개는 10만 원권 수표를 물었다고 할 정도로 석탄 산업의 전성기를 누렸다. 광부에겐 위험수당까지 포함한 고임금이 보장돼, 철암은 인생 역전의 밑천을 마련할 ‘기회의 땅’이었다. 철암의 영화(榮華)가 레트로 감성을 입은 철암탄광역사촌에서 하나둘 전개된다.

낡은 건물이지만 역사적 가치를 지닌 까치발건물의 뒤
낡은 건물이지만 역사적 가치를 지닌 까치발건물의 앞

철암탄광역사촌은 11개 건물 가운데 총 6개 건물을 전시 공간으로 꾸몄다. 페리카나와 호남슈퍼, 진주성, 봉화식당을 거쳐 한양다방에서 마무리하는 동선이지만, 각각 독립된 공간이라 취향에 맞게 골라 들어가면 된다.

산울림, 붐비네, 젊음의양지 등 향수를 자극하는 간판이 보이는데 모두 폐업 상태다. 알면서도 문을 열고 들어가면 노포 주인장이 반갑게 맞아줄 것만 같다.

‘페리카나’ 1층은 관리사무소다. 2층 기획전시실에는 각종 장부와 철암 지역 학생들의 성적표, 계약서, 광부들이 매일 마셨을 소주 등을 전시한다. 강도 높은 노동 후 퇴근길에 맛보는 돼지고기와 삼호소주 한잔이 남은 하루를 견디는 힘이 됐을 터. 추억의 향토주 맛을 그리워하는 관람객의 눈길이 멈추는 곳이다.

전시실 흑백사진 속, 월급날 사무실 풍경이 인상적이다. 야무지게 말아 올린 파마머리 여성들이 눈에 띈다. 당시에 월급을 현금으로 지급했는데, 바깥양반의 호탕한 씀씀이를 걱정한 아내가 선수를 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광부 월급은 공무원의 곱절이었고, 서울 종로 거리에나 있을 법한 다방과 술집이 헤아릴 수 없었다니 빈 월급봉투에 대한 우려도 이해가 된다.

철암의 골목풍경 재현한 전시
광부 노임지불명세서

‘진주성’은 관광객 쉼터와 복합 문화 공간, 철암 다큐멘터리 공간으로, ‘호남슈퍼’는 철암의 유래·역사 관련 전시 공간과 선탄장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로 꾸몄다.

철암에는 마을 북쪽 백산과 경계가 되는 철도 변에 높이 20m, 너비 30m가 넘는 바위가 있는데, 쇠 성분이 많아 ‘쇠바위’라 했다. 바위에서 뗀 돌을 녹여 쇠를 얻기도 해 쇠바위마을, 한자로 철암리(鐵巖理)라 불렀다.

호남슈퍼 2층에는 광부들의 모습을 담은 선술집과 가정집, 마을 골목을 재현했다. 부엌과 난방시설에 연탄이며 조개탄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전망대에 오르면 태백 철암역두 선탄시설(국가등록문화재)이 한눈에 들어온다. 층층이 파인 검은 산이 흰 건물과 대비된다. 태백에 마지막으로 남은 탄광인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에서 보낸 원탄을 선별·가공해 현장에서 쓸 수 있게 만든 다음 화물열차에 싣는다. 장성광업소와 철암역두 선탄시설도 올해 6월 말, 역사 속으로 사라질 예정이라고 한다.

눈덮힌 철암마을
동네 강아지도 만원을 물고 다니던 시절을 그린 벽화

과거 탄광촌은 도시의 확장 속도를 건축이 따라가지 못해 증축을 거듭했다. 원래 있던 건물은 상가로 활용하고, 철암천 쪽으로 공간을 확장해 지층 아래 살 집을 마련했다. 이때 건물을 지지하기 위해 까치발처럼 기둥을 만들었는데, 이곳이 ‘까치발 건물’로 불리는 까닭이다. 까치발 건물을 제대로 보려면 신설교에 서야 한다. 어떤 건물은 층마다 자재와 건축 스타일이 다르다. 탄광의 흥망성쇠가 까치 울음소리로 들려오는 듯하다. 철암탄광역사촌 앞 표석에 ‘남겨야 하나, 부수어야 하나 논쟁하는 사이, 한국 근현대사의 유구들이 무수히 사라져갔다’는 말이 이곳이 존재하는 이유를 대변한다.

신설교를 지나 언덕에 오르면 산동네와 마주한다. 여기가 광부들이 모여 살던 삼방동이다. 광부 아버지가 빨간 보자기로 싼 도시락을 들고 아이와 함께 선 조형물이 보인다. 오늘 나선 막장이 삶의 마지막 장이 아니길, 가족은 매일같이 기도했을 것이다. 산동네에선 철암탄광역사촌의 까치발 건물과 철암역두 선탄시설, 쇠바우골탄광문화장터, 철암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알록달록한 벽화가 쇠락한 마을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철암역은 1940년 영업을 시작했다. 철도가 없는 장성에서 생산한 무연탄이 철암역을 거쳐 전국으로 나갔기에 그 위상이 대단했다. 1980년대 강릉역 역무원이 28명, 철암역 역무원이 300여 명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이후 석탄 산업이 쇠퇴하며 철암역의 위상도 떨어졌고, 백두대간협곡열차(V-Train) 시발역이자 종착역이 되면서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지질학적으로 가치가 높은 구문소
만항재의 눈꽃길을 걷고 있는 탐방객

철암탄광역사촌에서 자동차로 5분쯤 가면 태백8경에 드는 구문소(천연기념물)가 있다. 태백시 남쪽 황지천과 철암천이 만나는 곳인데, 암벽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동굴 형태가 신기하다. 석회암이 겹겹이 쌓인 층에서 다양한 퇴적 구조가 드러나고 고생대 화석이 발견돼, 지질학적 가치가 뛰어나다.

구문소 지질에 대한 궁금증은 인근 태백고생대자연사박물관에서 해소한다. 고생대에는 구문소 일대가 바다였는데, 당시 존재한 해양 생물 화석이 이를 증명한다. 국내 유일하게 고생대 지층에 세운 태백고생대자연사박물관은 선캄브리아기부터 고생대, 신생대 인류의 출현과 발전까지 두루 살펴볼 수 있는 전문 박물관이다.

해발 800m에 자리한 몽토랑산양목장에서 태백 시내를 조망해보자. 유산양 130여 마리와 거위, 산토끼가 노니는 풍경이 목가적이다. 먹이 주기 체험도 색다르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다가오는 유산양의 웃는 모습에 먹이통이 비는 건 순식간이다. SNS 핫 플레이스로 소문난 몽토랑카페에선 매일 짠 신선한 산양유와 갓 구운 빵도 맛볼 수 있다.

◇여행메모

△가는길=광주원주고속도로→중앙고속도로→제천 IC에서 영월·제천 방면→신동교차로→고명교차로에서 영월·쌍용 방면→황지교사거리에서 도계·동해 방면→철암역·철암농공단지 방면 우회전→철암탄광역사촌.

태백산 눈꽃(왼쪽)과 이번주에 막을 내리는 태백 눈꽃축제장(오른쪽). 축제장의 조각품은 눈이 녹을때까지 볼수 있다

△볼거리=매봉산 바람의 언덕, 태백 용연굴, 만항재, 태백산, 함백산, 태백고생대자연사박물관, 통리탄탄파크, 365세이프타운, 태백석탄박물관, 황지자유시장. 철암탄광역사촌 운영 시간은 오전 10시~오후 5시(첫째·셋째 월요일 휴관), 입장료는 없다.

△먹거리=떡, 면, 고구마 등 사리에 육수를 붓고 끓여 먹는 태백 닭갈비가 별미다. 자극적이지 않고 담백하다. 육질 좋은 한우 생고기를 연탄불에 구워먹는 것도 태백에서 꼭 한번 먹어볼 만 하다.

태백=글 사진 조용준 여행전문기자 jun21@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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